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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377화 (376/405)

2부 117화

마신(魔神)

이쯤 되니 엘릭은 마신이 전혀 다르게 보였다.

조금 전까지는 공포와 두려움을 안길 것 같은 악의(惡意)의 집합체로 보였다면.

지금은 전혀 그 속이 무엇인지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그림자나 환영 따위로 보였다.

또 어떤 면에서는 메르빙거 특유의 기질이 느껴지기도 했으니.

그래서 물은 것이다.

당신은 대체 ‘누구’이냐고.

‘아니. 그게 아냐.’

엘릭은 뒤늦게 자신의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당신은 ‘무엇’입니까?”

피식.

어쩐지 그런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만?”

“압니다. 다만, 마신이면서 메피스토의 마기향이 짙어서 물어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외에도… 당신에게는 너무 많은 것들이 느껴지고요.”

마신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느꼈던 기이한 기운.

엘릭은 그것이 메피스토의 마기향이라는 사실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줄곧 함께 지낸 메피스토의 기운을 모를 리가 없었다.

마신이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아무래도 메피스토펠레스가 아직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았나 보군?”

“무슨…?”

마신과 메피스토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물론 대마왕인 만큼 마신과 연관이 없을 리는 없겠지만.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더 숨겨져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메피스토가 과거에 마신과 함께 마를 뿌렸다는 얘길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엘릭은 더 자세한 설명을 듣기 원했으나.

“한 가지만 말해주지.”

“…?”

“원죄(原罪).”

그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그 의미를 잘 생각해봐라.”

“….”

엘릭의 눈살이 좁혀졌다.

‘원죄…? 그건 메피스토의 진명이지 않나? 그게 대체 무슨 의미를 지녔다는 거지?’

더 자세히 말해달라는 투로 그를 노려봤지만.

“궁금하겠지만 그 부분은 나중에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직접 듣도록 해라.”

싱글싱글 웃는 꼴을 보아하니 절대 쉽게 말해주지 않을 듯 보였다.

‘…하여간 메르빙거라는 것들은.’

사계가 되었든 마신이 되었든, ‘메르빙거’가 되면 다 저렇게 되는 건지.

꼭 사람을 궁금하게 만들어서 속을 박박 긁어대는 꼴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그동안 막연하게 상상하던 마신의 이미지와 너무 동떨어진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도 했고.

‘그래도… 사계와는 확실히 달라.’

뭐라고 해야 할까, 가깝지 않은 느낌의 차이?

사계는 엘릭을 줄곧 괴롭히기는 했어도, 엘릭이 고집을 피우면 못 이기는 척 들어줄 때가 많았다.

아주 어린 조카를 돌보는 듯한 느낌에 가까웠다.

하지만 마신은 아니었다.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내내 입가는 웃고 있으나, 시선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무미건조.

아무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런 애정도, 증오도 없다.

철저한 무관심.

저것이야말로 마신의 본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여기 나타났다는 건 내게 바라는 뭔가가 있다는 거겠지.’

엘릭은 호흡을 길게 골랐다.

상대는 메르빙거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부딪쳐온 적(敵).

당연히 경계해야만 했다.

“그럼 이렇게 나타난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고 싶은 말이 따로 있어서지.”

“하고 싶은 말…?”

“그래.”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차갑게 웃었다.

“묻겠다, 나의 오랜 후손이기도 하며 메르빙거의 당대 가주이기도 한 엘릭 메르빙거여. 너는.”

엘릭은 어쩐지 마신의 웃음이 자신을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의 메르빙거’가 될 수 있다고 하면 그렇게 될 생각이 있는가?”

* * *

원래의 메르빙거?

처음 질문을 들었을 때, 엘릭은 한순간 정신이 멍했다.

이게 대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럼 질문을 바꾸지. 엘릭, 넌 마법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

여기서 또 질문을 한다고?

엘릭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첫 번째 질문과 지금의 질문이 연결됐다는 사실을 눈치채곤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마법, 마법이라….’

세상에 존재하는 공기처럼.

마법 또한 당연히 존재하는 것이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게 고민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막상 천천히 생각하다 보니, 마법과 관련된 생각이 하나둘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엘릭은 천천히 그것들을 입 밖으로 끄집어냈다.

마법은 더욱 편한 삶을 살 수 있게 해주는 도구이며.

공격과 방어를 할 수 있는 무기이다.

또한, 존재만으로 연구 가치가 상당한….

“거기까지.”

마신이 엘릭의 말을 끊은 건 그때였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군.”

그는 어째서인지 사뭇 언짢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마신이 뒷짐을 진 채 엘릭을 중심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찰박, 찰박!

그가 발을 디딜 때마다 바닥의 물이 튀며 소리를 냈다.

“그래. 네 말대로 마법은 도구이자 무기지. 하지만.”

뚝!

그는 걸음을 멈춘 채 엘릭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그것은 결코 지식이나 연구 따위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라.”

순식간에 분위기가 달라졌다.

기분 나쁠 정도로 고요한 침묵이 주변을 감싸 안았다.

“마법을 연구해 지식으로 활용하자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

“….”

“그건 갓난아이에게 검을 선물해주고는 그걸 가지고 노는 걸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으란 말과 다름없는 말이다.”

그렇게 말하는 마신의 목소리엔 강한 힘과 확신이 담겨있었다.

“검을 줬으면 당연히 쥐는 법을 알려주고, 보다 더 잘 사용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하는 것이 맞지 않느냐?”

결국 마법 또한 마찬가지다.

마신이 그렇게 덧붙였다.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자니.

엘릭은 일전에 읽었던 책자의 내용을 떠올릴 수 있었다.

-마법이 탄생하게 되는데, 이를 추구하는 방법에 대해 갈등이 생겼으니….

한쪽은 마법을 연구해 지식으로 활용하고.

다른 한쪽은 마법의 힘을 키워 세상을 영도(領導)하고자 했던 이들.

아무래도 마신의 경우 후자였던 모양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또 다른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힘을 추구하다 마법이 마기로 발전한 건가?’

그러다 마족이 나타난 거고?

어디까지나 추측이긴 하지만, 마신의 말만 들었을 땐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원래 메르빙거는 마법을 사용하는 ‘무리’를 일컫는 말이었지. 세상이 올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인도하는 선구자들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고. 이제 내가 말하는 ‘원래의 메르빙거’가 무엇인지 알겠느냐?”

엘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마디로 마(魔)를 받아들이라는 뜻이었다.

그럼으로써 힘을 추구하고 자신과 함께 세상을 이끄는 일에 동참하자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마법이 아닌 주술을 사용할 때조차 메르빙거는 여러 왕국으로부터 견제를 받았으니까.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 못하게 힘을 추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래도 지배를 한다는 건….’

“지배와는 개념이 전혀 다르다.”

마신은 엘릭의 생각을 읽고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배는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고, 생명을 생명처럼 다루지 않는다는 뜻이지. 인간과 가축을 전혀 구분 짓지 않고 세상을 제 입맛대로 가꾸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마신은 엘릭이 잘못된 생각을 하지 않도록 고치고 있었다.

“나는 가르치자는 것이다. 처음 인간이 불을 다루기 시작하매 영장류와 갈라져 협동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지식이라는 것을 얻게 되었듯이. 마법을 알게 되면서 신으로 향하는 길을 걷게 되었지.”

“….”

“그리고 그 앞에는 우리가 있었음이니. 나는 그 길의 앞에 있자는 뜻이다. 어리석은 것들을 밀어내고, 인간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자는 것이지.”

엘릭은 마신의 말이 너무나 달콤하게 느껴졌다.

“그동안 억울하게 갖가지 견제를 받아온 너라면, 한없이 하등하고 멍청한 것들 때문에 수없이 발목이 붙잡혔던 너라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을 텐데?”

엘릭의 머릿속으로 여러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천재(天才).

그는 늘 천재였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항상.

심지어 이성이 생겨나기 전인 한 살 때의 기억도 어렴풋이 날 정도이니 오죽할까?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래서 엘릭은 그게 늘 답답했다.

왜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지?

왜 이걸 이해 못 하는 거지?

왜 매번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거지?

왜 멍청한 말들만 계속하는 거야…!

심지어 엘릭에게 마법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신 어머니조차도, 엘릭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

그래서 엘릭은 언제부턴가 다른 사람들을 ‘공감’하지 못했다.

대신에 ‘이해’하려 애썼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자신과 모두 다르니 어쩌겠나?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사회적인 페르소나를 쓰고 살 수밖에.

하지만 그러면서도 불쑥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멍청한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는 자신이,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괄시를 받고 발목이 붙잡히기만 하는 이 상황이,

그런 것들이 모두 억울하기만 하다고.

내게 힘만 있더라면.

내게 재능을 제대로 쓸 수 있는 기회만 주어진다면 다를 텐데….

그러다 엘릭은 가문의 안배를 얻고 절맥증을 치료한 뒤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는 다를 것이다.

저 멍청이들은 그냥 잊어버리자. 답답하니 없는 사람 취급하고, 내가 모든 걸 이끌자.

그래야 속이 편할 것 같다….

그리고 실제로.

“너는 해내었지. 모든 것을.”

엘릭은 깊게 빠졌던 상념에서 바로 빠져나왔다.

‘내가 무슨 생각을…?’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나를 뺀 모든 것들을 멍청하고 아둔하다고 여기는 시선이, 마신이 말한 시선이, 그동안 무의식 한편에 자리 잡은 속마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손에 넣었지. 제국? 황제? 사실 따지고 보면 언제부턴가 네 눈에는 멍청이들의 놀음에 지나지 않게 보였을 것이다. 너는 신에 근접하고 있었으니까.”

“….”

“그깟 인간 세상의 권력 따위, 신이 손사래만 쳐도 날아갈 덧없는 것에 불과할진대. 개미들이 아무리 자신이 잘났다고 으스대봤자 결국 개미에 불과하듯, 그놈들이 으스대는 꼴이 웃겼겠지. 그게 영원할 것처럼 구니 헛웃음만 나왔겠지.”

엘릭은 이번에도 생각했다.

그 말이 맞다고.

그런 생각을 어렴풋하게나마 했던 것이다.

겉으로 표현만 안 했을 뿐이지.

“네가 지금 있는 그 자리, 그것이야말로 ‘원래의 메르빙거’일지니.”

엘릭은 마신의 동공에 비친 자신이 서서히 마신과 똑같이 변해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너의 자리를 되찾으라는 것이다.”

반대로 마신은 엘릭의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마치 쌍둥이처럼 서로 같아지고 있었다.

동화가 이뤄지고 있었다.

“신이 되어라. 엘릭 메르빙거.”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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