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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364화 (363/405)

2부 104화

용과 마

“하아….”

엘릭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공성 병기가 있기는 했지만, 그마저도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성벽도 벽돌 사이사이에 공간이 보이는 게 믿음직스럽지 못했고.

하나부터 열까지 제대로 된 게 없어, 이래서야 용 한 마리라도 제대로 막을 수 있을까 싶었다.

엘릭은 다시 생각해도 여름에게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

‘골라도 하필 이런 곳을 골라줘?’

비단 미르카 뿐만이 아니라, 이상한 안배를 진행했던 선조들에게까지 내뱉는 푸념이었다.

병사가 다시 입을 연 건 그때였다.

“그리고 악당 메르빙거가 그 선두에 있습니다!”

“…메르빙거?”

엘릭은 자기도 모르게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게 뭔 헛소리인가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병사의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의문을 표하기 무섭게 사방에서 탄식과 곡소리가 함께 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메, 메르빙거라니…!”

“젠장… 우린 다 죽었어!”

가뜩이나 좋지 않던 병사들의 사기가 더욱 떨어진 모습.

피골이 상접했던 그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니, 안 그래도 아파 보이던 이들이 더욱 병약해 보였다.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 같으니라고! 대체 여기에 뭐가 있다고…!”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하는 거 아닙니까?”

“도망치긴! 그런다고 살생을 즐기는 악당으로부터 도망칠 수나 있겠어?”

공포심이 감정을 지배한 탓에 서로 다투는 이들까지 나타났다.

‘이걸… 웃어야 해, 아니면 말아야 해?’

자신의 가문이 마족에게 두려움의 대상이라 뿌듯해야 할지.

아니면 면전에서 욕을 먹고 있으니 화를 내야 할지.

여러모로 애매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지금 집중해야 할 건 따로 있었다.

‘용의 군단이란 말이지…?’

어찌 됐건 안배를 완수해야 한다는 점.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은 상황에서 사기까지 떨어져 썩 쉬워 보이지는 않았지만.

힘든 만큼 얻어가는 건 많을 게 분명했다.

“안 돼… 메르빙거와 용이라니….”

“이젠 포기하는 게 맞는 거 같아….”

메르빙거가 온다는 말에 여전히 어수선한 성벽.

생각을 마친 엘릭이 있는 힘껏 발을 굴렀다.

콰앙!

갑작스러운 굉음에 주변에 있는 이들이 화들짝 놀라면서 엘릭을 돌아봤다.

그가 굳은 표정으로 병사들을 쭉 훑어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라. 사악하고 비열한 메르빙거는 내가 어떻게든 막을 테니!”

성 곳곳에 쩌렁쩌렁 퍼지는 엘릭의 목소리.

누구보다 당당하면서도 자신감이 넘쳤기에 축 처져 있던 병사들의 사기가 조금씩이나마 올라오는 듯했다.

따지고 보면 선조들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일 수도 있었지만.

‘뭐, 나 빼고 다른 메르빙거는 죄다 사악하고 비열하니까. 공정하고 마음 약한 내가 돌연변이라니까?’

엘릭은 오토 한과 미르카 같은 사계의 얼굴을 떠올렸다.

분명 거짓말은 아니었다.

다만, 이걸로는 부족했다.

적들에게 제대로 맞서기 위해선 이 이상이 필요했다.

‘사계. 사계를 떠올리자.’

그러니 아주 할 말이 많았다.

“인성이 더럽고 입만 열면 거짓말을 내뱉는 못된 메르빙거에게 이곳을 순순히 넘겨줄 것인가!”

“….”

갑작스러운 질문에 병사들이 침묵했다.

하지만 이는 이미 예상한 바.

엘릭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으며, 뻔뻔하기 짝이 없는 비겁한 메르빙거에게 패할 것인가! 정녕 그것을 원하는가?”

그의 질문에 병사들의 가슴 속에서 무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호승심.

동족들을 지키고자 하는 욕망.

“대답해보아라!”

“아닙니다!”

“아닙니다!”

병사들이 눈치를 보다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엘릭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더욱 우렁차게 외쳤다.

“우리가 물러나면 여기 있는 소중한 가족들이 사악한 메르빙거에게 능욕을 당할 게 분명할 터!”

한껏 고조된 분위기.

“자리에서 일어나, 무기를 들어라!”

엘릭의 말에 사기가 오를 대로 오른 병사들이 그의 말에 따랐다.

그리 많지 않은 수.

하지만 다시 살아난 눈빛만큼은 아주 강렬했다.

“비열한 메르빙거를 죽여라!”

엘릭이 주먹을 쥐고 외치자, 병사들 그의 말을 따라 소리쳤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아아!”

“죽이자!”

쿵쿵!

검으로 방패를 두드리고, 창이 바닥을 찍는 소리가 일제히 울렸다.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 치사한 메르빙거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후손에 대한 그 어떤 배려조차 찾아볼 수 없는 메르빙거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엘릭은 자신도 모르게 그간 속에 담고 있던 사적인 감정을 토해냈지만.

“남 잘되는 꼴은 죽어도 보지 못하는 속 좁은 메르빙거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거의 광기가 든 것처럼 열광하는 분위기 속에서.

엘릭의 말꼬리를 잡을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거지 같은 안배를 준 메르빙거를 죽여라아아아아!”

“죽여라! 와아아아아!”

“와아아아!”

그저 열광하며 엘릭의 마지막 말을 따라할 뿐.

뿌우우우우-

적들이 왔다는 신호를 알리는 뿔 나팔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 * *

엘릭은 병사가 말했던 성의 동쪽 구역으로 이동했다.

도착하자마자 성벽 너머 지평선에 깔린 용의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녀석들은 날개를 펄럭이며 이쪽을 향해 쇄도하는 중이었다.

한 마리만 있어도 그 위압감이 엄청날 터인데.

하늘을 가득 뒤덮은 용들을 보고 있자니 피부가 절로 아려오는 것 같았다.

“으으으…!”

“이, 이길 수 있겠지?”

“내 말이…!”

몇몇 병사들이 이를 딱딱 부딪치며 긴장한 기색을 내비쳤다.

사전에 엘릭이 사기를 끌어 올렸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무기를 버리고 도망쳤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때문에 엘릭은 그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용할 수 있는 무기는 이게 전부인가?”

엘릭은 빠르게 설치되고 있는 공성 병기를 둘러보면서 곁에 있던 병사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발리스타에 사용되는 창이나 공성포의 폭탄에는 각종 인장의 힘을 활용해 효과를 극대화한 상태입니다.”

병사의 말에 엘릭은 그제야 다소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겉보기와 달리, 그래도 최소한의 수준은 갖추고 있는 듯했으니까.

“좋군. 모두 원위치로!”

엘릭은 침착하게 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각자의 자리로 이동했다.

그러는 사이.

후욱!

엘릭은 마기를 일으켜, 전신을 덮었다.

새로운 몸이 가진 마기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옅은 마기가 일렁였다.

‘생각보다 너무 적은데?’

실망스러운 수준.

엘릭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껏 아무리 휼이나 메피스토의 마기를 써왔다고 하지만.

이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새로운 몸은 마기가 많은 편이 아니었다.

‘사령관 정도 될 정도면 상급 마족은 될 텐데….’

그나마 다행인 점은 육체가 꽤 건강하다는 점이랄까?

일반 병사들과 달리 제법 단련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용들을 전부 물리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마기를 아껴 쓰면서 마법을 적절하게 섞어야겠어. 아니지, 아예 마투술을 쓰는 게 좋겠군.’

엘릭이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다시금 용 군단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

시야 속으로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용의 군단 가장 선두에 위치한 골드 드래곤.

바로 그 머리 위에 앉아있는 사람과 눈이 마주친 것이었다.

흠칫.

엘릭은 순간 조금 놀란 표정이 되고 말았다.

원래의 자신과 똑같은 얼굴이기 때문이었다.

혹시 자신의 육체가 저쪽으로 넘어간 건가?

그런 생각에 살짝 눈살을 찌푸리는데.

‘아니야. 미세하게 달라.’

뒤늦게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눈매며 얼굴형이며.

확실히 닮긴 했지만, 어딘가 조금씩 다른 느낌이었다.

그래도 어쩐지 자신을 닮은 얼굴이 이쪽을 보며 실실 웃는 모습이… 기분이 조금 나빴다.

아니, 아주 많이 나빴다.

쿠르르르-

그 순간, 거대한 힘에 지반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용들이 일제히 입을 쩍 벌려 숨결을 내뿜으려고 한 탓이었다.

아가리 속으로 이글거리는 화염구가 눈에 띄었다.

“이런.”

아무래도 저 메르빙거가 자신과 닮고 말고를 신경 쓸 게 아닌 모양이었다.

엘릭은 공성 병기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전군 준비하라!”

철컥, 철컥!

곧바로 장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성벽을 따라 길게 설치된 바리스타에 커다란 창이 걸리고.

공터에 자리한 투석기엔 무식하게 큰 바위가 아슬아슬하게 올려졌다.

이외에도 공성포와 같은 다른 무기들도 언제든지 발포할 준비를 마쳤다.

엘릭의 명령만 떨어지면 되는 상황.

그는 손바닥을 편 채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대기하라는 뜻.

사정권에 들어올 때까지. 최대한 침착해야만 했다.

“사령관 님…!”

“동요하지 말고, 기다려!”

마족들이 마른 침을 삼키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긴장감 때문에 바리스타를 오작동할 수도 있는 상황.

그래도 다행히 엘릭이 준 긴장감 때문인지 실수는 벌어지지 않았다.

“조금만 더.”

용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조금만 더 참아.”

이글거리는 화염구의 열기가 이제 성곽까지 느껴졌다.

덜덜덜.

병사들의 팔도 잘게 떨릴 무렵.

“전군 발포하라!”

용들이 일제히 숨결을 내뿜으려는 순간.

엘릭은 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발포하라!”

“다들 발포하라아아!”

쾅쾅쾅쾅!

다른 지휘관들까지 모두 깃발을 흔들면서 폭발을 독려했다.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성벽을 따라 나열된 발리스타와 공성포가 쏘아지기 시작했다.

정면에서 각양각색의 브레스가 날아왔다.

화르르르르륵!

쿠쿠쿠쿠쿵-

콰르르릉…!

순식간에 용들과 성곽 사이가 뿌연 연기로 가득 찼다.

콰콰콰콰-

그 순간, 발사체에 새겨진 인장의 힘이 발동하면서 숨결의 방향을 강제로 꺾어놓으려 했다.

하지만 상대는 하나도 아닌 다수의 용.

그런 시도가 무색하게도, 인장의 힘은 순식간에 숨결에 집어 삼켜지고 말았다.

“계속해서 쏴라!”

“조금의 틈도 생기면 안 된다! 멈추지 말고 공격해!”

퍼퍼퍼펑!

쉴 새 없이 창과 포가 발포됐다.

그러자 처음엔 무의미하다고 느껴졌던 공격의 성과가 서서히 드러났다.

숨결이 일그러지며 흩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엘릭 오리지널

런치 컨트롤

마력이 아닌 오로지 마기만을 사용해 사용한 기술.

그 탓에 진짜 런치 컨트롤만큼의 출력은 나오지 않았지만.

“잘 모를 때는 익숙한 게 최고지!”

지금 그에게 이보다 좋은 기술은 없었다.

파앗!

엘릭이 성곽 밖으로 몸을 날렸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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