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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387화 (386/405)

2부 127화

동부

벨린은 속으로 의아함을 느꼈다.

사절단이 예상했던 것보다 너무 빨리 나왔으니까.

‘소박이라도 맞았나?’

메르빙거와의 충돌은 짐작하던 일이긴 했다.

애당초 황실에서 노렸던 것도 바로 그런 부분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냥 충돌했다고 하기엔 다친 구석도 없고, 와즐이 그냥 잔뜩 열이나 받은 것처럼 보였다.

“마침 잘 왔네. 아니 글쎄 이 자식들이…!”

무슨 성토라도 하려는 듯이 잔뜩 얼굴이 붉어져 있었지만.

벨린은 그런 게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와즐 따위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게 뭔가.

그에게 중요한 것은 정작 따로 있었다.

“찬성공작에게 황제의 말씀은 잘 전달하셨습니까?”

“으, 응?”

“폐하의 말씀을 잘 전했냐고 여쭸습니다.”

작지만 날카로운 눈매.

아무리 삼공이라 어깨를 펴고 다니는 와즐이라 하더라도, 벨린에겐 대놓고 성질을 부릴 수 없었다.

현재 황실에서 가장 입지가 좋은 크롬헬의 직속 부하였으니까.

“얘기야 당연히 전했지! 그런데 그놈들 반란을 모의하는 게 분명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누군가! 태위의 직급에 오른 삼공이 아닌가! 사람 보는 눈이 나만큼 확실한 사람도 없을 걸세! 딱 보면 알지!”

와즐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놈들은 말로만 경고할 게 아니라 정말 황실의 정병들로 짓밟아 버려야 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하도록!”

“….”

벨린의 눈빛이 서서히 차갑게 가라앉았지만, 와즐은 눈치를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황제께서는 왜 저놈들을 한 번 봐 줘 가지고. 그러니 이렇게 또 기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말씀 조심하시지요, 삼공. 아무리 삼공이라 하여도 방금 발언은 황제 폐하를 무시하는 발언입니다.”

“아… 흠흠! 그건 내 사과함세.”

벨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서슬퍼런 눈빛.

와즐은 그제야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모양이었다.

적당하게 눈치를 보면서 슬쩍 말을 돌렸다.

“아무튼! 야만족들이랑 어울리더니 아주 못 쓸 것들이 됐어.”

“….”

“생각해보니 메르빙거 놈의 편을 들어주고 있는 마탑이나 신교 동맹도 문제인 거 같은데, 이참에 싹 다 엮어서 정리해버리자고!”

벨린은 거기까지 듣고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뒷목에서부터 올라오는 두통을 참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평소 행실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제대로 문제가 생긴 모양이군.’

와즐이 메르빙거에게 어떤 대우를 받았을지 딱 보였던 것이다.

사실 어려운 임무도 아니었다.

단지 황제의 명을 적힌 대로만 읽고 오면 되는 일.

하지만 제대로 초를 쳐놨으니.

‘애당초 그걸 노린 거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쪽에서 노렸던 바를 제대로 해낸 것 같지도 않고.’

병사들의 표정까지 보니 확신이 섰다.

쯧!

벨린은 속으로 혀를 가볍게 찼다.

차라리 와즐의 목이 효수되었거나, 어디 두들겨 맞기라도 했다면 이걸 명분으로 삼아 메르빙거에 제재를 가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래서야 아무것도 못하지 않은가.

하긴 엘릭 메르빙거도 이쪽의 이런 노림수를 읽었을지도 모른다.

즉, 아무런 소득도 없이 동부에서 황실의 이미지만 대거 깎아 먹은 셈.

저 나이를 먹고도 어떻게 저렇게 아무 쓸모도 없을 수가 있나 싶었다.

“경! 벨린 경! 지금 내 말 듣고 있는가? 어서 황궁으로 돌아가자고!”

“….”

벨린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눈으로 와즐을 내려다봤다.

‘자세한 얘기는 병사들에게 들으면 되겠지.’

쓸모가 없다면 치워버리는 수밖에.

위에서 내려온 명령이 있기에 부담도 없었다.

‘원래 의도했던 바를 수행하지 못하면 다른 용도로 쓰라고 말씀도 하셨으니.’

척!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허리춤에 걸어둔 검집으로 손을 옮겼다.

* * *

똑똑.

누군가 접견실의 문을 두드렸다.

“엘릭 님. 사절단에서 다시 사람이 왔습니다.”

“…!”

“…!”

사절단이라는 말에, 가신들이 놀란 얼굴로 엘릭에게 시선을 돌렸다.

얼마나 오합지졸인지 곧 알 수 있을 거라더니.

딱 그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엘릭은 ‘내가 뭐라고 했습니까’라는 표정을 지어 보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들여보내도록.”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경례와 함께 안으로 들어온 병사의 뒤에는 사절단의 호위 기사가 한 명 서 있었다.

다만, 조금 전에 와즐과 함께 들어왔던 이는 아니었다.

눈에 띄는 게 있다면, 기사의 옆구리에 고급스러워 보이는 나무 상자가 하나 끼어 있었다는 것.

엘릭은 그것을 흘낏 보면서 물었다.

“무슨 일이지?”

“아, 사절단에서….”

“호위대장 벨린이라고 합니다.”

벨린이 병사의 말을 끊으며 앞으로 나왔다.

“조금 전에 있던 무례에 대해 사과를 드리고자 이렇게 선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선물?”

헤르만이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쫓겨날 때까지만 해도 할 수 있는 욕은 다 퍼붓는 것 같았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사과와 함께 선물을 준다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기에 놓아도 되겠습니까?”

“그러게.”

쿵!

벨린은 나무 상자를 책상 중앙에 올렸다.

“안에 뭐가 들었지?”

“보시면 만족하실 겁니다.”

벨린의 입꼬리가 가볍게 올라갔다.

“그럼 열겠습니다.”

딸깍!

별다른 제지가 없자, 망설임 없이 잠금장치를 풀었다.

그러자 드러난 내용물.

“…!”

“…!”

“허…!”

순간, 가신들 모두가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상자 안엔 와즐의 머리가 들어있었으니까.

하지만 놀라지 않은 이가 딱 한 명 있었다.

바로 엘릭.

“봤죠?”

그는 가신들을 보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 * *

“삼공이 찬성공작께 보인 결례는 다른 기사들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본인이 책임을 져서 마무리 짓겠다고 하셔서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던 것인데…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 이 자리를 통해 제가 직접 사과드리겠습니다.”

벨린은 엘릭 앞에서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다.

너무 당당하기에 오히려 정말 이게 사과가 맞나 싶을 정도.

엘릭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의 사과가 가신들이 아닌 자신에게‘만’ 향하는 것이란 걸 눈치챈 것이다.

‘다른 가신들에게는 고개를 숙일 수 없다는 거겠지.’

물론, 내색하지는 않았다.

“괜찮습니다. 고개를 드세요. 본인이 직접 하신 것도 아니고.”

“감사합니다.”

벨린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곤 입을 뗐다.

“일단, 오해가 있었다는 말씀부터 드리고 싶습니다.”

“오해? 우리가 들은 게 있는데 무슨 오해가 있는지 모르겠군.”

안드레가 다소 경계하는 투로 물었다.

와즐의 목을 베었다고 한들.

메르빙거와 동부에 대한 황실의 적대심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이런 식으로 방심을 유도하다, 말도 안 되는 명분과 함께 기습해 올 수도 있는 일이었다.

자신만 해도 과거에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쓰지 않았던가?

이미 한 번 그런 적이 있는데, 두 번은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황실이 공작께 의심을 품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요.”

하지만 그런 안드레의 태도에도, 벨린은 태연한 투였다.

이 정도 반발은 어느 정도 예상한 모양이었다.

“다만, 그렇다고 신경전을 벌이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메르빙거는 제국의 큰 공을 세운 가문이니까요.”

“….”

“또한, 삼공이 했던 말은 제국의 입장이 아닙니다.”

“그자의 독단적인 행동이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제국은 공작님을 반역자로 여기지 않을뿐더러, 편하실 때 ‘사소한’ 오해를 풀어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안드레는 거기까지 듣고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엘릭을 돌아봤다.

‘이 자의 말을 들으실 겁니까?’

벨린의 말은 얼핏 듣기엔 그럴싸해 보이지만, 말도 안 되는 변명에 불과한 탓이었다.

황실 또한 엘릭이 감찰국과 사자공가와 충돌한 이유를 뻔히 알고 있을 터.

그럼에도 이렇게 사절을 보냈다는 건, 엘릭을 반역자로 간주하고 싶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어떻게든 자신들의 치부를 숨기고, 가장 큰 위험이 될 엘릭을 처리하기 위해서.

그런 상황에서 뭐?

뻔뻔하게 오해를 풀어달라니.

어이가 없어 말도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일단 한 번 쑤셔보고 별 반응이 없으면 거둔다… 애당초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겠지.’

엘릭으로서는 우습기만 했다.

“물론입니다. 저 또한 황실과 이런 식으로 감정이 상하고 싶진 않았으니까요.”

“이해해주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그의 말에 벨린이 반색하며 재차 입을 열었다.

서로가 서로의 속내를 훤히 알면서도 가면을 쓰고 대화를 나누는 것.

그것이 결국 정치가 아니겠는가.

“자칫하면 작은 오해 때문에 황실과 메르빙거가 오랜 시간 쌓아온 관계가 망가질 뻔했습니다.”

“하하하! 그러게나 말입니다.”

엘릭과 벨린이 기분 좋게 웃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다소 화기애애해진 분위기 속에서 간단한 대화가 오갔고.

벨린은 조만간 황실에서 보자는 말을 마지막으로 접견실을 나섰다.

뚝.

그러기 무섭게 엘릭의 입가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웃기지도 않는군.”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하지만 조금 전의 일이 마냥 무의미한 건 아니었다.

이렇게 저자세로 나왔다는 건, 곧 엘릭의 생각처럼 황실의 상황이 영 좋지 않다는 걸 의미했으니까.

만일 그들에게 여유가 있었다면, 더욱 강하게 나오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그러기는커녕.

‘수틀리니까 바로 삼공의 목을 베어서 가지고 와?’

피식.

‘다시 생각해도 웃기네.’

엘릭이 헛웃음을 들이켰다.

아무리 삼공이 명예직이라지만 호위 기사의 손에 죽다니.

이는 곧, 이 정도로 황실의 위계질서가 개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나 다름없는 꼴이었다.

조금 전에 했던 엘릭의 말대로 오합지졸 그 자체.

“보셨죠? 당분간 황실이 동부를 괴롭힐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엘릭이 자신 있게 말했다.

덕분에 가신들은 다소 안심할 수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도 황실은 군대를 운용할 상황이 전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긴장을 풀 생각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당장’ 문제가 없는 거지, 앞으로는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여하튼, 이 자리는 이만 끝내는 걸로 하겠습니다. 각자 할 일이 많으실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가신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젠가 있을 전쟁을 대비하려면 준비해야 할 게 산더미였다.

“고생하셨습니다. 주군.”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그리고 두 가신이 자리에서 일어난 그때였다.

“아, 둘은 잠깐 남도록 하지.”

엘릭은 두 사람을 멈춰 세웠다.

브라이언과 아테.

별의 종군의 간부였다.

* * *

접견실의 모든 가신이 나갈 때까지.

두 사람은 줄곧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엘릭이 자신들을 남긴 이유가 떠오르지 않은 탓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가신이 사라졌을 때.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엘릭의 입이 열렸다.

“아뇨 무슨 말씀을.”

아테는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손사래를 쳤고.

“그런데 주군께서 저흰 어쩐 일로….”

브라이언은 조심스레 물었다.

“아, 다름이 아니고 줄 게 좀 있어서 말이야.”

“줄 것 말입니까?”

엘릭은 고개를 끄덕이며 책상 위에 여러 책자를 올렸다.

그리곤 두 사람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확인해봐.”

“….”

브라이언과 아테는 각자 책자 하나를 들고는 그 내용을 살폈다.

팔락, 팔락.

책장이 넘어갈 때마다 그들의 눈이 경악에 물들었다.

“주, 주군! 대체 이런 건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는지, 브라이언은 책과 엘릭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어때? 대단하지?”

엘릭이 뿌듯하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대단하다는 말로는 표현이 되지 않습니다! 이건 현대 마도공학 기술보다 몇 발자국은 더 앞선 기술이지 않습니까?”

브라이언은 단지 책자의 내용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만일 이것들을 제대로 활용만 한다면 엄청난 무기를 손에 쥐는 셈이었다.

누구도 감히 동부를 넘볼 생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그러니 그가 흥분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겠지. 그건 옛 메르빙거의 유산이니까.”

“…!”

엘릭이 건넨 것은 바로 여름, 미르카의 비전이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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