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16화
용과 마
“크윽!”
엘릭이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았다.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것과 동시에 끔찍한 두통이 찾아온 탓이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이곳에서 뭘 하고 있던 건지도.
누군가 아무것도 떠오르지 못하게 하려고 머릿속을 마구 헤집는 느낌이었다.
“엘릭!”
“괜찮나?”
숀과 율호왕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그가 있는 쪽으로 몸을 날렸다.
메르빙거가 뭐라고 말한 순간부터 엘릭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으니까.
그들은 메르빙거가 엘릭에게 무슨 저주라도 쏟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엘릭!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율호왕은 도착하자마자 엘릭의 어깨를 붙잡고 거칠게 흔들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한들 엘릭이 정신을 차리는 일은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고통스러워하더니.
그는 어느새 초점 없는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엘릭? 엘릭이 누구지?”
문제는 상태가 더욱 심각해졌다는 사실이었다.
자신이 누군지에 대해 혼란이 찾아온 것을 넘어, 이젠 완전히 정체성을 잃어버린 모습.
“엘릭 정신 차려 봐라!”
숀마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나는… 나는 대체 누구지?”
여전히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을 뿐.
“네 놈… 엘릭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
율호왕이 메르빙거를 보고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그는 어느새 로브로 얼굴을 완전히 가린 채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어째서인지 별다른 움직임도 취하지 않고, 공격할 생각조차 없는 모습.
율호왕은 엘릭의 상태가 좋지 않은 와중에 굳이 싸울 필요는 없다고 판단.
숀과 함께 계속해서 엘릭을 살폈다.
그러는 사이 엘릭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어 갔다.
“나는 누구….”
“네가 누구긴, 엘릭 메르빙거잖느냐!”
“대체 뭘 고민하는 거야!”
두 사람이 계속해서 엘릭을 깨우려고 노력하던 그 순간.
파직, 파지지직!
몸 안에서 폭탄이 터진 듯, 엘릭의 몸이 거칠게 튕기더니 심상치 않은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
두 사람 모두가 사람들이 인정하는 강자인데도 불구하고.
기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전신에 소름이 확 돋았다.
또한, 짙은 공포심이 발밑에서부터 올라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순수하게 압도적인 힘 앞에서 느껴지는 무기력함.
특히 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설마…!’
그것은 과거에 시조를 우연히 마주쳤을 때에나 느꼈던 감각이었으니까.
숀과 율호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으면서 아주 잠깐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이대로는 위험하다.
같이 나서서 엘릭을 제압하자, 그런 생각을 나누던 그때였다.
콰아아아아-
엘릭의 몸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마기가 터져 나왔다.
“큭!”
“이게 무슨…!”
율호왕과 숀은 엘릭에게 접근할 생각도 못한 채 한참이나 떠밀려나고 말았다.
균형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울 지경.
엘릭에게 달려든다는 건 생각지도 못할 수준이었다.
아무리 힘을 쥐어짜도, 오히려 그걸 희롱하기라도 하듯 공포심이 모든 힘을 거짓말처럼 지워버렸다.
심지어 그들을 무의식 중에 보호하고 공기마저 흔들려 살갗이 따가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메르빙거는 초지일관 똑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저 녀석은 도대체….”
마치 엘릭의 기파가 녀석만 피해간다고 해야 할까?
마치 별세계에 따로 존재하는 사람인 것만 같았다.
한순간 율호왕이 의아함을 느끼던 그때.
파지지지직!
엘릭의 힘이 더 강렬하게 폭주하기 시작했다.
마기가 불안정하게 퍼져나가면서 난동을 피워댔다.
콰콰콰쾅!
마기가 채찍처럼 온 사방에 휩쓸 때마다 주변에 닿는 모든 것들이 소멸됐다.
성의 일부분이 완전히 파괴되어 그 파편이 사방으로 마구 튀었다.
“나는 메피스토인가… 아니면 마신인가….”
엘릭은 그만한 난리 속에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중이었다.
쿠구구구구-
아무것도 없던 하늘에 먹구름이 끼며 세상을 어둡게 만들었다.
콰르릉! 콰릉!
하늘을 가를 것만 같은 천둥 번개와 함께 거센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엘릭의 주변에서 폭발하는 힘은 더욱 강해져만 갔다.
숀과 율호왕은 포기하지 않고 목소리를 키우며 엘릭을 불렀다.
그러나 그들의 목소리는 천둥과 바람 소리에 완전히 묻히고 말았다.
반면에.
마족들은 그런 엘릭을 보며 더욱 신앙심이 커지는 중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이들이 보기에는, 그가 용 군단의 수장을 상대하기 위해 힘을 끌어내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심지어 엘릭의 힘이 하늘마저 뒤집어버리고 있었음이니.
마족들은 그 엄청난 힘에 경탄하며 이미 승리를 확신하고 그에 취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그들의 신앙은 더욱 더 커져만 갔고, 그 탓에 엘릭의 폭주는 점점 더 거세져만 갔다.
그리고 그 어느 순간이 되자.
번쩍!
엘릭의 몸에서 눈을 뜨기 힘들 정도의 강렬한 빛이 터져 나왔다.
콰콰콰콰-
어느 순간, 엘릭의 모습은 그림자에 완전히 파묻혀 사라지고 말았다. 대신에 하늘마저 드리우는 거대한 괴물의 형상이 나타났다.
“…!”
“저, 저건…!”
주변에 있던 모든 이가 그 모습을 보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성의 크기를 아득히 뛰어넘는 몸집.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무시무시한 마기. 아니, 어둠.
마치 어둠과 그림자가 인격을 띠면 저렇게 되지 않을까 싶었으니.
마신(魔神).
모든 마의 시작이자, 그들의 근원이 되는 존재가 진짜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으니.
“마신이시여!”
“마신이시여!”
마신의 그림자가 온 세상을 뒤덮었다.
마족들이 들고 있던 무기를 내려놓고 엘릭을 향해 넙죽 절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표정에는 경외심이 잔뜩 묻어나 있었다.
스륵-
이제껏 가만히 있던 메르빙거가 움직인 것은 그때였다.
그는 로브를 뒤로 젖히면서 무표정한 얼굴로 마신을 올려다봤다.
“…엘릭?”
율호왕은 메르빙거의 얼굴을 처음 보고는 표정을 굳혔다.
분명히 저기 마신의 모습으로 있어야 할 녀석이 여기에 있는 것 같았으니까.
“이게 대체…?”
그는 한참 동안 메르빙거의 얼굴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 * *
“….”
엘릭은 천천히 눈을 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으로 가득한 장소.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점차 시력이 회복되며 주변의 것들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찰팍!
검은 물이 얕게 채워져 있는 무한한 공간.
몸을 움직일 때마다 가벼운 물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이질적이면서도 낯설지 않은 장소였다.
무의식의 바다.
하르간을 만나기도 했던 장소였다.
다만, 그때와는 느낌이 아주 많이 달랐다.
더 음험하고, 더 어두운….
그리고 평소와 다른 점이 하나 더 있었다.
‘팔이 투명해.’
팔을 내려다보자 반대쪽이 비칠 정도로 반투명하게 변한 손이 보였다.
손바닥을 뒤집어 봐도 마찬가지.
이번에는 손을 위로 올려 하늘을 가려봤지만, 역시나 손바닥을 통해 어두운 하늘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전신이 전부 반투명하게 변해 있었으니까.
‘육체와 무의식의 경계가 흐릿해.’
미아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정신 줄. 꽉 잡아. 놓으면. 그대로. 녹는다.
하르간을 만나기 위해 무의식의 바다를 건너려고 한창 노력하던 때.
미아가 점점 지쳐가는 엘릭을 보며 충고하지 않았었나.
자칫하면 무의식의 세계에서 스스로를 잃어버리고 영영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하물며, 지금은 메르빙거와의 대화 중에 강한 영향을 받고 무의식의 세계로 끌려온 상황.
당연히 여파가 평소보다 더 클 수밖에 없었다.
“바깥은 정말 어떻게 되는 거지?”
아마 밖에서는 완전히 마신이 되어버린 몸이 날뛰고 있을 게 분명하겠지.
그게 엘릭에게 득이 될지 해가 될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면세계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 노력해봤지만.
“…안 되네.”
마치 단단한 벽에 가로막히기라도 한 것처럼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사실 지금은 이렇게 반투명한 형체라도 유지하는 것조차 버거운 상태이기도 했다.
“그럼 이제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메르빙거. 그 작자와 대화를 좀 더 나눠야 할 것 같은데.
지금과 같은 상황이 길어진다면 정말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었다.
‘마신의 형상을 유지하는 게 영혼에 좋을 리가 절대 없으니까.’
엘릭이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였다.
촤아아-
고요하기만 하던 무의식의 바다가 일렁였다.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얕은 물이 더욱 크게 움직이더니, 사람만 한 크기의 물기둥이 일어났다.
“…!”
엘릭은 잔뜩 경계하면서 그것을 노려봤다.
아무런 미동도 없는 모습.
하지만 엘릭은 어째서인지 물기둥 안쪽에 있는 뭔가가 자신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번뜩!
그 순간, 그곳에서부터 두 개의 눈이 뜨였다.
눈은 정확하게 엘릭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츠츠츠-
물기둥이 서서히 형태를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사람과 같은 외형에 한 쌍의 날개가 활짝 돋아났고 머리 위로 세 개의 뿔이 솟아났다.
엘릭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존재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마신이라는 사실을.
그가 내면세계에 들어오기 전에 차지하고 있던 몸과 완벽하게 똑같은 외형.
그래서일까.
엘릭은 어째서인지 거울을 보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는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엘릭을 응시하다 이내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만나게 되니 반갑구나, 후손이여.”
“…!”
그의 목소리가 내면세계 전체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가만히 듣는 것만으로도 전신이 짓눌리는 기분.
과연 ‘신’이라고 해야 할지, 단어 한 마디 한 마디에는 강렬한 힘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유독 다른 단어가 엘릭의 가슴을 강하게 짓눌렀다.
-후손.
메르빙거가 모든 마법의 시조인 만큼, 마의 근원인 마신 또한 메르빙거의 일종(一種)이라는 건 쉽게 예측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직접 듣고 나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래서 물을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어째서 당신에게서 메피스토의 향이 강하게 느껴지는 것인지요?”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