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26화
동부
와즐이 엘릭을 비웃으며 말했다.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애들조차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메르빙거가 감히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
엘릭이 무표정한 얼굴로 와즐을 빤히 바라봤다.
‘벌써 소문이 그렇게 퍼졌나.’
생각보다 빠른 속도였다.
아니, 정확하게는 감찰부의 잔당들이나 사자공가에서 그렇게 소문을 퍼뜨렸겠지.
그렇다면 이렇게 널리 퍼지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그걸 빌미로 이렇게 찾아온 것일 테고.
황실의 사절이 이렇게 도착한 것을 봐서는 이미 만반의 준비를 마쳐둔 것 같았다.
메르빙거를 적으로 돌리고도 확실하게 승산을 가질 수 있을 준비를.
‘하긴 크롬헬과 척을 진 순간부터 황실과의 연은 끊어졌다고 봐야겠지만.’
엘릭은 그저 마를 탄압하고 가문의 유산을 지키기 위해 한 행동이었지만.
저들에게 그런 사실 따위가 어디 중요할까.
황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네들의 체면일 테니.
엘릭의 얼굴이 무표정하게 가라앉았다.
와즐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니 잘 해명해야 할 겁니다. 만일 그렇지 아니 한다면….”
“아니 한다면?”
“백만의 황실 대군이 동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릴 거요.”
협박이나 다름없는 말.
부릅떠진 가신들의 눈이 일제히 엘릭에게 향했다.
저대로 놈을 가만히 둘 것이냐고.
분노와 적의가 뒤섞였다.
한편으로는 ‘백만 대군’이라는 단어에 근심과 걱정을 드러내는 이들도 많았다.
지금까진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추측의 영역에 불과했다면.
이것은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셈이니.
“공작, 왜 아무 말이 없지? 설마 겁이라도 먹은 건가?”
와즐이 비아냥거리며 더욱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느새 말꼬리도 짧아져 있었다.
한창 신이 난 투였다.
“확실히 어리긴 어리군. 고작 이 정도에 겁을 먹을 줄이야. 그래도 걱정하지 마라, 해명만 잘한다면…!”
“냄새가 나는군.”
“…뭐?”
와즐이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냐는 듯이 눈을 끔뻑거렸지만.
엘릭은 더 깊게 대화를 나눌 게 없다는 투였다.
“치워.”
순간 대기하고 있던 엘릭의 병사들이 와즐의 양팔을 붙들었다. 호위 기사들이 황급히 검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이, 이것들이 미쳤나! 어서 놓지 못 할까아! 나는 황제의 사절이다! 나를 모욕한다는 건 황제 폐하를 모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이다!”
와즐은 당황한 나머지 뚱뚱한 팔을 휘적거렸지만, 병사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쿵!
오히려 스스로 중심을 잡지 못하고 엉덩방아를 찍을 뿐.
병사들은 악을 쓰며 그런 와즐을 일으켜 세웠다.
그는 병사들에게 붙잡혀 얼굴이 붉어진 채로 소리쳤다.
“호위들은 지금 뭐 하느냐? 어서 이 자들을 막지 않고!”
하지만 호위들은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섣불리 움직이면 벤다.”
“머리통이 갑자기 바닥에 떨어져도 우리는 책임 못 져.”
“…!”
“…!”
“…!”
어느새 헤르만과 안드레가 호위 기사들의 뒤를 점한 채 검을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덩치가 큰 바투가 엄청난 위압감을 일으키면서 호위 기사들의 기세를 모두 물리쳐 버렸으니.
호위 기사들은 이에 사색이 되어 침만 꿀꺽 삼켰다.
그동안 대등한 줄로만 알았던 기세가 사실 메르빙거 측이 봐준 것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거기서 검을 뽑는 시늉이라도 했다간 여기 있는 모두 팔이 온전하게 나가지는 못할 거다.』
여기다 네임리스의 날카로운 전음까지 귓가를 파고드니.
당장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듯한 느낌까지 받았다.
“이, 이것들이…!”
호위들이 아무것도 하질 못하니, 와즐도 분노를 토해내는 것밖에는 하지 못했다.
덤비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것이다.
“공작, 공작!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나 참, 귀에도 살이 쪄서 말이 안 들리나.”
“뭐, 뭐라!”
엘릭은 귀찮다는 듯이 귀를 후비며 대꾸했다.
“아, 꺼지라고요. 사람이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먹는 건지 원.”
“이러고도 네가 무사할 수 있을 거 같으냐!”
“그럴 거 같은데?”
“웃기는 소리! 무려 백만 대군이다, 백만 대군! 지금 당장이라도 머리를 조아리고 사과해라. 그렇지 않으면 대군이 동부를 쓸어버릴 것이다!”
“해봐.”
“…?”
엘릭의 말에 와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엘릭도 더 이상 존대를 하지 않았다.
“해보라고. 뭘 놀라고 그래? 그럼 기다리고 있지. 그리고.”
엘릭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면서 차갑게 웃었다.
“네가 삼공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딴 것으로 날 협박하려면 다음부터는 모가지를 단단히 챙겨둬야 할 거야.”
“…!”
“내가 작정하고 너를 죽이려고 할 때, 황제 폐하께서 마지막까지 널 지켜주려고 하실까?”
와즐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덜덜덜….
엘릭이 순간적으로 내뿜은 살의에 섣불리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제야 떠올린 것이다.
엘릭이 황금사자와도 어깨를 견줄 만한 실력자이며, 그 위대한 ‘별의 마도사’의 유일한 후예라는 사실을.
그런 엘릭이 정말 작정하고 나선다면, 황실도 절대 보호해주지 못하리란 사실이 떠오른 것이다.
엘릭은 이제 귀찮으니 어서 내보내라는 듯이 손을 휘휘 저었다.
그제야 병사들은 와즐과 호위 기사들을 밖으로 내쫓을 수 있었다.
쾅!
굳게 닫힌 문 너머로 뒤늦게 와즐이 고래고래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엘릭은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
“….”
상황이 종료되고 고요가 찾아왔다.
정적을 깬 것은 헤르만이었다.
“이렇게 막 나가도 괜찮은 겁니까?”
와즐이 썩 마음에 든 것은 아니지만, 그의 말 중에 틀린 말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그의 말대로 황제의 사절은 황제를 대신해 온 존재들이었으니.
그들을 푸대접한다는 건 황제를 푸대접한다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는 대놓고 황실을 적으로 돌린다는 명분을 주는 셈이나 다름없을 텐데, 헤르만은 걱정이 될 수밖에 없던 것이다.
하지만 엘릭은 오히려 후련한 모습이었다.
“원래 겁먹은 짐승이나 저렇게 짖을 뿐이죠.”
“하지만….”
“그리고 무엇보다 저쪽에는 명분이 없습니다.”
사실상 먼저 시비를 건 쪽도 사절단 쪽이 아니던가?
“거기다 황제를 먼저 욕보인 건 저쪽입니다.”
황제를 대신해 왔다는 건 그의 행동과 말투 전부 황제를 대표한다는 뜻.
하지만 와즐의 태도나 언행은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이는 오히려 황제의 명성을 깎아 먹는 행동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쫓아내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요?”
헤르만은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반역이라는 해명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번엔 안드레였다.
“그것도 굳이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애당초 되도 않는 개소리니까. 만약에 그래도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면.”
엘릭이 콧방귀를 뀌며 답했다.
“그동안 황실이 뒤로 호박씨 깠던 사실들이 만천하에 드러날 텐데, 과연 미친 짓을 저지를까요? 저들은 그냥 제 반응을 보고 싶을 뿐인 겁니다.”
마족과의 결탁.
비밀스러운 인체 실험.
선조의 무덤 도굴 사건.
전부 감찰국이 옴팡 뒤집어 쓴 것들이긴 하지만.
엘릭이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면 황실 역시 곤혹스럽긴 마찬가지일 테지.
더군다나 여론은 언제나 황실이 아닌 메르빙거의 편이었다.
엘릭이 작정하고 나선다면 불리해지는 건 저쪽일 뿐이었다.
“그리고 아까 들어보니까 쫓겨나면서 마탑이나 신교 동맹한테 버려지니 어쩌니 하는데.”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현재 두 세력은 엘릭을 중심으로 뭉친 상태였으니까.
심지어 오히려 감찰국과 사자공가에 반발하여 그들을 적으로 삼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엘릭을 도와주면 도와줬지.
황실과 함께 엘릭을 죽이러 올 리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 확실하게 깨달았습니다.”
“…무엇을 말씀입니까?”
“설사 백만 대군이 와도 문제가 없다는 것을요.”
“…!”
대군(大軍)을 운영하는 것은 그만큼 엄청난 양의 군비 지출을 각오해야만 한다.
황실과의 전쟁이 부담스럽긴 하지만, 황실 역시 대군을 움직이는 것은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단 뜻이었다.
그게 아무런 부담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찔러볼 이유가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엘릭은 자신과 동부가 가진 저력을 믿었다.
황실을 상대로, 아니, 제국을 상대로 이기지는 못할지언정 지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이 지닌 마법 실력도 있었고.
“그래도 그 충격이 크지 않겠습니까?”
“자칫하면 이제껏 쌓아 올린 기반이….”
물론, 그래도 헤르만과 안드레는 짐짓 걱정하는 눈치였지만.
“그런데 걱정하시는 것 치고는 두 분의 기대가 큰 것 같습니다만?”
“….”
“….”
엘릭은 오히려 피식 웃으면서 되물었다.
헤르만과 안드레도 쓰게 웃었다.
정곡이 찔린 탓이었다.
나름 숨긴다고 숨긴 건데.
역시 엘릭은 그들의 머리 위에 있는 모양이었다.
두 사람이 싸움을 마다하는 성격도 아니고.
둘 모두 감찰국과 사자공가에 좋은 기억이 있는 것도 아니니 오히려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들만 좋은 판이었다.
“그리고.”
엘릭이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아마 곧 있으면 재밌는 일이 일어날 겁니다.”
“재밌는 일?”
헤르만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그리고 적들이 얼마나 오합지졸인지 또한 알 수 있을 거구요.”
오합지졸?
헤르만을 비롯한 가신들은 그게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쾅!
와즐이 쫓겨나기 무섭게 성문이 거칠게 닫혔다.
그는 어이없게 꾹 닫힌 성문을 올려다봤다.
“아니, 어찌 이리도 무례할 수가!”
생각할수록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다른 누구도 아닌 삼공이었다.
비록 명예직이라고는 하나, 순서로만 따지면 거의 황제 다음가는 권력자였다.
그렇기에 지금껏 그 누구도 자신을 이토록 막 대한 적은 없었는데…!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자식이 날 이딴 식으로 우롱해!”
황제가 널 지켜주겠냐고 운운하던 엘릭의 협박을 떠올리면 아직도 피가 머리끝까지 치솟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 소리를 지른다고 해서 닫힌 성문이 다시 열릴 리 만무한 일.
결국 그의 화는 그와 함께 멍청하게 내쫓기고 만 호위들에게 쏠렸다.
쿵, 쿵, 쿵!
호위들이 쓰고 있는 투구를 주먹으로 세게 내려치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희들! 대체 뭐 하는 놈들이야? 어? 그러고도 호위라 할 수 있는 것이냐? 폐하의 명을 받은 놈들이 맞냐는 말이다! 내가 이딴 취급을 받는데도 아무것도 못 하질 않나…! 이러고도 너희들이 황실을 지키는 기사들이라 할 수 있냔 말이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안 되겠다. 쓰고 있는 거 전부 다 벗어!”
호위들은 두 눈을 질끈 감으면서 투구를 풀기 시작했다.
“눈 꼭 감고 있어라. 한 놈이라도 뜬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테니까.”
호위들은 주름이 진하게 잡힐 정도로 힘껏 눈을 감았다.
와즐의 주먹이 날아가려는 그 순간.
“무슨 일이십니까 삼공.”
뒤쪽에서 들린 진중한 목소리에, 와즐의 손이 멈췄다.
바로 뒤엔 호위대장으로서 따라온 크롬헬 측의 기사, 벨린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