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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370화 (369/405)

2부 110화

용과 마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두려움이 가득하기 때문일까.

아무도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분명히 율호왕의 말에 공감을 하고는 있었지만, 마지막 심리적 장벽이 그들의 발목을 묶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걸 부숴야지.’

숀은 그동안 그런 광경을 너무나 많이 봐서 잘 알고 있었다.

비단 그가 살던 시대의 메르빙거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등지고 나왔던 옛 가문도.

마족과 싸우던 동료들도.

버림 받았던 산골 마을의 사람들도.

부서진 성채에 사흘 밤낮을 쉬지도 않고 번초를 서던 병사들도.

모두 똑같았다.

“안 나오면 내가 직접 골라주지. 거기 너, 앞으로 나와라.”

숀이 검 끝으로 한 병사를 기리키며 말했다.

“저, 저 말씀이십니까?”

지목된 병사의 얼굴이 사색이 되며 동공이 거칠게 흔들렸다.

겁에 잔뜩 질린 모습.

앞선 동료들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뻔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제발 살려주십쇼!”

병사가 몸을 덜덜 떨면서 뒷걸음질 쳤다.

나약해도 이렇게 나약할 수가 있나?

이것들이 정말 마족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숀이 코웃음을 치며 그에게 다가갔다.

“누가 너 죽인다고 했나? 대련이다 대련. 그것도 곧 있을 전투를 위한.”

말이 대련이지 병사가 보기에는 일방적인 폭행이 따로 없었다.

당장 옆으로 고개만 돌려도 만신창이가 된 이들이 구석에 쌓여있지 않은가.

목검으로 대련이 진행됐음에도 갑옷이 찌그러지거나 완전히 망가진 상태.

철로 만들어진 갑옷조차 멀쩡하지 않은데 몸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얼굴이 퉁퉁 붓고 전신에 시퍼런 멍이 선명했다.

돼지 잡듯 목검으로 무자비하게 상대를 두들기는 모습이 아직까지 뇌리에 선했다.

물론 개중에 의식을 잃지 않은 몇몇 인원들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들조차 그리 몸 상태가 썩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미간을 좁힌 채로 숨을 힘겹게 헐떡이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은 단 일합조차 버틸 자신이 없었다.

저걸 보고도 율호왕의 목소리에 바로 심리가 손바닥 뒤집듯이 바뀌는 것도 이상했다.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정말 말로만 자신들을 동요케 할 뿐이지, 어쩌면 괴롭히려는 목적일지도 모른다.

저들은 용이니까.

“야, 너희 양쪽 놈들. 그놈 잡아. 너희가 나오고 싶지 않으면.”

다른 두 병사들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지목된 병사를 붙잡아 숀을 향해 힘껏 밀었다.

“제, 제기랄 놔! 이것들아! 저놈은 용이라고! 정말 순순히 우리를 도와 줄 리가 없잖아! 정신 차리라고오!”

물론, 그 절규를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포로로 붙잡힌 용들이 돌아다녀도 ‘성주님이 알아서 해주실 것이다’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병사는 기겁하면서 숨을 들이켰다.

숀의 얼굴이 시시각각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 * *

“….”

엘릭은 계속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문득 그는 병사에게서 동질감을 느꼈다.

동료들에게 내몰리는 모습이.

마치 봉신들에게 버림받는 자신의 가문과도 같아서.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같이 웃고 떠들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가문의 상황이 나빠지기 무섭게 봉신들도 아주 차갑게 등을 돌렸었지.’

그래서일까.

엘릭은 저 병사의 심정을 백번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동시에. 지금 당장 무엇을 간절히 바라는지도.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때마침 숀이 대련을 강제로 시작하려는 타이밍.

탁!

엘릭은 창 밖으로 몸을 날리면서 숀과 병사의 사이로 떨어졌다.

“서, 성주님!”

“성주님께서 오셨다!”

“사, 살았다아!”

병사들이 웅성대는 동안.

“손, 잠시만요.”

“왜? 여긴 우리한테 맡긴다면서?”

숀이 내리치려던 검을 멈추고 뚱한 얼굴로 엘릭을 바라봤다.

갑작스럽게 대련이 중단되었으니 약간 짜증이 난 모양이었다.

결국 자신을 믿지 못하나 싶은 서운함도 있을 테고.

“마, 마왕님…. 사, 살려주십시오.”

대련을 지목 당했던 병사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엘릭의 손을 붙잡았다.

엘릭은 가만히 그 손길을 보았다.

‘나도 이 병사처럼 누군가 손을 내밀어줬으면 어땠을까.’

지금껏 살아온 인생 중에서 가장 암울했던 시기.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하루가 다르게 가문이 몰락하던 때.

만일.

정말 만에 하나.

누군가 자신에게 도움을 줬다면.

‘지금의 내가 있었을까?’

그에 대한 답은 알 수 없었지만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지만, 자신또한 누구보다 타인이 내미는 손길을 기다리고 바라왔다고.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원래 몸의 주인도 같은 심정이었으려나.’

메르빙거와 메르빙거의 갈등.

어쩌면 과거에 실제로 있었던 이 성채에서.

자신이 빙의한 마족 또한 같은 심정이 아니었을까?

자신이 해결하지 못한 갈등을 풀어 달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확실한 건 아니었다.

단지 그렇게 생각만 할 뿐.

엘릭은 병사에게 이만 돌아가도 좋다며 어깨를 두들겼다.

그는 감사다하는 듯이 허리를 직각으로 푹 숙이다, 서둘러 자리에서 달아났다.

엘릭은 그를 보다가 다시 숀에게 고개를 돌렸다.

숀은 이제 아예 노골적으로 짜증 섞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이래? 너도 병사들이 상태가 좋지 않은 건 알고 있잖나?”

“네. 잘 알죠.”

솔직히 말해 오합지졸이나 다름이 없는 군대.

제대로 된 무기도 얼마 없고, 보급은 처참할 수준이다.

아마 용 군단이 이대로 2차 공세를 가하지 않아도, 한 달도 되지 않아 자멸할 게 분명하다.

“그래! 그런데 왜 막는 거냐?”

“안배의 해결책은 이들을 강하게 해서 용들을 물리치는 게 아니니까요.”

“뭐?”

순간, 숀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율호왕도 마찬가지.

“진짜 해결책, 찾았어요.”

씨익!

엘릭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 * *

엘릭의 말에 율호왕이 호기심이 동했는지 입을 열었다.

“서재에서 뭔가 찾은 모양이지?”

엘릭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숀의 눈빛이 바뀐 것도 그쯤이었다.

그는 어느새 엘릭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때까지 눈치를 보면서 세 사람을 보던 병사들은 이때다 싶었던지 냅다 우르르 사라졌다.

엘릭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메피스토의 행세를 하는 겁니다.”

“뭐?”

숀과 율호왕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뜻인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형제여, 네가 메피스토인 척을 한다는 뜻이냐?”

“네.”

숀과 율호왕은 엘릭의 당당한 말투에 사뭇 당황한 표정을 하며 서로를 마주 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메피스토도 없는 마당에 갑자기 왜 그런 결론이 나왔는지 모르겠군.”

“오히려 그게 힌트였죠.”

숀의 말에 엘릭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곳엔 메피스토가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 시간대에 그는 존재하지 않았다.

엘릭이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간단했다.

‘책자 어디에서도 그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서재에 있는 대부분의 책자에선 대마왕과 관련된 내용들이 종종 언급되곤 했다.

그러나 딱 하나.

메피스토나 ‘원죄’라는 그의 진명은 단어조차 보이지 않았다.

처음엔 단순히 자신이 그 내용을 찾지 못하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분명 메피스토도 대마왕 중 한 명일 텐데.

어째서 그의 내용만 쏙 빠져 있단 말인가?

여기서 엘릭은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다.

메피스토가 아직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그러면 모든 게 이해가 돼.’

어째서 그와 관련된 내용이 존재하지 않은 것인지.

실제로 메피스토는 대마왕 중에서도 가장 기록이 적었다.

‘메피가 그들 중에서 가장 강한 파괴력을 가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

강자는 역사에 기록이 남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남다른 힘을 가진 만큼 다양한 업적을 남길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런데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메피스토의 기록이 가장 적다는 것은.

‘대마왕 중에서도 가장 늦게 나타났다는 뜻이 아닐까?’

지금까지 엘릭이 알아낸 사실을 바탕으로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책자에 그의 내용이 나오지 않은 것도 설명이 되니까.

그리고 다르게 말하면 메피스토가 태어난 장소가 이곳일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여름이 한 말도 그럼 이해가 돼.’

-이번 기회에 마기도 제대로 다뤄보도록.

그때는 단순히 마기의 숙련도를 올리는 것쯤으로 받아들였으나.

지금은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마기를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해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를 깨달으라는 게 아닐까?

‘물론 어디까지나 추측이긴 하지만.’

엘릭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일단 메피스토의 행세를 하는 것이 안배를 풀어나가는 열쇠가 아닐까 싶었다.

엘릭은 이런 자신의 추측을 내놓았고.

“메피스토펠레스가 된다…?”

“원죄의 인장을 직접 만든다….”

숀과 율호왕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특히 메피스토와 치열한 격전을 벌인 적이 있던 숀으로서는 어느 정도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흥미가 동하는 얼굴이었다.

“좋아. 그럼 우리가 뭘 도와주면 되지?”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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