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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378화 (377/405)

2부 118화

마신(魔神)

엘릭의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덤덤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던 것이다.

“….”

마신은 미간을 찌푸리며 팔짱을 꼈다.

“왜? 너도 세계를 지켜야 한다느니, 그것이 숙명이라느니 하는 고리타분한 소리를 하는 것이냐? 다른 겁쟁이들처럼?”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그가 더더욱 이해 안 된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럼 굳이 거부할 필요가 있나?

인간이 신이 되는 길인데?

“메르빙거니까요.”

“…?”

마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자고로 메르빙거라면 전부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전히 이해 못 할 소리.

마신이 가만히 미간을 좁혔다가, 곧 뭔가를 깨달았는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재밌구나! 아주 재미있어!”

엘릭은 비웃는 듯한 마신의 웃음에 뚱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체 뭐가 그렇게 웃기십니까?”

“웃기지 않느냐? 네 입으로 직접 말해 보거라. 그럼 신이 되지 않고 뭘 하겠다는 거냐?”

“용(龍)과 마(魔). 진리(眞理)와 미신(迷信). 흑과 백. 마기와 마법. 전부 다 손에 넣겠다는 겁니다.”

엘릭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선구자가 된다? 하겠습니다. 지배자가 된다? 그것도 하죠. 제가 바라는 건 단순한 신이니 뭐니 하는 게 아닙니다. 그 너머에 있는 거죠.”

마신이 웃었다.

하하하.

그 소리가 참 시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릭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저는 단순히 사계나 시조님을 목표로 끝낼 생각이 없습니다. 당신도 마찬가지고요.”

“그럼?”

“메피스토의 인장도 제대로 삼켜야죠. 그리고.”

엘릭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더 위. 그분들보다 훨씬 더 높은 경지를 노릴 겁니다. 신보다도 더 위에 있는 무언가를요.”

그의 말은 일종의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메피스토는 마신의 일부.

그것을 삼킨다는 것은 마신마저도 아래로 여긴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마신은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웃음소리만 더 커졌다.

광기.

섬뜩함마저 묻어났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군! 너는 달라. 내가 봤던 다른 메르빙거들과 애당초 그릇이 다르다.”

마신의 미소 사이로 송곳니가 드러났다.

“이럴 때는 ‘그놈’의 선택이 맞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군. 먼 미래의 후손에게 걸어보겠다더니, 정말 그럴 만했어.”

그놈.

엘릭은 마신이 말한 대상이 시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메르빙거의 정체성을 두고 평생 마신과 다퉜던 숙적.

“그럼 하나만 더 묻겠다.”

엘릭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그게 가능할 거라 생각하는 건가?”

“선조들께서도 했는데 저라고 못하겠습니까?”

엘릭이 별일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래. 그 말 또한 맞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넘어야 할 것이 있지.”

“…?”

말을 마치자마자, 마신의 신형이 갑자기 촛불처럼 훅 하고 꺼졌다.

엘릭이 주변을 빠르게 훑었지만, 그 어디에서도 마신의 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대신.

“네가 진정 그것을 목표로 한다면.”

점점 멀어지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내.

[일단 나부터 넘어야 할 것이다.]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게 내면세계 전체에서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순간.

“…!”

후욱!

엘릭의 몸이 무의식의 바다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 * *

촤아아아!

“…빡시네, 정말로.”

엘릭은 마력을 끌어올려 저항을 시도했다.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힘을 쓰려고 할 때마다 알 수 없는 기운이 억눌렀으니까.

때문에 그는 늪에 빠지듯이 무의식의 바다 안쪽으로 계속 깊게 빠져들고 있었다.

‘분명 발목까지도 안 오는 곳이었는데.’

콰르르르-

그러다 빛이 겨우 들어올 정도로 깊은 곳까지 잠겼을 때.

번쩍!

엘릭은 거대한 무언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커다란 두 개의 눈동자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저 변태가 정말…!’

사람이 힘들어하는 걸 가만히 구경하고 있으면 그게 변태지 어디 사람인가?

마신은 재밌다는 듯 호선이 그려진 눈으로 엘릭을 이리저리 살폈다.

‘기분이 너무 더러운데. 뭘 어떻게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철조망 속 동물. 아니, 그보다도 못한 벌레가 된 기분이었다.

압도적인 힘에 제압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몸도 점점 굳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는 뒤늦게 마기나 인장의 힘을 일으켜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평생 이곳에 갇혀 영영 눈을 뜨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갑자기 날 못살게 구는 데는 이유가 있을 텐데.’

이것은 시험이었다.

마신이 먼 후손에게 내리는 시험.

네가 꺼낸 말을 네가 정말 할 수 있다면 스스로 입증해보란 뜻이었다.

마법도 마기도 전부 걸어 잠근 상태로.

[힌트라도 주랴?]

녀석이 말을 건넨다.

엘릭은 가만히 마신이 하는 말을 지켜보았다.

[넌 메피스토펠레스를 비롯한 모든 대마왕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아, 그런 뜻이었나.’

엘릭은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네 명의 대마왕은 마신의 조각, 혹은 잔재 같은 개념이다.

당연히 그중 하나인 메피스토를 삼키려 한다면.

혹은 그 자체가 되려 한다면 더 큰 상위 개념인 마신에게 잡아먹힐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걸 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른 개념을 덧댄다….’

마신이 속하지 못한 개념.

사계(四季).

‘아니, 그보다 더 위.’

시조님.

그렇다면 시조의 개념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시조님의 영역을 가져와야 해.’

엘릭은 언제나 메피스토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시조가 지녔다는 개념을.

-대자연(大自然).

번- 쩍!

순간, 엘릭의 팔을 따라 겨울, 봄, 여름의 인장이 차례대로 빛나고.

엘릭을 속박하던 마신의 기운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쿠르르르르-

무의식의 바다가 떨렸다.

엘릭은 마신의 개념을 밀어내는 데 성공했지만, 이것 또한 얼마 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대자연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아직 한 조각이 부족했다.

가을(秋).

모든 과일과 곡식이 무르익는 계절이 되어야만.

하늘이 푸르고 가장 높은 계절이 되어야만.

대자연도 완전한 깊이를 가질 수 있게 된다.

깊고 깊은 마신의 힘을 완전히 밀어내기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니 다른 편법을 사용해야…!

[제법이군. 반대되는 개념을 가져와 대항하고, 그동안에 속박되는 개념을 삼키고 분석해서 대응법이나 파훼법을 마련하려는 건가? 역시 너만이 할 수 있는 짓이로다.]

마신은 엘릭의 생각을 깨닫고 감탄을 터뜨렸다.

자신의 압박을 단순히 버티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인데, 저항까지 하려는 모습이 기특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네가 더 탐나는구나. 그러니 이곳으로 올…!]

마신의 말이 길게 이어지면서 엘릭을 보호하던 세 개의 인장도 깜빡깜빡 빛을 잃어갔다.

이대로는 정말 위험하다 싶을 때.

바로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눈을 뜨렴. 나의 아이야.

내면을 울리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마신을 등진 채로 자신의 머리를 정겹게 쓰다듬는 사람의 모습을.

언제나 영상으로만.

동상으로만 보았던 분의 얼굴.

별의 마도사, 우스던 메르빙거.

조부님이었다.

-아직 네가 대항하기에는 이르다. 하지만 이만큼 강해진 것만 해도 대견하구나. 그러니 앞으로도.

엘릭은 뭔가를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말문이 트이지 않았다.

-건강하게 자라려무나. 지금처럼만.

우스던은 그 말과 함께 엘릭을 뒤로 확 하고 밀었고.

마신의 어떤 소리를 뒤로 한 채, 무의식의 바다가 빠르게 소용돌이쳤다.

* * *

번쩍!

엘릭은 정신을 차리는 즉시 눈을 떴다.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용 군단과 싸우고 있는 마족들.

정신없이 뿜어지는 브레스와 그에 대응하는 공성 병기.

다시 미르카의 안배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

“….”

엘릭의 눈앞엔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메르빙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의식을 잃기 전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돌아왔구나?”

그는 엘릭이 의식을 찾았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메피스토펠레스나 마신이 아닌 ‘엘릭’ 메르빙거가 되었어. 아니, 그렇게 되기를 선택했어.”

“….”

엘릭은 그렇게 말하는 사내를 빤히 바라봤다.

가만히 웃고 있는 그의 얼굴에선 그 어떠한 생각도 읽을 수 없었다.

마치 거울을 보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 사내의 동공에 마족이 된 자신의 모습이 맺혔다.

“당신.”

잠시 생각에 잠겼던 엘릭의 입이 열렸다.

“시조님이죠?”

“….”

사내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지금도 역시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엘릭은 개의치 않았다.

그것을 무언의 긍정이라고 받아들였으니까.

“동시에.”

그리고 재차 입을 연 건 그때였다.

“마신이기도 하고요.”

씨익.

마지막 말에 사내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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