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20화
동부
…허억!
엘릭이 크게 숨을 들이켜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곤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익숙한 화산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돌아왔군.”
미르카의 안배를 마치고 다시 안배의 공간으로 돌아온 것이다.
갑자기 미르카의 안배에서 튕겨져 나온 탓에 정신적인 충격이 제법 크긴 했지만.
엘릭은 도리어 후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힘… 죽어도 잊지 못할 거야.’
마지막 순간에 느꼈던 시조와 마신의 힘.
그것은 분명히 자신이 예상했던 것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으니까.
대우주(大宇宙).
아르카디아라는 세계… 그 너머에 존재하는 아득한 세계.
그것이 주는 느낌은 어떻게 말로 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엘릭은 자신의 양손을 내려보다가 곧, 있는 힘껏 양손을 강하게 쥐었다.
꽈악!
아직도 그때의 여운이 손아귀에 남아있는 것 같았다.
손짓 한 번에 용들이 격추당하고.
땅거죽과 함께 하늘이 뒤집히는 말도 안 되는 능력.
그만한 힘이 있다면 응당 온 세상을 내려다봐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잠깐이지만 자신이 생각하던 경지에 닿아서일까.
엘릭의 입꼬리는 내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편, 미르카는 그런 엘릭의 얼굴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어? 그냥 마기만 익혀서 오라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을…!’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본래 그녀가 엘릭에게 안배를 준 이유는 마기를 지금보다 더 잘 다뤘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마력은 이미 충분히 잘 깨우친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끊임없는 전투를 통해 깨달음을 얻으라고 일부러 혹독한 상황에 집어넣은 것이었는데….
설마 거기서 시조와 마신을 동시에 깨울 줄이야.
거기다 선악의 개념을 깨닫기까지 했다.
아무리 시조가 먼 과거에서부터 예언한 ‘선택받은 아이’라고 하지만 실로 무시무시한 성장 속도가 아닌가.
두 사람이 같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엘릭의 경지가 그만큼 올랐다는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사실보다 미르카에게 더 중요한 점이 하나 있었다.
“엘릭.”
그녀는 엘릭의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
“그래서. 누가 이겼지?”
바로 시조와 마신.
둘 중 누가 이겼냐는 것.
둘이 한 번에 깨어나는 경우가 좀처럼 없었으니, 지금껏 궁금했지만 도통 알 길이 없던 탓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내린 선택에 따라 앞으로 보여질 엘릭의 성향도 결정될 것이다.
미르카는 호전적인 성격답게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엘릭은 속으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많이 궁금해하시는 거 같은데 장난이나 쳐볼까?’
솔직한 심정으론 어려운 안배를 준 그녀를 골탕 먹이고 싶기도 했고.
그는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화르르르륵!
오른손을 펼쳐 작은 불길을 피워냈다.
주먹만 한 크기의 불엔 여름의 기운이 진하게 묻어난 상태였다.
“시조가 이겼구나!”
미르카는 그것을 느끼자마자 옳다구나 하고 외쳤다.
“….”
“…?”
하지만 엘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후우웅!
반대 손을 펼쳐 마기가 응축된 구체를 떠올렸다.
“….”
미르카의 미간이 와락 찌푸려졌다.
그녀의 두 눈이 불과 마기를 번갈아 보다가, 엘릭의 눈을 정확히 마주했다.
어서 누가 이겼는지 답을 하라는 눈빛.
하지만 이번에도 엘릭의 입이 열리지 않았다.
오히려 맞춰보라는 듯이 음흉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너 이 자식…!”
여름이 섬뜩한 표정으로 기운을 일으켰다.
쿠구구구구-
순식간에 엘릭이 앉아있는 곳을 제외한 주변의 지반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러면서 치솟는 수많은 화산들.
공기마저 숨이 막힐 정도로 턱턱 막혀왔다.
열풍은 미르카가 신호만 준다면 언제든지 폭발할 것처럼 이글거렸다.
“감히 나랑 장난칠 생각을 해? 빨리 안 말해? 밀어 버린다?”
하지만.
“….”
엘릭의 입은 끝까지 열리지 않았다.
“이익…!”
미르카는 자신의 압박에도 여전히 꿈쩍도 않는 엘릭의 멱살을 잡으며 흔들었다.
“아, 그러니까 대체 누가 이겼냐고오!”
탈탈탈탈.
하지만 몸이 바람에 나부끼는 인형 신세가 되어도, 엘릭은 여전히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 * *
“…후우, 됐다. 내가 너한테 뭘 바랄까.”
미르카는 한참이나 엘릭을 털어도 아무 대답도 나오지 않자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이래도 말 안 해줄 거지?”
“안배는 끝난 겁니까?”
엘릭의 태연한 반문에 미르카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개 같은 새끼.”
“미르카가 말씀하셨던 게 있죠. 저야말로 가장 메르빙거에 가장 가깝다고. 그럼…?”
메르빙거의 성을 가진 당신도 똑같지 않느냐는 뒷질문은 굳이 언급 안해도 고스란히 미르카에게 전달되었다.
아아아악!
미르카는 저 뺀질뺀질한 엘릭의 낯짝이 너무 싫었다.
마음 같아서는 한 대 후려치고 싶은 심정인데.
이제는 얼마나 강해졌을지 짐작도 가지 않아서 함부로 건들기도 힘들었다.
만약 덤볐다가 이쪽이 깨지기라도 한다면?
…그건 무슨 쪽팔림이냔 말이다.
하지만.
‘나도 잘 모르는 걸 어떻게 말해줘?’
사실 해줄 대답이 없는 건 엘릭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내면에 있던 시조와 마신의 충돌은 그도 이렇다 할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으니까.
선과 악.
시조와 마신.
둘 모두를 삼키겠다던 엘릭의 말은 절대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러니 둘의 충돌도 결국 무승부.
끝나기도 전에 이미 끝마친 것이다.
“…그래. 하여간 안배는 이걸로 모두 끝났다. 원래 이렇게 끝날 건 절대 아니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것, 미르카는 쉽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자신을 필요로 하는 안배는 모두 끝났다.
여기서부터는 엘릭이 맡아야 할 영역이었다.
“그렇군요. 그럼 마지막 가을의 안배는 어디서 얻을 수 있을지 여쭐 수 있을까요?”
“가을?”
엘릭의 물음에 미르카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기다려.”
“…?”
“네가 필요하지 않다고 해도 알아서 열릴 테니 기다리라고.”
“….”
조금 전에 침묵을 지킨 엘릭에 대한 소소한 복수였다.
‘그럼 그렇지.’
하지만 엘릭은 예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제대로 가르쳐준 적이 있었던 선조님들도 아니고.’
이런 일쯤이야 이제 익숙하다 못해 지겨울 지경이었다.
다만, 그들은 사람의 속을 긁는 데는 도가 터도, 절대 거짓말이나 빈말을 한 적은 없었다.
즉, 저 말에 어떤 힌트가 있다는 뜻.
‘알아서 열릴 것이다…?’
그는 지금껏 사계의 안배를 찾기 위해 그들과 관련이 있을 만한 장소를 찾아 왔다.
오토 한의 경우 그의 사저.
아르세우스의 경우 보석룡의 둥지.
그리고 마르카는 그녀의 무덤.
이렇듯 안배는 단 한 번도 엘릭의 눈앞에 직접 나타난 적이 없었다.
‘고생해서 찾으면 찾았지.’
그런데도 미르카가 저렇게 말했다는 건.
“마지막 안배는 ‘장소’를 찾는 게 아니군요.”
“….”
잠깐이지만 미르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끝까지 그렇다는 말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엘릭은 이미 그렇다고 확신한 상태였다.
더 나아가, 그의 머릿속은 이미 가을의 안배가 무엇일지에 대한 고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가을, 가을… 알아서 열린다라….”
가을이 무엇인가.
겨울에 잠들고, 봄에 깨어나 시작된 생명이 여름을 거쳐 그 결실의 열매가 맺히는 시기.
동시에 그 열매를 수확함으로써 생명이 추운 겨울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계절이기도 했다.
한 마디로 생명과 죽음이라는 갈림길이 동시에 존재하는 시기인 것.
그렇다는 건.
씨익-
엘릭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제 인장이 닿을 최종적인 형태가 바로 가을의 모습이겠군요. 원래대로라면 시조와 마신 중 선택한 모습이 가을이었을 것 같은데요.”
“…이래서 눈치 빠른 메르빙거는 싫다니까.”
미르카는 재미없다는 듯이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그래, 맞아. 그러니 내가 너에게 몇 번이나 질문했던 거고. 하지만 너는 계속 대답을 숨기고 있지.”
“….”
“선택을 미룬 건지, 아니면 다른 노림수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절대 조급하게 선택하지는 마라. 앞으로 메르빙거의 운명이 거기에 걸려 있으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엘릭은 미르카의 조언을 깊게 새겨들었다.
“그럼 이만 꺼져라. 이젠 지겨우니까.”
미르카가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저었다.
타고난 재능이나 권능에 비해 나태함이 심하다는 용이 보일 법한 언사였다.
“네. 그러죠.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엘릭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녀가 자신을 굴린 것은 사실이긴 하지만.
덕분에 또 다른 깨달음을 얻고, 새로운 경지에 도달하기도 하였으니까.
‘가문의 마지막 남은 비밀도 알아낼 수 있었고. 내가 앞으로 뭘 해야 할지도.’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파아앗!
엘릭은 모든 안배에서 빠져나왔다.
* * *
엘릭이 떠난 안배의 세계.
미르카는 원래 자신의 모습인 용의 형태로 돌아와 엘릭이 떠난 자리를 가만히 응시했다.
몇 번씩 생각해도 참 신기한 아이.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시조가 왜 엘릭을 선택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켜보다 보니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그 꼬맹이, 이제 어떻게 하려나.’
이로써 메르빙거 가문에 대한 모든 비밀을 알게 됐으니.
이제 남은 것은 엘릭의 선택뿐.
그가 어느 쪽을 고르냐에 따라 메르빙거의 미래가 결정될 터였다.
침묵하기를 잠시.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미르카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물었다.
그러자 저편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엘릭을 마신으로부터 구해줬던 사내.
우스던 메르빙거였다.
* * *
엘릭은 안배에서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용암이 펄펄 끓는 분화구를 볼 수 있었다.
‘역시 시간은 얼마 안 지난 것 같은데.’
하지만 분명히 달라진 점이 있었다.
무덤의 입구가 있던 곳이 완전히 무너져 자취를 감춘 것이다.
심지어 그 위로 용암의 수위가 가득 차올라서 두 번 다시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쩝, 아쉽네.”
엘릭은 그 모습을 보고는 입맛을 다셨다.
무덤에 들어서자마자 황금사자와 싸운 탓에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그렇게 살짝 스쳐 지나가듯 봤음에도 가치가 있어 보이는 서적이나 보물들이 한가득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얻은 게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엘릭은 그렇게 생각하며 주변에 귀를 기울였다.
휼과 용아병들도 성공적으로 적들을 물리쳤는지, 주변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오직 부글거리는 용암 소리만이 울리고 있을 뿐.
끼유유유!
끼유유!
그때, 새끼 용들이 날아와 엘릭을 반겼다.
줄곧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건지, 녀석들은 엘릭을 보자마자 얼굴을 비벼댔다.
“알았어, 알았어. 조금만 진정해.”
자칫하다 용암에 빠질라.
용들의 덩치가 있는 만큼 한 번에 세 마리를 다루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때.
『…네 녀석. 기어코 본왕의 힘을 손에 얻은 것이냐.』
엘릭은 뒤이어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팔짱을 낀 메피스토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