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22화
동부
공작성이라면 현재 청사자인 헤르만과 부인인 이사벨이 지내고 있는 장소가 아니던가?
그렇지 않아도 최대한 빨리 들를 생각이긴 했다.
그것 때문에 헤이즈한테 혼나기도 했었고.
하지만 따로 말하지도 않았는데 그곳을 간다고 하니, 엘릭으로서는 의문이 들 따름이었다.
션은 엘릭의 표정에서 그 생각을 읽곤 말했다.
“그동안 네가 너무 강행군을 한 것 같기도 하고.”
하암.
션이 하품을 하곤 계속해서 말했다.
“잠깐 휴식도 할 겸 가는 거지. 너 아직 네 애 얼굴도 못 봤잖아.”
“….”
엘릭은 션의 말에 볼을 긁적였다.
그동안 가문의 일에만 너무 신경 쓰느라 부모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그래. 고맙다.”
“뭘, 더 물어볼 거 없으면 그럼 난 다시 잔다. 너도 좀 더 자. 아직 도착하려면 멀었으니까.”
션은 말을 마치곤 다시 의자에 기대 잠을 청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작게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이제 얘기 좀 해보실까?』
곧바로 메피스토가 말을 걸어왔다.
그는 지금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어차피 션의 말대로 갈 길이 한참 남았겠다.
엘릭은 안배에서 겪은 이야기를 전부 메피스토에게 말해주었다.
어떤 안배였고, 그곳에서 무엇을 새로 알게 됐는지까지.
『…결국엔 전부 알게 됐군. 거기다 아예 본왕의 인장을 마음대로 만들어 사용하기나 하고 말이야.』
“뭐 그런 셈이죠.”
『그렇다고 본왕의 힘을 남발할 생각은 하지 마라.』
“당연히 지금 당장 그럴 생각은 없거든요.”
안배에 있을 때와 지금은 상황이 너무나도 달랐다.
그땐 마족, 그것도 마신의 몸이었기에 원죄의 인장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실로 돌아온 지금은 달랐다.
자칫 잘못하다간 오히려 몸을 상하게 하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과거, 하르간의 보법과 신법을 익혔을 때와 같았다.
『잘 알고 있으니 다행이군.』
메피스토는 그렇게 말하며 굳은 표정을 지었다.
여전히 엘릭이 원죄의 인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불편한 모습.
엘릭은 그 모습을 보더니 씨익 웃으며 말했다.
[에이. 같은 가문 사람끼리 뭘 그럽니까? 가족끼린 콩 한 쪽도 나눠 먹는다던데. 인장이 대숩니까?]
『이, 이 빌어먹을 자식이 지금 뭐라고 했느냐? 같은 가문? 가아아트으은 가아아아무우우운?』
메피스토가 다시 한번 말해 보라는 듯이 눈을 뜨며 물었다.
그런 그의 눈에는 경멸과 혐오가 한가득 담겨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가문의 ‘사람’은 아니었다.
그와 연결된 무언가일 뿐이지.
그렇게 따지면 모든 마족들이 메르빙거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겠나.
하지만 엘릭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메피스토의 신경을 살살 긁을 수 있는데 이 정도쯤이야.
[에이. 하나의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건데 그럼 그렇게 말할 수 있죠. 안 그래요?]
『다르다! 다르다고!』
메피스토가 격분하며 대꾸했다.
『애당초 추구하는 바가 다를뿐더러, 네놈의 시조와 마신은 다른 존재일진대.』
[아, 눼이눼이. 그러시겠죠. 메피스토 메르빙거 님.]
『이놈이 그래도!』
[저 이제부터 잘 거니까 조용히 좀 해주시겠습니까?]
『어딜 감히 그딴 망발을 내뱉고 혼자서 속 편하게 드러누우려고 해! 이럴까 봐 본왕이 네놈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
으하아아암!
『내 말 들으라고!』
메피스토는 답답한 마음에 주먹으로 가슴팍을 두들겼지만.
“으히히.”
엘릭은 아예 등을 돌리고 눈을 감아버렸다.
기분 좋게 웃으면서.
『돌아버리겠네, 진짜!』
* * *
마차가 언덕 하나를 넘는 순간.
그곳에 가려 보이지 않던 공작성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오….”
엘릭은 성을 보자마자 작게 감탄을 터뜨렸다.
오래전에 봤던 모습과는 성의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옛날에는 좀 칙칙했었는데.’
사실 그때는 적사자인 안드레가 관리하던 변경 관리구역이었으니까.
하지만 당시에는 군사 기지에 가까워 삭막한 분위기가 흘렀다면.
헤르만이 관리하고 나서부터는 확실히 다소 밝아진 모습이었다.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고 할까?
거기다 오거스틴과의 전투로 인해 부서졌던 모든 곳이 깔끔하게 보수되어 있었다.
확실히 상인 출신답게 운영하는 능력만큼은 뛰어난 모양이었다.
다만,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왜 이렇게 조용하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어 보였지만.
문제는 도착하기 며칠 전에 미리 연락을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마중을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엘릭이 슬쩍 성벽 위를 올려봤다.
“….”
그곳을 훑은 엘릭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평소라면 감시병들이 사방으로 세워져 있어야 할 텐데.
있어야 할 병사들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엘릭은 순간 불안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조용한 거야 그럴 수 있다 쳐도, 병사들이 없다는 게 말이 되는가?
하물며 굳게 닫혀 있어야 할 성문마저 활짝 열려 있는 상태였다.
꼭 성을 버리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 버린 것만 같은 모습.
“엘릭, 왜 그래?”
“무슨 일 있으신 건가요?”
그 사이, 션과 타샤가 차례대로 일어나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하지만 곧 성의 상태를 알아차리고 엘릭과 같은 표정이 되었다.
“확실히… 이상하긴 하네요.”
“습격이라도 당한 걸까?”
“그건 또 아닌 것 같은데. 전투를 벌인 흔적이 전혀 없어.”
엘릭은 션의 추측에 고개를 저었다.
사실 공작성에 누군가가 침입한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청사자 헤르만이 대리 성주로 있는 데다가, 의제인 푸른 매, 거기다 적사자 안드레 그리고 네임리스까지 함께 있지 않은가.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강자들이 수두룩한 곳을 공격할 리가.
‘거기다 내 성이기도 했고.’
공작성을 공격한다는 건, 곧 메르빙거와 전쟁을 하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으니.
황실이나 사자공가가 아니고서야 불가능에 가까운 일.
하지만 양쪽 모두 최근에는 엘릭과의 일 때문에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여기까지 와서 전쟁을 치를 수 있을 리가 있나.
“그럼 대체 뭐지?”
“일단 가보면 알겠지.”
엘릭은 굳은 얼굴로 마부에게 말했다.
“조금만 더 빠르게 가주세요.”
“알겠습니다.”
엘릭의 말에 마부가 채찍을 휘둘러 속도를 높였다.
덜그럭, 덜그럭!
마차가 빠르게 달려 어느새 성곽을 통과했다.
그때부터 마차의 속도가 줄었다.
“….”
안으로 들어오자, 엘릭의 표정이 더욱 안 좋아졌다.
내부의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했기 때문이다.
분위기는 을씨년스럽고, 인기척은 더더욱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조금은 남아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워낙 미미한 탓에 확신할 수가 없었다.
꼭 유령과 함께 있는 기분이었다.
‘정말로 무슨 일이 있어 단체로 이주라도 한 건가?’
하지만 정말 그랬다면 먼저 연락이 왔을 터인데.
엘릭은 그렇게 생각하며 마차에서 내렸다.
직접 돌아다니며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그때였다.
퍼어엉! 펑펑!
갑자기 옆에서 거대한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뭐, 뭐야?”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엘릭은 화들짝 놀라며 반사적으로 마력을 발동시켰다.
하지만 그런 엘릭의 반응에 무색하게 그 사이에도 폭죽은 쉴 새 없이 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펑펑펑!
퍼버버버벙!
동시에 성 안의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꽃가루가 사방에 휘날리고, 빛과 관련된 마법 용품들이 허공을 떠다니며 하늘이 형형색색으로 빛났다.
밝은 노랫소리가 들렸다.
어마어마한 인파가 엘릭의 주변을 둘러쌌다.
모두 성의 사람들이었다.
그중에는 헤르만이나 안드레와 같은 가솔들도 함께였다.
“가주님의 무사 귀환을 축하드립니다!”
“어서 오십시오, 공작 각하!”
퍼버벙!
다시금 터지는 폭죽을 보면서.
“이, 이게 대체….”
머리 위에 꽃가루가 수북하게 쌓이는 와중에도.
엘릭은 여전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어안이 벙벙했다.
* * *
어느 정도 분위기가 진정됐을 무렵.
“뭐긴 뭐야, 너 하나 놀라게 해주려고 다 같이 준비한 거지.”
션이 마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는 물론이고, 뒤따라 내리는 타샤 또한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뭐야? 너 알고 있었어?”
“그럼. 우린 이미 연락받았거든.”
“….”
“표정을 보니 충분히 성공한 것 같네. 안 그래도 너한테 먼저 들킬까 봐 따로 기척 지우는 마법까지 네레스타에서 배워 갔었다더라고. 으흐흐.”
엘릭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깜찍한 일을 저지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
정말이지….
“너무한 거 아니냐? 진짜 무슨 일 생긴 줄 알고 걱정했잖아.”
누가 들어도 따지는 듯한 투.
하지만 입가엔 호선이 그려져 있었다.
“그래도 좋은가 보군.”
헤르만이 다가온 것은 그때였다.
그는 엘릭이 반가운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장인어른!”
엘릭도 밝은 표정으로 그가 건네는 손을 마주 잡았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
“그럼 잘 지냈고말고. 아주 자아아알 지냈지. 우리 사위가 너무 뛰어나서 말이야.”
말을 끊으며 대답하는 헤르만의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이 가득했다.
…그런데 어째 가시가 가득한 것 같았다.
엘릭은 이를 눈치 채고 눈동자를 조용히 데구르르 돌렸다.
꽈아아악!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악수에도 점점 힘이 들어가는 것 같고.
엘릭이 슬쩍 손을 빼보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장인… 어른…?”
“자네 말대로 이게 대체 얼.마.만인.지 모.르.겠.군.”
“….”
여전히 웃고 있는 모습.
“대체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느라 이사벨의 눈에 눈물이 나게 한 거지? 분명 그보다 더 가치가 있기에 그런 것이겠지. 아니 그런가?”
하하, 하하하….
엘릭은 아무 말 없이 멋쩍은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무슨 말을 해도 자신의 잘못이 용서될 것 같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이사벨이 눈물을 흘렸단다.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엘릭은 재빨리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지금은 어떻게든 굽히는 것만이 살 길이었다.
『자고로 무신경은 메르빙거의 특징이거늘. 안타까운 광경이로고. 으흐흐흐.』
메피스토의 웃음소리가 신경에 거슬렸지만, 무시해야지….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