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07화
용과 마
콰아앙!
거대한 몸집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엘릭은 겨울의 힘을 거두면서 곧장 숀에게 향했다.
그는 어느덧 인간의 형태로 돌아와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중이었다.
조금 전 공격의 피해가 꽤나 컸던 모양.
엘릭이 숀에게 다가가자, 그는 씁쓸한 듯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야야, 좀 살살해라, 살살.”
그러면서 그는 양팔을 들어 올렸다.
완전한 항복 표시.
“평범한 대련인데 꼭 그렇게 사람을 줘 패야겠냐.”
“…평범한 대련이라서 심장에 구멍을 뚫으려 했습니까?”
엘릭은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었다.
아직까지 심장 부근이 욱신거리는 것 같았으니까.
물론, 뚫렸다고 해도 진짜로 죽진 않았겠지만.
그래도 말과 행동이 다른 건… 양심 무엇?
“에이, 그거야 어차피 막을 줄 알았으니까 그런 거지.”
엘릭은 시시덕거리며 웃는 숀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말을 말아야지, 원….
그러다 이어지는 목소리.
“내가 더 가르쳐 줄 건 없더라.”
엘릭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훌륭했어.”
그리고 이어진 한 마디.
엘릭은 순간 그동안 가슴을 억누르던 압박감이 확 하고 사라지는 기분을 느꼈다.
길고 길었던 겨울의 시련이 마침내 끝났단 뜻이었으니까!
오토 한.
설산왕.
나하트람.
미아 등등.
수많은 얼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자신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뭐, 하긴 했겠지.’
먼길을 돌아가야 했겠지만.
그래도 덕분에 빠르게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던 것이다.
후련한 감정을 만끽하고 있던 바로 그때였다.
파아아아-
엘릭의 오른손에서 시원한 감각이 몰려왔다.
지금껏 보이지 않던 동계의 인장이 나타나 빛을 내뿜고 있던 것이다.
‘인장이…?’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닌지, 다소 흐릿한 상태긴 하지만.
그럼에도 마족의 몸으로 빙의하며 당연히 사라졌던 인장이 나타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것보다 훨씬 놀라운 건 동계의 인장이 10성에 다다랐다는 사실이었다.
완성(完成).
엘릭의 입가에 웃음기가 걸렸다.
그러다.
“…어?”
다음 변화가 일어났다.
이게 끝이 아닌 모양이었다.
눈이 녹으면 봄이 찾아오는 법.
동계의 인장이 완성되자, 자연스레 이번에는 개화의 인장이 복구되고 변화를 시작했다.
꽃이 만발하고, 열매가 맺히고, 나무의 형상을 갖춰졌다.
춘계(春季).
봄의 힘이 완전한 각성을 이룬 것이다.
이 역시 완성의 단계였다.
후우우-
마력 회로를 따라 시원한 기운이 전신으로 확 하고 번졌다.
그러자 조금 전의 전투로 인한 피로가 단순에 사라졌다.
계속해서 욱신거리던 통증 또한 마찬가지.
마기 또한 완전히 회복 되어 다시 힘이 들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이그도 전보다 더 단단하게 자리 잡은 거 같네.’
보이지는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세계수와 엘릭은 정신적으로도 연결된 관계였으니까.
하지만 딱 하나.
폭염의 인장은 여전히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나?’
아직 여름이 추가로 내준 안배는 끝난 게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할 무렵이었다.
지금껏 싸움을 지켜보던 율호왕이 엘릭과 숀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내려왔다.
‘또 싸워야 하나….’
당장 여기서 율호왕과 바로 맞붙어도 손쉽게 밀릴 것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또 무의미한 싸움을 하기에는 힘들다 싶은데.
“걱정 마라. 나도 싸울 생각은 없으니까.”
“엥?”
싸움이라면 죽고 못 살 율호왕일 텐데 갑자기 왜 이러지?
“여기서 포기하면 미르카와 대련할 기회는 사라질 텐데요?”
엘릭이 정말 이해 못 하겠다는 얼굴로 바라보자, 율호왕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너와 겨루고 싶은 마음이 더 커져서 말이다. 그러니까 이것부터 빨리 끝내자고.”
엘릭은 어쩐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뭔가 또 사고를 칠 것 같은데….
“벌써부터 싫은 티를 팍팍 내는 얼굴이군. 하지만 이러면 어떨까?”
율호왕이 대뜸 엘릭의 손을 낚아채더니 자신의 멱살을 움켜쥐게 만들었다.
“자, 잠깐만요! 대체 뭘 하려는…!”
엘릭이 재빨리 손아귀를 풀려고 했지만, 그보다 먼저 율호왕이 씩 웃으면서 뒤로 나자빠졌다.
벌러덩!
“으. 아. 아. 내. 가. 지. 다. 니. 원. 통. 하. 다.”
누가 봐도 국어책 읽기처럼 서툴기 짝이 없는 연기.
하지만 문제는 멀리서 보기에 엘릭이 순식간에 율호왕을 제압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었다.
『…이럴 수가.』
『고작 마족 하나에….』
『군단이 자랑하는 대전사가 둘이나 당하다니.』
『마왕은 마왕이란 것인가….』
즉시 하늘에서 용 군단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심각한 얼굴로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그러면서 슬쩍슬쩍 이쪽을 바라보는 눈빛엔, 적대심과 경계심이 가득한 상태였다.
설마 이렇게까지 당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는 분위기.
용들은 쉽사리 접근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 * *
‘어떠냐? 아주 큰 도움이 됐지?’
율호왕이 엘릭에게 은근한 조소를 날리며 속삭였다.
‘…뭐, 그도 그렇네요.’
확실히 지금 같은 분위기를 잘만 활용하면 적들의 사기를 확 낮출 수 있었으니까.
그렇지 않아도 다음엔 어떻게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냥 제압하는 걸로도 한계가 있고.’
툭!
엘릭이 율호왕의 멱살을 놓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율호왕은 이제 아예 의식을 잃은 척 눈을 감고 뻗어버린 상태였다. 그러면서 이쪽을 흘낏 보는 게 알아서 잘 해보라는 투였다.
피식.
엘릭은 알겠다며 가볍게 웃고 용 군단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용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쏟아지는 게 느껴진다.
하지만 엘릭은 주눅 드는 기색 하나 없이 덤덤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오히려 천천히 용들의 눈을 하나하나씩 마주쳤다.
적당히 무거운 분위기가 형성됐을 때쯤.
화아아악!
엘릭은 내재 되어 있던 마기를 아끼지 않고 한껏 뿌렸다.
춘계의 인장 덕분에 이전보다 회복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면서 더는 마기를 아낄 필요가 없었다.
츠츠츠-
그림자가 엘릭의 머리 위로 형체를 갖추며 짐승의 형상을 띠자, 용들의 안색도 저절로 딱딱하게 굳었다.
그들도 느낀 것이다.
이대로 엘릭과 부딪쳐서는 승산이 없다는 것을.
“이들과 같은 꼴이 되고 싶지 않다면 이만 썩 꺼지지?”
나지막한 한 마디였지만, 용들의 귓가에는 너무나 선명하게 들렸다.
그들 모두 목덜미에 잔뜩 소름 돋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일단 후퇴한다.”
용 군단의 수장들은 이 이상 부딪쳐서야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후퇴를 선언하고 말았다.
푸드득!
조용히 떠나는 녀석들의 어깨가 축 가라앉아 있었다.
* * *
용의 군단이 완전히 사라진 후.
엘릭은 곧장 성채로 돌아왔다.
처음부터 엘릭의 활약을 지켜본 병사들이 만세를 외치며 그를 반겼다.
“사령관님 만세!”
“만세 만세 만만세!”
비단 그 뿐만이 아니었다.
언제 나왔는지, 성에 있던 피난민들 또한 양팔을 머리 위로 던지면서 엘릭을 환영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지옥과도 같은 상황에서 살아남은 덕분인지 하나 같이 눈물을 줄줄 흘렸다.
몇몇은 엘릭의 앞에서 절까지 하는 게 목숨이라도 바칠 기세였다.
‘이거 정말 괜찮은지 모르겠네.’
한편 엘릭은 묘한 기분을 느끼는 중이었다.
이제껏 마족과 싸우기만 했지.
설마 그들에게 이런 식으로 환대와 감사를 받을 줄은 몰랐던 탓이다.
‘거기다 마왕이라니.’
선조들이 알면 멱살이라도 잡힐 것 같은데 말이지?
엘릭이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물론, 그런 속내를 내색하지 않고 가볍게 손을 흔들어주는 것으로 환호에 화답을 해주었다.
그럴 때마다 엘릭을 향한 환호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지만.
한편, 엘릭의 뒤쪽에서는.
“저, 저! 쳐 죽일 놈들이!”
“감히 어디서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있어!”
“마왕님의 자비로 살아남은 주제에…!”
피난민들의 분노가 엘릭이 데려온 포로들에게 향하고 있었다.
숀과 율호왕이 포승줄로 온몸이 꽁꽁 묶인 채 엘릭의 뒤에서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야, 이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
[너무 과한 것 같은데.]
발목은 겨우 걸을 수 있을 정도의 보폭만을 남기고 묶여있었고.
눈은 안대로 가려져 어디로 가는지조차 알 수 없도록 해놓은 상태였다.
『그럼요. 이 정도는 해야지 마족들도 이해를 하죠. 조금만 참으라니까요?』
…어쩐지 깐족대면서 웃어대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엘릭의 말마따나 여기서 이렇게 안 해서는 엘릭을 따라갈 수 없을 테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죽어, 죽어!”
피난민들이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나 잔해들을 마구 던지기 시작했다.
툭, 툭, 투둑!
제대로 먹지 못해 자신의 몸 하나 겨누기 힘든 평범한 마족들.
그런 그들이 던진 것들이기에 두 사람에겐 아무런 타격조차 없었다.
간간히 엘릭이 보이지 않는 실드를 쳐주기도 했고.
다만.
‘…기분이 상당히 더럽군.’
‘진짜 죄인이라도 된 것 같잖아.’
두 사람은 이건 좀 어떻게 해보라는 식으로 무언의 압박을 주었지만.
“뭘 꾸물거리는 것이냐!”
빠악!
곁에 있던 병사가 그들의 뒤통수를 후려친 탓에 다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으히히.”
엘릭의 웃음소리와 대비되는 숀과 율호왕의 짜증이 아주 커질 무렵에야 집무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포로들 심문은 내가 할 테니 전부 물러가거라.”
“충!”
“충!”
엘릭은 곧바로 병사들을 전부 물렸다.
인기척이 전부 사라진 뒤에야 그는 숀과 율호왕의 속박을 전부 풀어주었다.
“두 분 다 고생 많으셨어요. 빈자리에 앉으시구요.”
하아!
숀과 율호왕은 짜증 섞인 시선으로 엘릭을 노려보았지만, 엘릭은 무슨 문제가 있냐는 투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진짜 한 대 때릴까 하는 생각이 두 사람의 머릿속을 동시에 스쳤지만, 그냥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여기서 드잡이질을 해봤자 무슨 도움이 되겠나 싶었던 것이다.
엘릭은 커피를 끓여와 테이블 앞에 내려놓았다.
“뭐, 어쨌거나 그럭저럭 1차 공세를 막긴 했네요. 순전히 운빨인 것 같지만.”
용 군단의 전력을 알고 있는 숀과 율호왕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엘릭의 말마따나 지금 용 군단이 물러난 데에는 엘릭의 저항이 예상보다 대단했다는 것에 당황해서 그런 것일 뿐이니까.
“문제는 다음이란 말이죠.”
엘릭은 녀석들의 군단이 금방 몰려올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미르카가 준 안배가 그렇게 쉬울 리 없을뿐더러.
적들의 세력이 이곳보다 결코 떨어지는 게 아니었으니까.
이번 공격은 이쪽이 어떻게 나오는지 가늠해보고자 하는 성격이 강했다.
“무엇보다 저쪽에서 전력으로 나온 것도 아니고.”
아무리 엘릭이라도 그 많은 수를 막는 건 불가능했다.
마족 병사며 피난민이며 성의 모든 인원을 모아도 마찬가지.
그리고 무엇보다.
놈들의 수장은 나서지도 않은 상태였으니.
자신과 같은 메르빙거로 보이는 사내.
그는 전투 내내 지켜보기만 했을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나마 한 거라곤 레드 드래곤이 된 율호왕을 내보낸 정도?
사내의 전력이 어느 정도일지는 짐작이 가지 않으나, 쉽지 않을 거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대체 그 녀석의 정체가 뭡니까?”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