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08화
용과 마
잠깐이지만 용의 군단에 속해 있던 두 사람이라면 알까 싶어 던지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숀과 율호왕은 서로를 보고 눈만 끔벅였다.
그러다 당연하지 않느냐는 투로 답했다.
“금발에 녹안이지 않나?”
“당연히 메르빙거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
엘릭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들을 노려봤다.
피식.
숀은 가볍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혹시나 능력을 묻는 거라던가, 이름 따위를 묻는 거라면 우리도 모른다. 나 역시 마찬가지고. 내가 살던 시절의 인물은 아냐.”
율호왕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엘릭은 깊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결국 원래 자신이 들어갔어야 하는 몸이라는 뜻인데….
“메르빙거에게 메르빙거가 아닌 몸에 빙의시키면 대체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네요.”
원래의 몸이거나, 같은 메르빙거의 몸이라면 지금보다 더 잘 싸울 자신이 있을 거라는 아쉬움이 너무 강하게 들었다.
그랬다면 이런 난이도가 아닐 테니.
지금이야 두 개의 인장이 복구되긴 했으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마족의 몸이다.
그것도 원래 가지고 있는 마기도 얼마 되지 않는.
심지어 당장 신성력조차 제대로 쓰기가 힘드니 여러모로 답답할 수밖에.
하지만 그때.
“엘릭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네 몸도 메르빙거다.”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엘릭이 놀라 반문했다.
“마족이잖아요?”
“그래.”
“그러니까 무슨 소리…!”
“그래서 메르빙거라는 거다.”
“마족인데, 메르빙거…?”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숀은 그런 엘릭을 이해한다는 듯이 침착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이 안배 속 이야기는 메르빙거가 완전한 마족 사냥꾼이 되기 이전의 이야기니까.”
“…!”
엘릭은 얼추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보석 나무와 악마수.
용과 마.
동전의 양면과도 같던 두 가지는 애당초 뿌리가 같았었다.
그렇다면 메르빙거라고 다르지는 않겠지.
용과 마가 본격적으로 갈라지기 이전의 신화를 다루는 것이라면, 숀의 말도 이해가 되었다.
“이제 얼추 짐작이 가나 보군. 원래 메르빙거는 거대한 ‘하나’였다. 그러다 모종의 이유로 갈등이 생겼고 지금과 같은 상황이 오게 되고 만 거지.”
엘릭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추 짐작했던 사실이긴 하지만, 그래도 겨울 6장으로부터 직접 가문의 비사를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그리고.”
숀이 몸을 앞으로 숙이며 재차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두 메르빙거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는 게 이번 안배에서 네가 해야 할 일인 것 같은데?”
엘릭은 처음 안배를 얻었을 때를 떠올렸다.
「마에 물들어 세상에 커다란 폐해를 끼쳤었고….」
「그릇된 것들을 바로잡고 지난날에 대해 속죄하기 위해….」
한때 마에 들어선 적이 있으나 다시 벗어났다고 했던 내용.
그때가 바로 지금의 시간대인 듯했다.
문제는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숀이 말한 갈등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떤 이유로 갈등이 생겼는지 알아야 방법을 물색하거나 할 텐데.
현재 엘릭이 알고 있는 바는 전무했으니까.
그래서 숀에게 물어봤지만.
“몰라.”
“…예?”
“나도 모른다고.”
“….”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당당한 투로 말했다.
“내가 겨울 6장 중 하나가 된 건, 사계의 시절이 한참 지난 뒤거든.”
즉, 두 메르빙거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이후라는 것.
“이런 일이 있었다는 얘기만 들었지, 그게 무엇인지는 들은 바가 없다.”
“그럼 현재 용들을 다루는 메르빙거가 누구인지도…?”
“당연히 모르겠지?”
“….”
결국 엘릭이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제기랄….”
* * *
그 뒤로도 몇 번의 대화가 오갔지만, 유의미한 결과는 없었다.
지금 상태로는 갈등의 원인이나 상대 메르빙거의 정체를 추측하는 것은 무리인 듯했다.
‘결국 알아서 정보를 모아서 추론하는 수밖엔 없단 뜻인데.’
엘릭은 잠시 고민하다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일단 내가 차지하고 있는 몸. 그리고 상대의 정체. 이 두 개부터 확실하게 알아야겠어.’
어찌 됐건 둘 다 메르빙거이며, 갈등의 중심에 있는 자들이니까.
그러니 이를 중심으로 조사하다 보면 분명 알아낼 수 있는 정보가 아주 많을 게 분명했다.
‘숀의 말대로라면 두 메르빙거가 갈라진 데에는 이 두 가지가 가장 중요한 것 같으니까.’
엘릭은 생각을 정리하고 어딘가로 이동했다.
뒤에서 어디 가냐는 숀과 율호왕의 물음이 들려왔지만.
여전히 깊은 고민에 빠져 있어 미처 듣지 못했다.
‘내가 모르는 메르빙거의 숨겨진 역사를 찾아야 해.’
가문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대체 무슨 일이 있어 마에 물들게 된 것인지 등등.
그렇게 가문의 뿌리를 천천히 찾아가다 보면.
‘지금 일어난 일이 무슨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있겠지.’
안배의 시간대가 아주 먼 과거인 만큼.
이 성 안에 있는 서재엔 그때의 일을 기록한 역사책 또한 있을 게 분명했다.
* * *
“오, 생각보다 좀 큰데?”
엘릭은 서재에 도착하자마자 감탄을 터뜨렸다.
모든 벽면엔 큼지막한 책장이 자리하고 있었고, 빈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서적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못해도 수만 권은 족히 될 것 같은 분량.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이었다.
“마족이 공부라니…. 이 시대 마족은 뭐가 좀 다른가.”
마족의 힘은 무지(無知)와 미지(未知)에서 나온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닌 듯 보이니 신기할 수밖에.
하지만 엘릭은 잘 되었다 싶었다.
책이 많다는 건 그만큼 이 시대에 대해서 알아낼 것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재미있잖아?’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사실 엘릭은 마법사답게 독서가 취미였다.
요즘은 너무 바빠서 못했었지만.
‘지금은 그것도 아니잖아?’
게다가 현 시대에서는 절대 보지 못할 고서(古書)들이 대부분일 테니, 충분히 재미있을 것 같았다.
물론, 언제 적들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안일하게 책을 하나하나 들여다볼 수는 없는 노릇.
그러니 고르는 데에는 신중을 기해야 하겠지만, 그래도 즐거운 건 즐거운 거였다.
엘릭은 빠르게 책의 제목을 훑으며 필요한 정보가 있을 만한 것들을 추리기 시작했다.
[마법의 탄생]
[대륙의 역사]
[각 왕국의 흥망성쇠 상편]
[신앙의 시작]
[마의 근원은 어디에서부터인가]
.
.
직관적으로 역사와 관련되어 보이는 것들만 하나도 빠짐없이 골라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나름대로 추린다고 추렸는데도 제법 상당한 양.
“좋아, 그럼 맛 좀 볼까?”
그가 책상 앞에 앉으려던 그때였다.
“엘릭? 여기 있냐?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갔던 거야?”
“언질이라도 하고 가지!”
숀과 율호왕이 도서관 문을 열고 나타났다. 말없이 떠났던 엘릭을 쫓아온 것이다.
하지만.
“…무, 뭐야 이거?”
“윽. 갑자기 두통이 몰려오는 기분인데.”
“너도 그래? 나돈데.”
두 사람은 도서관이 영 질린다는 얼굴이었다.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단 말이지. 스스로를 고문하는 것도 아니고 대체 왜 감옥 같은 곳에서 왜 저러는 건지….”
정말 어지간히 싫은지 질색하며 문틀조차 넘기 싫어하는 모습.
두 사람 모두 생전에 책과는 담을 쌓고 지낸 탓에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이다.
물론, 앞으로도 그 담을 허물 생각이 없지만.
엘릭은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엘릭. 대체 이런 곳은 왜 온 거야?”
질문을 던지는 율호왕의 시선이 무심코 엘릭의 앞에 있는 책으로 향했다.
그는 양 페이지에 빽빽하게 채워진 글자들을 보고, 못 볼 걸 봤다는 듯이 고개를 옆으로 홱 하고 돌렸다.
“왜긴요. 여유 있을 때 안배에 대한 정보를 조금이라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엘릭이 바로 옆에 쌓인 책을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왜요, 도와주시려고요?”
율호왕은 미쳤냐면서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헛소리 마라. 차라리 대련장으로 가서 마족들 훈련이나 돕고 말지. 숀, 어때?”
“간만에 맞는 소릴 하는구만. 어서 가자고.”
숀은 격하게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련이요?”
“그래. 아까 성에 끌려오면서 슬쩍 보니 있던데. 병사들도 훈련시킬 겸, 지금 가면 딱 좋겠군.”
“….”
엘릭은 너무나 당당한 두 사람의 대화에 순간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두 분… 다 지금 포로 신분이신 거 아시죠?”
“아 참. 그랬었지?”
뭐 듣고 보니 그렇네.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는 얼굴.
에휴.
엘릭은 깊게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그래도 저 둘이 서재에 들른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만약 둘이서 그대로 성을 돌아다니기라도 했으면, 성 안에 피신해 있는 마족들이 난리가 났을 게 분명했다.
이건 자신의 실수이기도 했다.
“잠시만 기다려보세요.”
엘릭은 창문 너머로 고개를 내밀더니 병사 한 명을 불렀다.
어차피 두 사람이 옆에 있어봤자 방해만 될 거 같으니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수밖에.
다른 누구도 아니고 숀과 율호왕이 대련을 지도한다면 병사들에게도 도움이 제법 될 것 같기도 했고.
“부르셨습니까?”
병사가 금방 도착했다.
엘릭은 그를 보며 무심하게 말했다.
“어, 여기 두 포로가 당분간 병사들 훈련을 도와줄 거야. 대련장으로 데리고 가.”
“…예? 잘못 들었습니다?”
“….”
“네. 바로 데리고 가겠습니다.”
엘릭이 가만히 노려보자, 그는 둘을 데리고 황급히 서재를 벗어났다.
“이제야 조용해졌네.”
마침내 찾아온 고요.
엘릭의 얼굴엔 기대감이 가득한 상태였다.
사계든 겨울 6장이든.
지금껏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던 가문의 비밀을 밝혀낼 수 있는 순간이었으니까.
팔락.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책장이 넘어갔다.
「주술은 자연으로부터 힘을 끌어 쓰던 초보적 이능을 말하며, 우리의 시작은 거기서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사람들은 우리와 같은 샤먼들의 집단을 ‘메르빙거’라 불렀으니….」
「…하지만 각 국가에선 그들이 가진 힘이 체재와 권력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 그들을 배척하려 하기에 이른다.」
「그런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 택한 방법은 체계적인 집단 체제, 즉 가문을 만드는 일이었다….」
‘원래부터 집단에서 시작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스토리가 있었을 줄이야!’
충분히 놀라울 만한 이야기였다.
쭉 마법을 연구하며 마도 명문가의 길을 걸은 줄 알았던 가문의 시작이 ‘주술’이었다니.
지금은 오래된 논문에서나 아주 가끔 언급될 정도로 잊힌 개념.
주술은 그저 옛 소수 민족이 쓰던 능력에 불과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여러 국가에서 억압을 당했다?’
엘릭은 마지막 문단을 보고 씁쓸한 감정을 지울 수 없었다.
지금도 감찰국과 몇몇 가문들에게 견제를 받고 있으니, 역사가 되풀이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대륙이 통일되기 전이나 후나 별 차이가 없었구나.’
그의 눈이 다음 장으로 향했다.
「…인간은 편리함을 좇는다. 이는 주술도 마찬가지였다.」
「메르빙거는 단순히 손짓으로 불을 피우고, 물건을 얼리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더욱 강한 힘. 더욱 다양한 방법. 기나긴 시간 동안 메르빙거는 주술을 연구했고, 그때 마력을 기반으로 한 ‘마법’이 처음으로 탄생하게 된다.」
‘뭐? 마법이… 용이 만든 게 아니었다고?’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