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103화
여름의 안배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는 말이 있다.
황금사자에 대해서 잘 안다면 앞으로 그를 상대하는 데 있어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다만, 못해도 천 년을 넘는 세월 동안 어떻게 살아있을 수 있었냐는 건데….’
생명이라면 모름지기 수명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그건 뛰어난 실력자, 혹은 초인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았다.
초인이 말만 초인(超人)일 뿐이지, 정말 인간이 아니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었으니까.
그랬다면 시조님이나 조부님도 진즉에 불멸을 얻었을 터였다.
그런데 황금사자는 그게 아니란다.
대체 어떻게 한 것일까?
그래서 여기에 대해서 질문을 던진 것이지만.
“미안하지만, 대답해줄 시간이 없구나. 녀석이 다시 땅 위로 기어올라 오기 전에 안배를 마치도록 하자고.”
“…예?”
엘릭은 자기도 모르게 반문을 던지고 말았다.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던 것이다.
안배?
폭염의 인장을 얻었으면 필요 없는 것 아닌가?
“그야 내가 하기 나름이지.”
순간, 미르카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고.
“…제기랄!”
엘릭은 뒤늦게 불안한 마음이 들어 도주를 시도하고자 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개갠 것에 아직도 꿍해 있었던 게 분명했다!
“들어오는 건 네 마음이어도, 나가는 건 아니란다?”
미르카는 흉악하게 웃는 낯 그대로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제기라아아알!”
엘릭은 갑자기 몸뚱이가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느낌에 어떻게든 빠져나오고자 발버둥 쳤지만.
휘휘휘휘!
오히려 그럴수록 흡입력이 더 빨라졌다.
미르카와 가까이 있었던 것이 그의 실수였다.
쑤우우욱-
결국 엘릭은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지고 말았다.
“후후후. 후후후후! 건방진 애송이 같으니.”
미르카는 조용해진 심상 세계를 보면서 기분 좋게 깔깔 웃어댔다.
이렇게 골탕을 먹이고 나니 속이 아주 편안해졌던 것이다.
물론, 단순히 그녀가 엘릭을 골탕 먹이고자 안배를 발동시킨 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그녀는 만사 귀찮은 것을 세상에서 제일 싫어한다.
그러니 원래대로라면 귀찮으니 안배 따윈 발동하지 않고 그대로 접었어야 했지만.
오히려 엘릭의 빛나는 재능 때문에 억지로 안배를 재발동시키게 된 것이다.
‘이렇게 빨리 폭염을 깨달았다면, 그걸 보완하는 것도 금방이겠지.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을 노릴 수 있을지도…!’
응용 방법, 마력 순환 등. 다방면에서 보완해야 할 점들이 있었다.
만약 그것들을 채운다면?
금세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또 거기서 부족분을 채운다면.
그래서 발전하고 또 발전하기를 거듭한다면.
단번에 ‘마지막’까지 다다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왕에 ‘완성’을 노려보는 것도 네게 나쁘지는 않을 거야.”
그래서 미르카는 이참에 엘릭에게 폭염의 인장, 그 이상을 선물해줄 심산이었다.
하계(夏季).
자신을 본떠 만든 여름의 총체를 물려준다면?
그리고.
더 나아가 춘계(春季)까지 손에 넣을 수 있게 해준다면?
사계 중 삼계(三季)를 완성할 수 있다면, 시조가 바라던 경지에까지 금세 성큼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미르카는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안배, 그 이상의 안배를 발동시키기로.
엘릭이 원하던 대로 메르빙거에 숨겨진 ‘비밀’도 일부 알 수 있을 테니 불만은 없겠지?
그만큼 난이도가 급격하게 상승하겠지만.
“뭐, 잘못하면 뒈지기밖에 더 하겠어?”
호호호호!
미르카는 기분 좋게 웃으면서 엘릭이 안배 밖으로 튀어나오기를 기다렸다.
* * *
엘릭이 다시 눈을 번쩍 떴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번엔 어느 허름한 성의 성벽 위였다.
휘이이-
성벽 너머엔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었고, 안쪽으로는 몇 되지 않는 병사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나 같이 낡은 갑옷에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
저걸로 사람을 찌르면 제대로 찔리기나 할까.
절로 의문이 들 정도로 상태가 좋지 못했다.
“…젠장.”
엘릭은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이번에는 크게 고생할 필요 없이 꿀을 빨 수 있겠다 싶었건만.
아무래도 실패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더군다나.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용들로부터 살아남아라.
머리 한편에 남아있는 미르카의 메시지가 당최 무슨 소린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용에게서 살아남아?
‘용은… 메르빙거와 동맹이지 않았었나?’
의문은 금세 풀릴 수 있었다.
저 아래에 깔린 병사들의 생김새가 어쩐지 낯설지 않았던 것이다.
‘…전부 마족이잖아?’
병사들의 머리에 양쪽에 자리한 마족 특유의 뿔.
거기다 미약하게나마 마기가 풀풀 날리고 있었다.
너무 약해서 아주 잠깐 동안 감지하지 못했던 것.
엘릭은 본능적으로 메르빙거답게 놈들의 숨통을 끊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아니, 움직이려 했다.
“…?”
무심코 내린 시야에 그의 손이 들어왔다.
문제는 원래 알던 자신의 손이 아니라는 점.
그간 고생을 얼마나 한 건지, 척 보기에도 거칠고, 마디마디가 부르터 있었다.
전보다 크기도 크며 손가락 또한 굵어진 상태였다.
마법사의 손이 아닌 검사의 손이었다.
게다가 키도 커진 건지 평소보다 시야가 살짝 높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턱.
엘릭은 눈앞의 병사들과 비슷한 갑옷을 입고 있었다.
“….”
엘릭은 벙찐 표정으로 제 몸을 더듬었다.
낡은 갑옷이 쩔그럭거리며 소릴 냈다.
그러다 손을 천천히 올려 머리로 가져가자.
툭!
굵고 딱딱한 무언가가 만져졌다.
저들과 같은 마족의 뿔이었다.
“아니, 뭔…!”
엘릭은 어이가 없어 울컥하려는데, 갑자기 그의 눈앞에 반투명한 상태의 미르카가 나타났다.
다른 마족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지, 어떤 병사도 그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눈을 날카롭게 뜨며 그녀를 노려봤다.
“이게 대체 뭡니까?”
다른 존재도 아니고 마족에게 빙의시키다니.
하지만 미르카는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머금으면서 말할 뿐이었다.
[너도 이만하면 눈치채지 않았어? 용(龍)과 마(魔)는 거울과 같은 관계라는 거?]
“….”
엘릭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여기까지만 들어도, 그녀가 무슨 의도로 이런 일을 벌였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으니까.
용이 마이고, 마가 곧 용일지니.
직접 마족이 되어 마를 느끼고, 용을 상대하며 그들을 이해하여라.
[원래대로라면 용의 진영에 가담해서 이 마족들로부터 성을 빼앗는 게 안배의 임무였지만… 그러면서 인장을 깨닫는 게 목적이지만… 너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잖아?]
그래도 입장을 바꿔서 마족으로 안배를 수행하라니.
엘릭은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럼 좀 괜찮은 놈들로 안겨주던가!’
문제는 그가 보호해야 할 마족들의 상태가 영 좋지 않다는 점이었다.
젊은 마족은 몇 보이지 않고, 늙거나 어린아이가 대부분.
그마저도 대체 며칠을 굶은 건지 피골이 상접해서 홀쭉했다.
기력 하나 느껴지지 않는 모습.
과연 수성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브레스 몇 방 맞고 나면 죄다 박살 날 것 같은데?
성채도 여기저기 이가 다 빠져 남루하다는 게 문제였다.
필시 미르카가 일부러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게 분명했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마기도 제대로 다뤄보도록. 원래 몸과 다르게 마기를 아주 선명하게 감지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잠시만요! 난이도는 좀 조절해주고 갈…!”
[그럼 수고.]
“미르카? 미르카!”
엘릭이 손을 뻗어 붙잡아보려 했지만, 이미 미르카는 사라진 뒤였다.
“…아아아아악! 대체 뭘 어떻게 하라고오오오!”
엘릭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이래서는 그가 원래 바라던 목적과 멀어지게 된다.
그녀의 무덤을 찾은 건 감찰국으로부터 무덤을 되찾고 안배를 얻고자 함도 있었지만.
파괴적인 마법, 비행선과 관련된 마도 공학의 지식.
그리고 용을 다루는 드래곤 테이밍(Dragon Taming)을 배우기 위함이었으니.
새끼 용들을 얻었을 때부터 용들을 타고 다니는 상상을 해왔던 엘릭에게는 날벼락과 같은 상황이 아닐 수가 없었다.
물론, 이런다고 해서 이미 떠나버린 미르카가 되돌아올 리가 만무한 일.
“….”
엘릭은 한참 동안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어야만 했다.
그러던 그때.
“사, 사령관님! 큰일입니다!”
마족 병사 하나가 다급하게 이쪽을 향해 뛰어왔다.
엘릭은 ‘주위에 사령관이 있었나?’하는 생각으로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어딜 봐도 평범한 병사들만 그의 눈에 들어올 뿐.
마땅히 계급이 높아 보이는 마족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쿵!
자신 앞에서 소리가 날 정도로 무릎을 꿇는 병사를 보며 알 수 있었다.
“….”
엘릭, 그가 빙의한 마족이 이곳의 사령관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상황 파악을 마친 엘릭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면서 대답했다.
“무슨 일이지?”
이렇게 된 이상, 뭐 어쩌겠나.
열심히 해봐야지.
“동쪽에서 적들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적.
아마 용들이 나타난 모양이었다.
엘릭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수는 얼마나 되지?”
“세,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하늘이… 하늘이 놈들로 잔뜩 뒤덮여 있습니다!”
“….”
…대체 뭐가 얼마나 많기에?
저렇게 말하는 거지?
“망원경… 같은 거 있나?”
병사는 재빨리 품에서 망원경을 꺼내 바쳤고.
엘릭은 ‘제발, 제발 많지 마라. 이놈이 오버한 것이어야 한다’고 중얼거리면서 망원경을 눈에 갖다 댔다.
“…씨발.”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욕을 내뱉고 말았다.
저 멀리 날아오는 용의 수는 그냥 많은 게 아니었다.
아주, 아주아주아주 많았다!
족히 백여 마리는 넘는 듯한 숫자.
군단급이었다.
안배인 만큼 많아 봐야 열 마리 정도일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다 망해가는 성에서 저만한 놈들을 다 막으라고?
그냥 뒈지라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내가 대체 뭘 했다고…. 이만큼 고생하면 됐지. 뭘 또 더 고생하라는 거야….’
귀여운 후손을 위해서 좀 쉽거나 편한 안배를 주면 어디가 덧나나.
엘릭은 촉촉해지려는 두 눈을 겨우 삭히면서 주변을 훑었다.
상황 자체가 암담해서일까.
병사들의 얼굴엔 불안감이 가득했고, 몸이 잔뜩 움츠러든 상태였다.
적극적으로 싸워도 열세인 판에 병사들마저 저러니, 원.
아무래도.
이번 생은 그른 것 같지?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