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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357화 (356/405)

2부 97화

여름의 안배

지금껏 이런 취급을 받아본 적이나 있을까?

다른 사계들도, 심지어 시조조차 그녀를 이렇게 대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그들은 모두 그녀의 성격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처럼 눈앞에서 대놓고 무시를 당하니,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너무 화가 나면 화도 안 난다고 하던데.

현재 미르카의 상태가 딱 그랬다.

크릉?

오죽하면 용들이 이게 맞냐는 듯이 그녀를 돌아볼까.

분명 화는 나는데 머리는 차가워지는 기분.

“그럼 안 되지.”

여름은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엘릭과 율호왕에게 다가갔다.

그때까지도 둘은 서로의 멱살을 잡고 의미 없어 보이는 대화를 이어가는 중이었다.

“먼저 놔라.”

“형님 먼저.”

“아우 먼저.”

우웅!

그녀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전신을 감싼 붉은 기운이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피부가 저릿해져 올 정도의 살기.

엘릭과 율호왕의 시선이 동시에 그쪽으로 향했다.

“하! 벌벌 기어도 모자랄 판에, 감히 나를 앞에 두고 한눈을 팔아?”

“음?”

율호왕이 엘릭의 멱살을 슬며시 놓은 것은 그때였다.

그는 뚱한 표정으로 여름을 위아래로 훑으며 물었다.

“넌 또 뭐지?”

마치 지금까지 존재조차 몰랐다는 투.

“어이가 없군. 살다 살다 이렇게 개무시를 당하는 날이 올 줄이야.”

미르카는 헛웃음을 들이키며 율호왕을 노려봤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살기 어린 눈빛에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오히려 당당하다는 듯이 팔짱을 끼고 있었다.

“미안하군. 내가 약한 사람은 신경 쓰지 않아서 말이야. 있는 줄도 몰랐네?”

“그런 말을 듣는 것도 신선하고 말이지.”

쿠구구구!

미르카가 기운을 더욱 끌어올리자, 심상 세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화산이 터지기 직전의 전조 현상과도 같았다.

율호왕은 그런 그녀를 보며 짐짓 놀란 모습을 보였다.

“오, 제법인데? 하지만 딱 거기까지군.”

“그래 보이나?”

“너무나도. 꼬우면 덤비던가.”

율호왕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미르카가 입가에 냉소를 머금었다.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는데. 잘 됐네.”

미르카가 허공으로 손을 뻗더니 아무 것도 없는 공간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콰직!

하늘 한가운데에 구멍이 뚫리는가 싶더니.

콰지지직-

균열과 함께 그 너머로 드넓은 우주가 나타났다.

겉으로는 율호왕을 무시하는 척 했어도, 미르카는 그가 강하다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렇다면 아예 딴짓하지 못하도록 단번에 제압해야만 했다.

새카만 우주 사이로 불에 탄 운석이 잔뜩 나타났다.

* * *

‘유… 성? 저게 말이 돼?’

엘릭은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행성 바깥으로 의념을 전달해서 우주에 떠돌아다니는 운석을 강제로 끌어오는 대마법, 메테오 스트라이크(Meteor Strike).

저것을 실제로 해내는 사람은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었다.

두 개, 세 개… 다섯 개를 넘어간 뒤로는 헤아리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물론, 직경 수 킬로미터가 넘는, 꽂히는 것만으로도 행성 하나를 초토화시킬 수 있는 그런 대형 운석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족히 십여 미터는 되는 것들.

파괴력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그런데 율호왕은 그런 장엄한 광경을 보고도 오히려 좋아하고 있었다.

크와아아아앙!

율호왕은 맹수의 포효와 함께 하늘을 향해 튀어 올라갔다.

순간, 그가 집채만한 크기의 범으로 변한 것 같은 그런 착각이 들었다.

여름 비기

유성우(流星雨)

강체술 극의

호왕 강림

두 사람이 충돌을 일으키고.

콰콰콰콰-

격진이 심상 세계 전체를 뒤덮었다.

용호상박(龍虎相搏).

딱 그 말이 어울리는 장면이었다.

미르카는 신경질적으로 유성을 떨어뜨리다, 나아가서 용들까지 소환해 하늘에서 브레스를 뿜게 할 정도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황금사자가 안배를 강제로 열질 않나, 어느 순간 갑자기 나타난 율호왕과 함께 여름이 치고받질 않나.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다 싶었던 것이다.

아무리 정상적인 안배는 없었다고 하지만, 어째서인지 이번만큼은 평소보다 더 이상하게 일이 풀리는 것 같았다.

“…안배, 할 수 있겠지?”

그냥 미르카의 화가 가라앉을 때까지 자리를 피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그래도… 율호왕, 더 강해진 게 확실해.’

숀을 제외한 겨울 6장을 모두 차례로 이겼다더니.

여름과 저 정도로 맞수를 이루는 게 정말 대단한 거였다.

콰아아앙!

다시금 엘릭의 머리칼이 흔들릴 정도로 강한 충격이 일어났다.

머리 위로 작은 돌멩이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

에휴!

엘릭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 이대로 돌아가야 하나 싶던 바로 그때였다.

흠칫!

엘릭은 다른 쪽에서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시선을 느꼈다.

‘겨울 6장인가?’

지금 이곳에 나타날 수 있는 이들은 그들뿐이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돌려보니, 누군가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엘릭의 생각대로 그는 겨울 6장들만이 가지는 특유의 ‘한기’를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낯선 생김새였다.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머리를 하고서 낭인처럼 해진 옷을 입은 사내.

자유로운 듯 편하게 걸어오면서도 빈틈은 일절 보이지 않았다.

‘숀.’

하르간이 오토 한의 왼팔이었다면, 이 자는 오토 한의 오른팔이었다던가.

나하트람이 말했던 것처럼, 숀은 율호왕과 만났던 모양이었다.

“저 친구한테 네 얘기는 많이 들었다.”

한창 전투에 푹 빠져있는 율호왕을 보며 가깝다는 듯이 말하는 것을 보면.

“성격이 지랄 맞다고 하던데 직접 보니 사실인 것 같군.”

꿈틀!

엘릭의 한쪽 눈썹이 들썩였다.

“저를 직접 보시고 난 뒤에도 그런 생각이 드십니까?”

“무슨 뜻이지?”

“다른 메르빙거들과 다르게 저는 정상인이잖습니까.”

“….”

“…?”

엘릭은 숀의 걸음걸이가 뚝 멈추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저래?

뭔가 그를 살피기라도 하는 모습이었다.

“이럴 수가.”

“…?”

“뻔뻔한 낯짝까지 정말 메르빙거잖아.”

“….”

“오토 한 같은 새끼가 천 년이 지난 지금도 남아있다니.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한탄스럽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조금 짜증이 났다.

“저길 봐라.”

엘릭은 쀼루퉁한 표정이 되어 숀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다.

미르카가 한창 율호왕과 맞부딪치고 있었다.

“성질 하나는 메르빙거 중에서도 역대급이라 불리던 게 저 할망… 아니, 여름이다.”

지금 미르카한테 ‘할망구’라고 하려던 거 맞지?

하지만 숀은 언제 실수했냐는 듯이 뻔뻔한 낯짝으로 말을 잇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여름을 빡치게 만드는 게 여간 쉬운 일이 아니거든. 오토 한이나 가능했지. 그러고 보니 둘의 성격이 판박이인 거 같기도 하고….”

제 턱을 쓰다듬은 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엘릭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래서 시조의 안배가 너에게 전달된 건가?”

“….”

엘릭은 진지하게 생각했다.

‘때릴까?’

겨울 6장의 마지막 인물인 만큼 쉽게 맞아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화가 나는 건 사실이었다.

하필 사람을 절벽으로 밀어 넣던 오토 한과 자신을 비교한단 말인가!

“아무튼.”

엘릭은 그냥 화제를 원래대로 되돌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만나 뵙게 되어 다행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숀을 어떻게든 만나고 싶었거든요.”

“나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서겠지?”

엘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동계의 인장을 완성할 수 있으니까요.”

“좋다. 나도 어중이떠중이라면 도와줄 생각이 없었다만, 그래도 넌 최소한의 자격은 가진 것 같으니 들어주지. 그럼 여름과 나. 둘 중 누구의 시험부터 받겠나?”

엘릭은 숀이 자신을 인정해주었다는 사실이 내심 뿌듯하면서도 고민이 들었다.

엘릭의 눈에 자신만만하게 서 있는 숀과, 아직도 율호왕과 치고받는 미르카의 모습이 같이 보였다.

“누가 더 셉니까?”

“…뭐?”

“미르카와 당신. 둘 중에 누가 더 세냐구요.”

“….”

숀은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질문이었는지 잠시 벙찐 얼굴이 되고 말았다.

미간 사이로 골도 살짝 팼다.

“…개수작 부리지 마라.”

엘릭의 뻔뻔한(?) 낯짝을 보고도, 그 새카만 속내를 눈치채지 못하면 멍청이겠지.

기어코 싸움을 붙이고 말겠다는 속내.

“나이 먹을 대로 먹은 할망구보단 한 살이라도 파릇파릇한 내가 더 낫지, 무슨…!”

숀이 말을 마치기도 전이었다.

그의 머리 위로 유성 하나가 작렬했다.

콰아아앙!

불똥이 마구 튀기며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숀은 손에 들고 있던 검으로 유성을 가볍게 썰어버리고는 뿔난 얼굴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주변의 지형이 망가지고 열풍이 풀풀 날려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투.

“할망구, 그걸 그새 안 놓치고 들으셨네….”

혼잣말을 하듯이 중얼거렸지만, 누가 봐도 다 들으라는 투였다.

“뭐라고 새끼야? 뚫린 입이라고 뇌 안 거치고 함부로 지껄여?”

미르카는 허공에서 흉흉한 눈길로 이쪽을 노려보았다.

가뜩이나 그녀는 예정에도 없던 율호왕과의 격전으로 상태가 많이 남루해진 상황.

위엄 넘치는 모습으로 후손을 맞아도 모자랄 판국에 판이 다 깨져버리게 생겼으니 짜증이 최고조를 찍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숀까지 속을 박박 긁어대고 있었다.

하여간 오토 한과 그 수족들은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다!

“흐흐. 제가 뭐 틀린 말이라도 했습니까? 누. 님?”

“…오늘 진짜 무슨 날인가 보구나? 만나는 놈들마다 족족 다 혓바닥에 문제가 생기고. 이걸 싹 다 뽑아버릴 수도 없고.”

화르르륵!

미르카의 주변으로 불길이 넘실거렸다.

“짜증나는데 다들 일단 좀 밟히자. 그래야 정신을 차리지, 안 그래?”

심상 세계에 막대한 중력이 내려앉은 것처럼 심상 세계가 흔들렸다.

콰아아아-!

어느새 하늘에는 처음 소환했던 세 마리의 용뿐만 아니라, 수십 마리의 용들로 가득했다.

녀석들은 신호만 떨어지면 언제든 집단 하강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거기다 하늘에서는 더 많은 유성들이 나타나고.

쩍쩍 갈라진 지반에서는 유황 가스가 풀풀 날리면서 지옥도를 그려내고 있었으니.

“자, 누구부터 밟아줄까?”

미르카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아래에 있는 이들을 한 번씩 훑었다.

엘릭은 절대영도를 통해 주변의 온도를 낮추면서 슬쩍 뒤로 빠졌다.

‘어째… 최종 보스가 선조님이 되신 것 같은데.’

대사 하나하나부터 풍기는 분위기까지.

누가 딱 봐도 그렇지 않은가.

문제는.

“그래. 이래야 재미있어지지.”

“누님. 나이도 있으신데 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닙니까?”

율호왕과 숀도 따박따박 말대꾸를 하면서 절대 지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스걱!

저 먼 반대쪽에서부터. 비스듬하게 갈라진 황금색 공간 균열 사이로, 황금사자가 흉흉한 기세를 드러내며 나타났다.

‘…어떻게 저 사람이 안배에 들어올 수 있는 거지?’

저벅, 저벅…!

“아직, 안 끝났다.”

미르카와 율호왕, 숀에 황금사자까지.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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