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25화
동부
가신들이 엘릭에게 충성을 맹세한 다음 날.
그들은 정신없는 얼굴을 한 채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봐, 올해 식량 수확량이 얼마나 되지?”
“비축분은 얼마나 있나? 만약 고립되면 얼마나 버틸 수 있겠어?”
“무기들은 얼마나 있지?”
“아니지, 지금 당장 전투에 투입될 수 있는 군인들은 얼마나 있는가?”
“당연히 마법사들도 포함이지! 뭘 그런 걸 묻고 있나!”
사자공가와 감찰국의 잔당이 움직일 수도 있겠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경각심을 갖게 한 것이었다.
언제 갑자기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으니까.
차곡차곡 준비해도 부족할 수 있는 게 보급이건만.
워낙 갑작스럽게 준비하려니 바쁠 수밖에 없었다.
엘릭은 그런 가신들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선 아무런 감정이나 생각도 읽을 수 없었다.
그때.
“엘릭 님!”
한 병사가 다급한 표정으로 뛰어왔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그 정도로 병사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있었다.
쿵!
그는 엘릭의 앞에 도착하기 무섭게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무슨 일이지?”
척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일에, 엘릭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화, 황실의 사절이 도착했습니다!”
“뭐?”
황실이라는 말에 엘릭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언젠가 올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황실에서 보낸 게 ‘사절’이라는 것.
운이 좋다면 충분히 대화로도 풀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만일 싸우고자 했다면 군대라도 보냈을 테니까.
하지만.
‘대화로 끝나는 건 운이 아주 좋을 때의 얘기지.’
엘릭은 사절과의 대화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을 거라는 걸 직감했다.
어떻게 생각해도 그들이 좋게 이야기를 풀어갈 이유가 없었다.
감찰국을 공격한 것도 엘릭이었으며, 최근 사자공가와 제대로 한 판 붙은 것도 엘릭이었으니까.
황실의 주요 기관 두 곳에 모두 피해를 입혔으니, 저쪽에선 아주 이를 갈고 있을 것이다.
특히 엘릭이 그동안 겪은 황실은 항상 고압적이면 고압적이었지, 절대 굽히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명색이 사절단인데 그냥 돌려보낼 수도 없겠지.’
결국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명성과 평판이었다.
백성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냐는 것.
여론을 등에 업는다면 황실도 섣불리 손을 대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만약 잘못될 경우에는 그것으로 황실이 꼬투리를 잡으려 할 수도 있었고.
엘릭은 일단 얘기나 들어보자는 생각으로 말했다.
“예를 갖춰서 안으로 모셔라. 그리고 밖으로 나가 있는 가신들도 전부 모이라 하도록.”
“알겠습니다!”
병사는 짧고 굵게 대답하고는 황급히 왔던 길을 돌아갔다.
* * *
공작성의 접견실.
일전에 보고를 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엘릭은 가장 안쪽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양옆엔 가신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는 무거운 분위기.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들어와라.”
엘릭이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문이 열리며 황실의 사절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으! 아무리 제국에 공작이 넷밖에 안 된다지만, 그래도 결국 제국의 신하이면서 어찌 이리도 무엄하게 황실의 사자를 오라 가라 하는 것인지. 직접 나와도 모자랄 판에!”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
얼굴에 살집이 가득한 노인이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배는 물론이고 팔뚝도 살이 가득한 게, 저 나이에 얼마나 호의호식했으면 살이 저렇게 쪘을까 싶었다.
순간, 엘릭을 제외한 가신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지만.
노인은 전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 투였다.
털썩!
게다가 누가 앉으라고 권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당연하다는 듯이 앞에 보이는 의자에 풀썩 앉았다.
끼기긱.
의자에서 괴상한 소리가 났다.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같이 위태로워 보였다.
그리고.
처처척-
노인의 뒤로 황실에서 온 호위들이 들어섰다.
그들은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 있었다.
눈만 보이는 투구 사이로, 엘릭과 가신들을 향해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
일종의 기선 제압인 듯했다.
누구에게도 먹히진 않았지만.
“….”
“….”
한순간 그들 사이로 냉랭한 기운이 흐르고.
“아, 반갑소. 끝에 계신 분이 찬성공작이시겠구만?”
노인이 비릿하게 웃으면서 엘릭을 바라봤다.
완전히 아랫사람을 대하는 듯한 투.
그의 행동에선 일말의 예의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가신들 중 누구도 불쾌한 티를 내지 않았다.
일단 황실에서 찾아온 이들인 데다가, 절대 경거망동하지 말라며 엘릭과 이사벨이 몇 번씩이나 신신당부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대는 누구신지?”
“아! 빨리도 물어보시는구만.”
노인이 어이없다는 듯이 한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말했다.
“와즐이라 하오, 삼공이란 작위를 가지고 있지.”
삼공(三公).
태위, 사도, 사공을 묶어서 이르는 말이다.
황제의 스승이나 가까운 친척들에게 부여되는 일종의 명예직이었다.
마땅한 권력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 자체만으로 황실의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
게다가 작위만 두고 봤을 때에는 공작보다도 한 줄 위에 놓인 것이기도 하기에 절대 만만하게 볼 수 없었다.
하지만.
픽-
절로 코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삼공이 공작보다 윗줄이라고 하지만.
‘와즐’이라는 이름은 여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별 볼일 없다는 뜻이겠지.
오히려 저런 작자를 사절단의 수장이랍시고 보낸 황실의 저의가 궁금할 지경이었다.
엘릭의 속을 긁어보기라도 할 심산인 걸까?
그래서 꼬투리를 잡을 수 있도록?
“….”
엘릭은 말없이 와즐을 바라봤다.
저들의 속내를 알기 힘들다면, 오히려 그 속내를 끄집어 낼 수 있도록 만들면 되는 것이다.
결국 짧은 침묵이 흐르고.
순간, 와즐의 인상이 확 구겨졌다.
친히 이쪽의 정체를 먼저 밝혔으면 반갑다느니 뭐니 하면서 무슨 인사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어쩌라고?’라는 투로 가만히 있으니.
확 짜증이 났던 것이다.
“그대의 소개는 하지 않을 생각인가?”
“이미 본인이 누군지 알고 있는 것 아니오? 그럼 굳이 밝힐 필요가 없다 싶어서 말하지 않은 것일 뿐인데.”
“무, 뭐?”
와즐의 얼굴에 황당함이 어렸다.
아무리 이름을 안다고 해도, 처음 보는 사이에 서로 간에 통성명을 나누는 것쯤은 기본 예의가 아닌가?
이건 누가 봐도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였다.
“망한 가문에서 자라났다고 하더니 교양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군! 애당초 이딴 야만족들이 사는 동부로 오는 게 아니었어! 감히 황실의 사절을 이따위로 대접해?”
탕!
그는 책상을 내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순간, 가신들의 눈이 차갑게 번들거렸다.
메르빙거의 명예를 의도적으로 깎아내릴 뿐만 아니라, 동부까지 싸잡아 하급으로 취급한다.
당연히 칼부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지만.
‘확실하군. 날 자극하기 위해서 보낸 거야.’
엘릭은 오히려 코웃음을 쳤다.
저들의 속내를 알았다면 더 이상 휘둘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럼 교양 넘치시는 분께서 가르침을 주시겠소? 이렇게 한적한 동부에서만 지내다 보니 수도 예법에는 너무 문외한인지라. 뭐, 우리 같은 시골 촌놈들이 듣고도 알 수 있겠나 싶지만 말이오. 그렇지 않나?”
엘릭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투로 너무나도 태연하게 행동했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교양 따윈 모르는 야만족이니 너희들이 알아서 참아야지 왜 굳이 예민하게 받아들이냐는 뜻이었다.
“이이…!”
와즐도 그 의미를 모를 리가 없었기 때문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건방진 놈 같으니라고!’
나이도 한참이나 어린 것이 말이야!
하지만 여기서 더 대화가 길어져 봤자 짜증 나는 건 자신 뿐이다.
무식한 것과는 대화를 더 이상 섞지 않겠다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소리쳤다.
“어이가 없군. 됐소. 피차 시간도 없으니 바로 본론부터 말하지.”
그리곤 돌아보지도 않고 무언가를 달라는 듯이 손을 가볍게 들었다.
호위 기사가 공손하게 들고 있던 두루마리 하나를 그 위에 살며시 내려주었다.
촤라라락!
그러기 무섭게.
와즐은 신경질적으로 두루마리를 펼치더니, 큰 목소리로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지금부터의 내용은 황실의 명이요, 곧 황제의 말이니. 찬성공작 엘릭 메르빙거는 무릎을 꿇고 마땅히 그 예를 표하라! 만일 그러지 않는다면!”
씨익-
와즐이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그 즉시 반역으로 간주해 죄인으로서 대할 수 있음을 알라!”
그 즉시 잠자코 있던 가신들이 발끈했다.
“뭐라?”
“아무리 황제라도 감히 찬성공작께 그럴 수는 없다!”
“황제의 사절이라고 지금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황실과 메르빙거 가문의 관계를 생각하면 선을 심하게 넘은 발언이었다.
이토록 강경하게 나오는 것 또한 꽤 이례적이었다.
엘릭의 가문은 황실에 큰 공을 세운 전적이 여러 번 있었으니까.
대마전쟁에서 희생되었던 우스던 메르빙거의 공적이 대표적인 예였다.
반역을 저질러도 한 번은 넘어가 준다는 ‘단서철권’을 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갑자기 과하게 ‘예’를 요구하질 않나.
단순히 그걸 어긴다는 이유로 죄인으로 간주한다니.
제국 역사 어디를 뒤져봐도 그런 행패는 존재한 적이 없었다.
채채챙!
“움직이지 마라.”
“네놈들 앞에 있는 건 삼공 님이시다.”
가신들이 위협적인 모습을 보이자, 호위들이 일제히 검을 빼 들었다.
“뭐 하자는 거지?”
“지금 우릴 죄인 취급하는 건가?”
후우웅!
하지만 그들은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각자 기운을 끌어올렸다.
당장이라도 싸움이 일어날 것만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
와즐은 즐겁다는 듯이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엘릭이 나선 것은 그때였다.
“진정하시죠.”
그 한마디에, 불처럼 타오르던 가신들이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들은 빠르게 기운을 갈무리한 채 자리에 착석했다.
기사들 또한 검을 집어넣었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곤 하나, 그들도 여기 있는 가신들을 상대하는 것이 적잖은 부담이었으니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방에 고요가 내려앉았다.
“아무래도 서로 예민한 상황이라 그런 모양입니다. 계속하시죠.”
엘릭이 무심하게 툭 뱉었다.
제대로 된 예를 보이지 않으면 반역으로 간주한다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
이미 반역자로 몰릴 거란 걸 엄두 해 뒀기에 나올 수 있는 행동이었다.
“….”
와즐은 뻔뻔한 그의 태도에 한 마디 쏘아주고 싶었으나 입술을 꾹 깨물고 화를 참았다.
언젠가 이 모욕을 갚아줄 기회가 반드시 있을 테니까.
“그럼 계속 읽겠소.”
구구절절 하는 말은 많았지만, 내용은 간단했다.
현재 황도에서 메르빙거와 관련된 괴이한 소문이 퍼지고 있으니, 직접 청문회에 와서 해명하라는 것이었다.
역모 혐의에 대한 해명 요청이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