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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384화 (383/405)

2부 124화

동부

며칠 동안.

엘릭은 다른 건 신경 쓰지 않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동안 그러지 못한 것을 어떻게든 메우기 위해서였다.

문제는 리아가 엘릭이 낯설어 울음을 자주 터뜨린다는 것?

‘처음 봤을 땐 잘 있었으면서.’

하지만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싹 잊은 듯.

엘릭의 품에 안기기만 해도 싫다고 그렇게 아우성을 쳐댔다.

어서 엄마한테 보내달라는 듯이.

엘릭으로서는 처음 해보는 육아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시녀들이나, 그나마 육아에 익숙해진 이사벨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정말이지 아무것도 못 했을 것 같았으니까.

그나마 다행이라면, 필사적인 노력 끝에 리아가 엘릭을 조금씩 덜 두려워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자신의 아빠라는 것을 마침내 인지했는지.

리아는 더 이상 엘릭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리고 또 며칠이 흘렀다.

“으어어어…. 차라리 대마왕들을 잡는 게 훨씬 쉬울 것 같은데요.”

홀로 있는 집무실.

엘릭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 허공을 멍하니 응시했다.

『흥. 본왕이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 누구의 자식인데 결코 쉽지 않을 거라고.』

“뭐래요. 원래 육아는 힘든 거거든요? 연애도 못 해봤을 것 같은 양반이 뭘 안다고.”

『뭐, 뭐라…!』

메피스토는 발끈하며 입을 열었지만.

그 뒤로 들려오는 말은 없었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기 때문이었다.

“들어오세요.”

엘릭이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리며 많은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헤르만과 이사벨을 비롯해 안드레, 네임리스 등의 가신들이 전부 찾아온 것이다.

애당초 공작성을 세운 건 동부에 메르빙거의 기반을 세우기 위함이었으니.

엘릭이 부재중인 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보고를 하려는 것이다.

‘마지막에 따로 보고할 게 있다던데. 뭐지?’

먼저 말해달라고 해도 말해주지 않으니 답답할 노릇.

“앉으시죠.”

“감사합니다.”

엘릭의 말에 가신들이 각자 자리에 앉았다.

헤르만이나 이사벨의 경우에는 엘릭과 가족이지만, 지금만큼은 깍듯하게 대하고 있었다.

공적으로는 주군과 신하의 관계였으니까.

“바로 시작하시죠.”

“알겠습니다.”

엘릭의 오른편에 앉은 헤르만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가지고 온 서류를 탁상에다 활짝 펼쳤다.

“일단 동부의 산악 민족과는 평화 협정 이후로,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이쪽으로 인구 이동을 유도하고 있었습니다.”

산악 민족.

제국에서는 야만족이라 불리던 이들.

한때, 적사자였던 안드레와 함께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을 정도로 그들의 전투력은 이미 정평이 난 상태였다.

엘릭에게는 놓칠 수 없는 인재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사는 곳은 제국의 영역과는 다소 거리가 있기 때문에 최근에 동부 지역으로의 이주를 추진한 것이다.

제대로 된 기반을 위해선 인구수가 아주 중요했으니까.

‘이들의 전투력이라면 비상시에 군단으로 통합될 수도 있고.’

물론, 수렵 민족을 정착시킨다는 게 결코 쉬운 건 아니었다.

“현재 바투의 보르푸르 족은 전부 넘어온 상태이고, 다른 민족들의 이동도 빨라지고 있는 추세입니다. 아직 거부하는 곳들이 있긴 합니다만… 협상이 거의 마무리 되어 가고 있는 중입니다.”

엘릭의 시선이 왼쪽으로 향했다.

의자가 부서질 것만 같은 거구.

바투가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별다른 갈등 없이 이번 계획을 추진하는데 바투의 도움이 가장 컸습니다.”

“수고했어.”

바투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민족의 생존과 부흥만을 바라는 그로서는 아주 당연한 일일 뿐이었다.

보고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리고 저와 안드레가 함께 병사들을 훈련 시켜 기사단의 규모를 계속해서 늘리는 중입니다.”

엘릭은 성을 돌아다니며 종종 마주했던 기사들을 떠올렸다.

확실히 사자공가에서 각각 청사자와 적사자의 자리를 맡았던 이들이다 보니, 기사와 병사 육성이 아주 잘 되고 있는 듯했다.

얼핏 보기에도 그들의 기세가 심상치 않을 정도였으니까.

병사들은 당장 전쟁에 투입돼도 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고.

기사들은 일당백의 기백을 품고 있었다.

성취 또한 높아서, 당장 사자공가의 검사들과 맞붙어도 크게 밀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주군께서 주셨던 메르빙거의 보물을 바탕으로 대륙 각지에서 실력 있는 마법사들을 모으는 중입니다.”

엘릭의 눈이 반짝였다.

‘과거로 돌아간 것 같네.’

몰락하기 이전의 메르빙거는 수많은 마법사나 집단들과 주기적으로 교류를 가져왔다.

그 영향력은 마탑과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았던 바.

그런 와중에 메르빙거가 가진 마법 지식과 유산을 공개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다시 사람들이 모여든 것이다.

어렸을 때 다짐했던 가문의 부활이 조금씩 현실화 되고 있었다.

오랫동안 힘든 시기를 견뎌온 만큼 감회가 남달랐다.

이래저래 많이 혼란스러웠을 텐데.

“그동안 많이들 정신없었을 텐데,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하하. 사실 이 모든 게 가능했던 건 이사벨의 공이 큽니다.”

“이사벨이?”

엘릭이 놀란 눈으로 헤르만 곁에 앉은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가 내정을 안정적으로 잘 다스려줬기 때문에 저나 바투가 외부에 신경을 쓸 수 있었으니까요.”

주변 모두가 동의하는 눈치인 것이, 단지 주모(主母)라서 치켜세워주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애 때문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이만큼 내정을 관리했다고…?’

엘릭은 순수하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내정을 관리한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물며 성의 주인인 엘릭조차 없는 상황.

있어도 힘들었을 판인데, 이렇게 해내는 것이 대단하다 싶었던 것이다.

역시 행정적인 분야에 있어서 그녀의 수완을 따라올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힘들었을 텐데, 수고했어.”

겉으로 티는 크게 내지 않았지만, 엘릭의 눈빛은 따스했다.

“감사합니다.”

이사벨은 이를 느꼈는지, 입가에 뿌듯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이외에도 성 주변이 어떻게 증축될 것인지.

앞으로 어떻게 산악 민족을 영지로 데려오고, 무엇이 부족한지에 대한 얘기가 오갔다.

그럴수록.

엘릭은 영지가 어느덧 기반이 잘 잡혀가고 있다는 사실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대로만 간다면, 과거의 영광을 금방 되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상으로 보고를 마치겠습니다.”

“수고했네.”

엘릭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그가 말끝을 흐리자, 모든 이의 이목이 집중됐다.

“여러분의 주군이 아닌 엘릭 메르빙거로서 할 얘기가 있습니다.”

들을 건 전부 들었으니, 중요한 이야기를 할 차례.

“…!”

“…!”

이어진 말에 그들이 자못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엘릭이 갑자기 존대를 한 것도 있지만.

다른 어느 때보다 그의 표정이 진지해 보인 탓이었다.

엘릭은 잠시 뜸을 들이다 이내 입을 열었다.

“머지않아 전쟁이 있을 겁니다.”

몇몇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전쟁.

그것이 주는 무게는 무거울 수밖에 없었으니.

하지만 엘릭의 근황을 알고 있다면 이미 짐작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기도 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얼굴들.

“앞으로 사자공가와의 전면전이 있을 겁니다.”

* * *

“….”

“….”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엘릭과 사자공가의 대립은 이미 제국 안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으니.

하물며 메르빙거의 가신들은 오랫동안 그들을 주시해왔다.

팔사자 중 셋이나 이곳에 가담한 이상, 언젠가 그들과 부딪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도 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전면전은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예. 이제야 겨우 가문이 일어서려 하고 있는데 막대한 전비 지출은….”

“자칫 개발이 진행 중인 동부가 폭삭 무너질 수 있는 노릇입니다.”

아무리 메르빙거 가문의 위세가 많이 회복됐다 해도, 아직 사자공가에 견줄 수준은 아니었으니.

“심지어 사자공가는 최근에 황실과도 밀접한 관계라고 알고 있습니다. 자칫 제국군과도 부딪쳐야 할 텐데….”

“감찰국의 잔당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겠군요.”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게 분명합니다.”

가신들은 어느새 잔뜩 흥분한 채로 이런저런 논의를 나눴다.

그러다 한 사람의 말에 방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근데 그렇다는 건 자칫 저희가 반역으로…!”

“….”

“….”

가신은 뒤늦게 자신의 실책을 인지하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제국에서 ‘반역’이라는 단어는 절대 꺼내서는 안 될 금기에 가까웠으니까.

하지만 엘릭은 예상했다는 듯이 태연한 표정이었다.

“여러분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들을 상대하는 이상 반역자로 몰릴 가능성이 크겠죠. 아니, 어쩌면 저와 한 배에 탔다는 이유로 이미 예비 반역자로 찍혔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주군이 아닌, 엘릭으로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예?”

“그게 무슨….”

“떠날 사람은 떠나도 좋습니다. 그 과정에서 눈치를 주거나 만류하지는 않을 겁니다.”

“…!”

“…!”

가신들의 눈이 커졌다.

가뜩이나 불리한 상황에서 저렇게 말을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테니.

“저는 여러분을 강제로 반역자로 만들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그러니 떠나시겠다면 그간의 공로 또한 인정해 그만큼의 보상도 해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엘릭은 침묵에 빠진 가신들을 쓱 훑어보았다.

“장담컨대 우려하는 일까지 비화 되지는 않게 할 겁니다. 황실을 뒤엎을 생각 따윈 없으니까요. 또한, 사자공가와의 전쟁에서 지지 않을 거구요.”

만일 저를 믿어주신다면 그 선택을 평생 후회하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엘릭은 그렇게 뒷말을 덧붙였다.

“….”

“….”

“….”

무거운 침묵이 찾아왔다.

누구 하나 쉽게 움직이거나 입을 열지 못했다.

그저 서로 어떻게 하냐는 듯이 눈치를 볼뿐.

몇몇 가신들은 아예 눈을 감고 고민에 잠긴 모습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엘릭은 그 어떠한 재촉도 하지 않았다.

단지 가만히 그들의 대답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집무실엔 누군가 숨 쉬는 소리만이 들릴 정도로 고요해진 그 순간.

벌떡!

헤르만이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 때보다 비장한 표정이었다.

그는 검을 뽑더니 그대로 엘릭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쿵!

“헤르만 바일, 목숨을 걸고 주군과 함께 싸우기를 맹세합니다. 처음 주군을 뵈었을 때부터 저의 대답은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쿠웅!

이번엔 바투였다.

육중한 울림이 방을 흔들었다.

“이미 당신과 함께 하기로 결심했던 바. 민족과 부족의 부흥을 위해서라도 당신은 언제나 승리를 해야 합니다. 보르푸르 족 바투. 주군의 왼팔로서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이어서 이사벨, 안드레, 네임리스 등등.

모든 가신이 차례대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하나의 목소리로 외쳤다.

“살아도 찬성공작 님의 곁에서 살 것이며.”

“죽어도 찬성공작 님의 곁에서 죽을 것입니다!”

“동부는 이미 저희의 고향입니다.”

“고향을 떠나 저희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주군의 곁에 같이 설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해주십시오.”

분위기가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엘릭은 가주로서, 그리고 주군으로서 진중한 표정으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메피스토의 목소리가 슬쩍 옆에서 들려왔다.

『너 솔직히 말해라. 가신들 여럿 떠날까 봐 쫄렸지?』

[아뇨.]

『하, 거짓말 말아라. 네 녀석 눈만 봐도….』

[겁나게 쫄렸습니다만?]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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