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23화
동부
헤르만은 지금도 이사벨을 생각해서 많이 참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무리 가문을 위해서라지만 임신한 아내를 두고 떠난 것도 모자라, 아이가 태어나고 한참이 돼서야 성으로 돌아왔으니.
아버지로서 화가 나지 않을 리가.
‘…오히려 화를 안 내는 게 이상하지.’
엘릭이 그렇게 자책할 때였다.
헤르만의 손에 힘이 풀렸다.
“뭐, 됐다. 네가 무슨 일을 저지르고 왔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고.”
“예?”
“이미 네레스타 남매에게 연락을 받아 다 알고 있다. 무사히 돌아와 주어 고맙구나.”
무슨 일이 생겼으면 딸아이가 더욱 슬퍼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헤르만이 뒷말을 덧붙이며 엘릭의 어깨를 두드렸다.
덕분에 엘릭은 그나마 긴장이 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자 그제야 주변의 풍경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익숙하거나 처음 보는 얼굴이 교차했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굴려 봐도 가장 보고 싶은 사람만큼은 자리에 없었다.
“이사벨은 어디 있습니까?”
“어디 있을 거 같나?”
헤르만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어서 올라가 보지 그래?”
“감사합니다.”
엘릭은 서둘러 인사를 하곤, 자신과 이사벨의 방으로 향했다.
* * *
“후우…!”
방문 앞.
엘릭은 문을 두드리기 전에 길게 숨을 골랐다.
아내를 보고 싶다는 마음을 갖고 한걸음에 달려왔지만.
죄책감 때문일까, 쉽사리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사과부터 해야 하나?
아니야, 일단 말없이 안아줘야 하나?
어떻게 해야 이사벨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풀릴까?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이 엘릭을 더욱 망설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러기를 잠시.
짜악!
엘릭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양손으로 제 뺨을 세게 치면서 결심에 찬 얼굴이 되었다.
“…모르겠다. 혼내면 그냥 혼나야지.”
전부 자신의 업보라 생각하고 혼나면 될 일이었다.
똑똑!
“이사벨, 안에 있지? 들어간다?”
엘릭은 가벼운 노크 뒤에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
한쪽 구석. 벽을 보고 앉아있는 이사벨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앞에 놓인 책상엔 엘릭과 함께 찍은 사진이 세워져 있고.
주변엔 온통 그와 관련된 신문 기사들이 즐비하게 쌓인 상태였다.
이사벨이 그것들만 보며 자신을 기다렸을 거라고 생각하니, 더욱더 가슴이 아려왔다.
이사벨의 뒷모습에서 그녀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느껴졌으니까.
“이사….”
“드디어 오셨네요.”
차가운 음성이 엘릭의 가슴을 후벼 팠다.
특히 ‘드디어’라는 단어가 유독 날카로웠다.
“그, 그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의자 바로 옆으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미안해 이사벨. 내가 많이….”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
엘릭의 눈이 커졌다.
혼날 것만 생각했지, 설마 걱정 어린 말을 들을 줄은 몰랐으니까.
“어느 순간부터 연락이 끊겨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혼자서 얼마나 심심했는데.”
이사벨은 그렇게 말하면서 엘릭을 째려봤다.
두 번 다시는 이토록 오래 두지 말라는 의미였다.
“걱정하지 마, 다시는 안 그럴게.”
엘릭은 양팔을 뻗어 그녀를 안았다.
“보고 싶었어.”
“저도요.”
따스한 체온.
따뜻한 말투.
엘릭은 이제야 집으로 돌아왔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을 수 있었다.
-가족이 있어야 가문이 존재하는 법이야, 알았어?
누나 헤이즈의 말도 다시 떠올랐고.
“그보다 저희 아이는 안 궁금하세요?”
그러다 이사벨이 오랜 포옹 뒤에 그렇게 물었다.
궁금하지 않을 리가.
이사벨만큼이나 보고 싶었던 게 바로 자신의 아이였는데.
그녀는 몸을 가볍게 틀면서 베이비 베드에 곤히 누워있는 아이를 보여주었다.
‘작아….’
엘릭은 보자기를 살짝 열어보고, 너무나 작은 생명체에 온 시선이 빼앗기고 말았다.
“안아보셔야죠?”
이사벨은 조심스레 아이를 엘릭에게 건네주었다.
순간 덜컥 겁이 났다.
이렇게 자그마한 아이를 안아도 될까?
하지만 어느새 보자기는 그의 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엘릭은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 조심스럽게 아이를 넘겨받았다.
“….”
파르르-
그의 눈이 가볍게 떨렸다.
딸은 도톰한 보자기에 감싸진 채 얼굴만 밖으로 내놓고 있었다.
선명한 녹안에, 살짝살짝 자라난 머리카락은 뚜렷한 금발을 하고 있었다.
대륙 어디에서 잃어버려도 찾을 수 있을 정도.
누가 봐도 메르빙거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실감이 나지 않았다.
가문을 일으키겠다고 다짐했던 게 어제 같은데, 벌써 한 아이의 아빠가 되다니.
“신기하죠?”
“…응.”
엘릭이 아이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대답하는 목소리는 어쩐지 목이 메어 있었다.
그러고 있으니 묘한 감정도 일어나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고생하며 쌓인 피로가 싹 가시는 기분.
춘계의 인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아이를 보고 있는 것만 못한 것 같았다.
『우웨엑!』
바로 옆에서 괴상한 소리만 들리지 않았다면.
분명히 계속 그랬을 것이다.
짜증 섞인 시선을 살짝 돌린 곳.
메피스토가 양손으로 제 목을 움켜쥔 채 헛구역질을 해대고 있었다.
[…더럽게 뭐 하는 겁니까? 애가 앞에 있는데 못 하는 짓이 없어.]
메피스토는 엘릭의 말을 듣고는 날카롭게 그를 쏘아봤다.
『그럼 본왕이 괜찮게 생겼느냐? 네놈과 꼭 닮은 메르빙거가 눈앞에 있는데!』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럼 오히려 더 귀엽지.]
『뭐? 귀여워?』
[그럼요. 그럼 아닙니까?]
메피스토는 코웃음을 쳤다.
『하! 네 놈의 피를 이어받았는데 퍽이나 그렇겠구나!』
[뭐요?]
『조금만 기다려봐라. 본왕에게 했던 인성질 그대로, 네놈도 그 아이에게 돌려받게 될 테니까.』
[인성질은 무슨. 저만큼 모두에게 두루두루 평화롭고 자상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뻔뻔한 지고.』
[그리고 그게 어디 한 살밖에 안 된 아이한테 할 말입니까? 삼촌이란 사람이 말이야.]
『…뭐?』
순간, 메피스토가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얼어붙었다.
[삼촌이 그래도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아악! 아아아악! 그 말! 그 말 당장 취소하지 못할까아!』
메피스토는 어찌나 당황했는지 꼭 빠지지 않던 ‘본왕’이란 표현을 쓰는 것도 깜빡한 모양이었다.
엘릭이 히죽 웃었다.
[삼촌이죠, 그럼. 같은 메르빙거잖아요? 우리 애기, 처음 뵙는 삼촌한테도 인사할까? 삼쫀 안녀어엉!]
엘릭은 뭘 놀라냐는 듯이 아이와도 같은 말투로 아이의 팔을 잡고 인사하듯 흔들었다.
『너, 너, 너…! 이, 이…!』
메피스토는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뒷목을 붙잡았다. 혈압이 끓는 모양이었다.
엘릭이 고소하다고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까득!
‘…까득?’
불길한 소리와 함께 검지가 갑자기 화끈거렸다.
고개를 내린 곳.
딸아이가 엘릭의 검지를 붙잡고 뒤로 꺾고 있었다.
“꺄아, 꺄아아!”
재미있다는 듯이 방실거리는 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귀여웠지만.
“자, 잠시만! 무슨 애 힘이…!”
귀여운 건 귀여운 거고, 아픈 건 아픈 거였다.
차마 애가 다칠까 힘을 쓸 수도 없고, 엘릭은 안절부절하지 못한 채로 도와달라며 이사벨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사벨은 짓궂게 웃기만 할 뿐.
“아, 애가 아빠를 닮아서 그런가, 힘이 좀 세더라고요.”
이사벨이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참으로 좋은 일이었다.
뭐든 재능만 타고나면 좋은 것 아니겠나?
“하, 하하…. 장인어른의 피도 확실히 물려받았네. 그, 그런데 이, 이거 좀 놓으라고 해줄 수 없을… 까?”
아무리 아이를 달래봐도 도저히 놓을 생각을 하지 않으니.
이제는 아주 재미있다는 듯이 마구잡이로 검지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꺄르륵! 꺄르륵!
그래서 어떻게든 이사벨이 도와주었으면 했지만.
“후후… 글쎄요?”
이사벨은 아리송하게 턱을 괴며 웃기만 할 뿐이었다.
알아서 하라는 뜻.
은근한 복수가 담겨있는 게 분명했다.
“….”
결국 엘릭은 속으로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
그래, 내가 죄인이지 죄인이야.
『쿠헬헬헬! 본왕이 말하지 않았느냐? 업보를 받을 거라고! 쌤통이구나!』
메피스토가 통쾌하다는 듯이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 * *
쌔액, 쌔액.
아이는 언제 엘릭의 검지를 갖고 놀았냐는 듯이 깊이 잠든 상태였다.
이사벨의 품에 푹 안긴 채로.
저렇게 잠든 모습을 보면 정말이지 천사가 따로 없는데 말이지….
그런데 대체 저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그만한 힘이 나오는 걸까?
이런저런 묘한 기분이 들 무렵이었다.
“아이 이름은? 지었어?”
그는 가만히 아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같이 지으려고 아직 못 지었죠. 누가 늦게 오는 바람에 태명으로만 불러서 얼마나 속상했는데.”
“….”
이사벨은 장난스러운 투로 말했지만, 그럼에도 엘릭은 가슴에 비수가 꽂히는 것만 같았다.
그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미안해, 그래도 생각해둔 이름은 있지 않아?”
“왜 없겠어요?”
이사벨은 기다렸다는 듯이 여러 이름을 술술 말하기 시작했다.
“곧은 나무처럼 자라라고 올리비아도 생각해봤고, 저희처럼 가문에 얽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살라고 샬롯도 있고….”
그 외에도 다양한 이름이 나왔다.
카밀라, 스칼렛, 노바, 스텔라 등등.
행복한 표정으로 이름을 나열하는 이사벨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엘릭은 검지로 볼을 긁적일 수밖에 없었다.
“아! 그리고 리아라는 이름도 생각해봤어요.”
“그것도 좋네.”
“어떤 거요?”
“리아. 리아 메르빙거.”
엘릭이 이름을 말하자, 이사벨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그쵸? 그 이름이 가장 좋죠?”
아무래도 그녀 또한 리아라는 이름을 가장 마음에 들어 했던 모양이다.
리아, 리아.
이사벨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고 있는 딸을 바라봤다.
그 모습을 보면서.
엘릭은 자신의 부모님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물어볼 수나 있으면 좋으련만.’
그는 씁쓸한 마음을 삼키면서 이사벨과 못 다한 대화를 나눴다.
끼아아아-
그런 엘릭의 마음을 달래듯이 세 마리의 새끼 용들이 머리 위를 빙글빙글 맴돌아 다녔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