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21화
동부
메피스토는 단번에 엘릭의 변화를 눈치챘는지, 그의 눈빛엔 불쾌한 감정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
그를 보고 있자니, 엘릭은 묘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껏 함께했던 메피스토의 ‘진짜’ 정체를 알 수 있었으니까.
따지자면.
메피스토 역시 메르빙거의 한 축이라 할 수 있지 않은가?
물론 그렇게 말했다간 절대 다르다면서 길길이 날뛰겠지만.
‘…마신의 일부. 마신의 파편이라.’
메피스토가 어째서 네 명의 대마왕 중에서도 유독 그렇게 강한지.
혼자서도 다른 대마왕들의 세력을 충분히 감당하고도 남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말해 보거라. 대체 안배에서 무슨 일을 겪은 것이냐.』
당장이라도 사건의 전말을 듣고 싶은 모습.
엘릭도 이래저래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지만.
[나중에요.]
지금 당장 급하게 처리해야 할 문제가 하나 있었다.
엘릭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머리가 정신없이 헝클어진 황금사자가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미르카가 별일 없을 거라는 듯이 말은 했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일격이 그에게 제법 피해를 준 모양이었다.
두 눈 아래엔 짙은 다크 서클이 내려와 있었고.
피폐해진 얼굴 탓에 평소보다 십 년은 족히 더 늙어 보였으니까.
그런 그의 얼굴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적개심이 엿보였다.
다행인 점이라면.
‘당장 싸울만한 상태는 아니군.’
덕분에 처음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금사자에겐 궁금한 것들이 많았으니까.
엘릭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적당한 거리를 남겼을 때.
엘릭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예전부터 그토록 묻고 싶었던 의문.
“당신은 대체 뭔데 나나 메르빙거에게 그렇게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는 겁니까?”
* * *
황금사자는 그동안 메르빙거 가의 몰락을 유도한 것은 물론, 감찰국과 함께 가문의 비밀을 연구해 메르빙거의 힘을 갈취하기까지 했다.
더 나아가, 조부인 우스던 메르빙거가 지켜줬던 이들.
수인족들과 흉의 일족을 학살하고 실험체로 사용하기까지 했으니.
‘여름의 무덤을 파헤치기도 했고.’
이렇게만 봤을 때.
황금사자의 목적은 아주 간단했다.
-메르빙거의 완전한 멸족(滅族)
하지만 미르카의 말에 따르면 그 또한 메르빙거였‘었’다.
엘릭의 입장에서는 대체 왜 그가 이런 행보를 보이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같은 가문 사람일 텐데.’
그렇다고 완전히 마(魔)의 길에 들어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랬다면 진즉에 30년 전에 발발한 대마전쟁에서 마족의 편에서 싸웠을 테니까.
그는 오히려 마족을 물리치는 쪽이었다.
‘거기다 줄곧 황실과 가까운 거리를 유지했었고.’
그러니 조금 전과 같은 질문이 나오는 것이다.
자신의 가문에, 아니 우리의 가문에 무슨 원한이 있었던 것이냐고.
그러지 않고서야 황금사자가 이렇게 노골적으로 적의를 띤 행보를 보일 리 없으니.
하지만.
“….”
황금사자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엘릭을 노려볼 뿐이었다.
그러다 쩍쩍 갈라진 음성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원한이라.”
“….”
엘릭은 황금사자의 목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기억하고 있던 목소리와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이었다.
힘 있고 위엄 넘치는 목소리 대신, 탁하고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올 뿐이었다.
확실히.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다.
다시 보니 초점 또한 그리 또렷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존재만으로, 혹은 단순히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보여주었던 대륙 최강자의 위세는 온데간데없었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전사.
그게 현재 엘릭이 황금사자를 보고 느끼는 감상이었다.
‘아냐. 이건… 내가 그만큼 강해졌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안배를 겪기 이전의 자신이었다면, 상처 입은 황금사자에게도 두려움을 느꼈을지 모른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동등(同等).
그와 비슷한 눈높이를 가지게 되었다.
“설명을 한다고 한들, 네가 내 심정을 헤아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이냐?”
“적어도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심정을 모르지 않겠습니까?”
“웃기지도 않는 소리. 말해서 이해할 문제였다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거다.”
쿨럭, 쿨럭!
황금사자는 연거푸 마른 기침을 해댔다.
입을 가린 손에서는 조금이나마 핏자국까지 묻어났다.
최강자라 불리던 그가 쇠약한 모습을 보이다니.
역시 낯설었다.
하지만.
이내 황금사자는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다는 듯, 입가를 가볍게 훔치면서 다시금 엘릭을 노려봤다.
조금씩 회복이 되고 있는 건지.
그의 눈빛이 다소 살아나고 있었다.
“좀 강해졌다고 건방 떨지 마라, 애송아.”
쿠구구구-
순간, 그에게서 흘러나온 기세가 사방으로 뻗쳐나갔다.
엄청난 지진.
하지만 그 어떤 압박도 엘릭에게 위해를 끼치지는 못했다.
척!
황금사자가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내디뎠다.
“감히 나를 동정하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다니.”
콰직!
“그런 눈을 갖지 말지어다. 너희 메르빙거는.”
콰직!
어느새 두 사람은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에 있었다.
후우우웅!
엘릭이 검지를 가볍게 까딱거렸다.
엘릭의 몸에서 여러 인장들이 함께 빛나면서 당장이라도 터져 나올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그럴 만한 이유 따윈 없음이니.”
뚝!
황금사자의 걸음이 멈췄다.
“….”
“….”
그는 다시 한참 동안 엘릭을 죽일 듯이 노려보다가 땅을 박차고 분화구에서 사라졌다.
“후우…!”
엘릭은 안도에 찬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부상이 심하다고 해도 사자는 사자라는 건가.’
엘릭은 오른손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손끝이 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아무리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해도, 그 역시 오랜 안배로 지쳐있긴 마찬가지.
만약 그대로 맞붙었다면 승부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엘릭은 황금사자의 뒤를 쫓지 않았다.
그도 쉬고 싶었으니까.
결국 엘릭은 등을 돌려 그곳을 벗어났다.
* * *
“엘릭!”
“엘릭 님!”
엘릭이 용들과 함께 마차로 돌아오자, 션과 타샤가 마차에서 튀어나와 그를 맞았다.
“야, 괜찮냐? 어디 다친 덴 없고?”
“괜찮으신 거죠? 하루 종일 화산에서 나는 소리가 심상치 않던데.”
기다리는 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두 사람의 얼굴은 피로가 가득해 보였다.
그들의 입장에선 걱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전투가 일어나는 곳으로부터 제법 떨어졌음에도.
화산에서 들려오는 폭발 소리와 진동이 생생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거기다 세상을 가득 메우던 그 마력의 진동이란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였으니.
마치 산맥에 존재하는 모든 화산이 당장 터지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들 정도였다.
아무리 엘릭이어도 자연의 힘 앞에서는 무력해질 수밖에 없을 테니까.
물론, 폭발은 엘릭이 의도한 일이긴 했지만, 그들이 그걸 알 리는 없었다.
엘릭의 말대로 거리를 벌리고 차분히 기다리는 수밖에.
“당연히 괜찮죠.”
엘릭은 션과 타샤를 보며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히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으니까.
“여기 있는 동안 별일은 없었지?”
“있었겠냐. 너 혼자서 사자공가를 감당하는 것 같더만.”
션이 타박하듯 말했다.
“상황이 워낙 급해서 네 말을 듣긴 했는데 다음부턴 그러지 좀 마.”
션의 얼굴을 보니 어지간히 걱정한 모양이었다.
“용들은 괜찮나요?”
타샤가 물은 것은 그때였다.
엘릭도 무사한 것이 확인됐겠다.
그와 함께한 용들을 살펴보려는 것이었다.
원체 규모가 큰 전투였던 만큼, 용들에게도 피해가 있을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엘릭이 그들을 부르기도 전에.
끼유유유!
끼유유!
용들이 타샤를 보자마자 그녀의 앞으로 날아가 재롱을 떨기 시작했다.
타샤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 녀석들을 보며 안도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볼일은 잘 마쳤어?”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엘릭이 션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다행이네. 그럼 이제 어디로 갈 거야? 우리 집으로?”
“일단….”
핑-
엘릭이 무어라 말을 하려던 그때였다.
갑자기 세상이 서로 뭉쳐지듯 뒤집히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어…?”
“에, 엘릭! 야, 너 갑자기 왜 그래!”
“엘릭 님!”
주변의 소리마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마치 물속에 있는 것처럼 먹먹하게 들리는 목소리.
션과 타샤가 기다린 시간은 불과 하루에 불과했지만.
안배까지 마친 엘릭은 몇 달 동안 제대로 쉬질 못했다.
그 탓에 그간 쌓인 피로가 한 번에 그를 덮쳐온 것이었다.
두 사람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황급히 그를 부축하려 했다.
하지만.
쿵!
그러기도 전에 엘릭은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 * *
덜컹, 덜컹!
엘릭이 천천히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마차의 내부가 시야에 들어왔다.
춘계의 인장 덕분인지 몸의 피로는 많이 가신 상태였다.
엘릭은 기지개를 쭉 켜며 몸을 일으켰다.
션과 타샤는 그동안 여독이 꽤 쌓였는지 깊게 잠들어 있었다.
‘다행히 춘계의 인장 덕분에 피로가 많이 사라졌어.’
엘릭은 이그가 주는 효능에 놀라며 가볍게 웃다가 슬쩍 창밖을 보았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거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엘릭은 타샤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션을 흔들어 깨웠다.
“뭐야? 일어났네?”
아직도 피곤한 듯, 션이 하품을 길게 늘어뜨리며 눈을 비볐다.
“몸은 괜찮냐?”
“그럭저럭.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는 거냐?”
원래대로라면 다시 네레스타 가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곳에서 가이와의 대화를 통해 앞으로 있을 일들을 준비하려고 했으니까.
하지만 방향을 보니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어디 가긴. 네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너네 집에 가는 길이지.”
“…응?”
“동부로 가고 있다고.”
“설마…?”
엘릭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동부라면 자신의 집으로?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