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96화
여름의 안배
‘아이씨, 너무 세게 찔렀나? 엄청 아프네.’
엘릭은 입술을 꽉 깨물며 시리듯이 아려오는 통증을 꾹 참았다.
허벅지 뒤쪽이 얼얼했다.
슬픈 분위기를 내기 위해서 미르카가 잠시 한눈을 판 틈을 타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은 탓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화산 지대에 도착하기 전에 다른 겨울 6장들이 미르카의 성격에 대해 신신당부했었기 때문이었다.
-여름의 성격이 어떻냐고?
-어떻긴. 메르빙거지.
-계절. 여름. 더워. 짜증 나. 미르카도. 똑같아.
-때리는 것도 좋아하고.
-폭발도 아주 사랑하지.
-덤으로 좌우명이 그거였지, 아마?
-…뭔데요, 그 좌우명이라는 게?
안하무인.
폭력광.
언제라도 터질 수 있는 화산.
줄줄이 나오는 평가는 하나 같이 대단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최고는 마지막 좌우명이었다.
-‘나는 되고, 너는 안된다’ 였을걸?
-….
-그러니까 만나거든 개갤 생각하지 말고 알아서 기는 게 좋을 거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한 번 터지면 도통 감당할 수 없을 정도라고 했나?
오죽하면 시조조차도 그녀가 화를 내면 한 수 물려야 했을 정도로, 그녀의 성격은 예민했었다고.
‘핏줄을 생각하면 이해 안 되는 일도 아니긴 하지만.’
미르카는 메르빙거에 뒤늦게 합류한 자로, 실제 정체는 용신(龍神)의 피를 타고 난 엘더 로드(Elder Lord)였다.
즉, 모든 드래곤 중에서도 가장 높고 고귀한 존재 중 하나.
예전에 산악 부족의 바투가 용혈에 취해 폭주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녀의 성격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봄의 안배에 세 마리의 용을 키우라는 명령을 받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여름은 가문의 수호룡이기도 했으니까.
한데, 그런 그녀에게 꼬투리가 잡혀버린다면?
앞으로 안배를 겪는 내내 시달릴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안배를 받지 않는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미르카는 시조와의 계약으로 얽혀 있는 몸.
그렇기에 반드시 ‘약속된 후손’이라는 엘릭에게 어떻게든 안배를 시행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안하무인인 성격 탓에 그녀는 자신의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 걸 아주 격하게 싫어하는 편이었다.
‘당연히 황당할 수밖에 없겠지.’
심지어 이대로 엘릭이 떠나게 되면 미르카로서는 썩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감찰국과 사자공가가 시도 때도 없이 무덤에 헤집을 것이며.
그녀의 안식은 영영 방해 받을 수밖에 없다.
엘릭은 그동안 오토 한과 아르세우스에게 당할 대로 당한 상태.
더 이상 사계에게 끌려다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혼신의 눈물 연기를 시작한 것이다.
이러면 여름으로서는 미안하다며 그를 붙잡을 수밖에 없을 테니.
‘아니 그리고, 뭣보다 무덤이 열린 게 내 탓은 아니잖아!’
더군다나 내심 억울한 마음도 아주 컸다.
애당초 무덤의 위치에 대해서 뭐 하나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건 선조들이 아니었나.
감찰국으로부터 얻은 서류 더미가 아니었다면 여름의 무덤을 찾는 건 더 어려웠을 테지.
후손이 편한 꼴은 못 본다면서 여태 무덤도 꼭꼭 숨겨놨으면서.
이제 와서 이런 식으로 따지고 들다니.
엘릭은 이 억울함을 어떻게든 해소하고 싶었다.
“…다시 말해봐라. 지금 뭐 어쩐다고?”
미르카의 황당하다는 듯한 시선이 다시 돌아왔다.
‘집중하자, 집중!’
엘릭은 눈가를 살짝 훔치면서 나오지도 않는 코까지 훌쩍였다.
“돌아가겠습니다. 선조님의 말씀을 듣고 확신했습니다. 저에겐 자격이 없다고요.”
“뭐… 라…?”
미르카의 말꼬리가 살살 흐려졌다.
“전 메르빙거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식충이일 뿐입니다. 저 같은 놈이 안배를 받다니. 어림도 없는 일이지요.”
“….”
“그래도 이 엘릭 메르빙거, 메르빙거의 당대 가주로서 어떻게든 후손을 잘 키워 다시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때는 이런 못난 모습을 보여드리지 않을 것을 맹세 드립니다!”
이제는 아주 장엄한 각오까지 보이고 있었다.
미르카는 말문이 턱 하고 막혀 여전히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설마 이런 반응이 나올 거라고 예상이나 했을까.
자존심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메르빙거가 보이기 힘든 반응.
덕분에 이런 건 그녀도 전혀 상정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어린아이에게 살짝 장난쳤는데 갑자기 눈물을 쏟기 시작한 느낌이랄까?
그러다 이내 미르카는 눈매를 좁히며 수상하단 눈빛으로 엘릭을 노려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던 것이다.
‘이 새끼… 설마?’
흔들리지 않는 엘릭의 동공을 보면서 미르카는 확신할 수 있었다.
연기다.
자신이 딴 소리를 하지 못하게 얄팍한 수를 쓰고 있는 것이다!
‘이딴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까드드득!
하여간 뻔뻔한 낯짝도 메르빙거이긴 하지.
저절로 이가 갈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차라리 잘 됐다 싶기도 했다.
감히 자신과의 기 싸움에서 이기려 들다니.
‘내가 네놈의 머리 꼭대기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마!’
이런 놈들을 상대하는 데에는 방법이 따로 있었다.
섣불리 건드리면 안 된다.
그냥 막무가내로 밀어붙여야지.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지금은 미련이 없다는 듯이 뒤를 돌았지만.
따악!
갑자기 미르카가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났다.
엘릭은 걸음을 옮기다 말고 걸음을 우뚝 멈춰야만 했다.
“…저, 이건?”
갑자기 엘릭 앞으로 공간이 부서진다 싶더니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용 세 마리가 나타났다.
각각 골드, 레드, 블랙.
엘릭이 데리고 있는 새끼 용들이 다 자라면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싶은 모습.
크롸롸롸롸!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녀석들이 거대한 날개를 활짝 펼치며 포효했다.
그들에게서 풀풀 날리는 드래곤 피어.
엘릭의 살갗마저 따끔거릴 정도였다.
“가.”
“…이것들을 치워주셔야.”
“알아서 잘.”
“….”
미르카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들어올 때는 마음대로라도 나갈 때는 아니란다?”
엘릭은 그제야 뭔가 자신이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상황이 굴러간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자격이 없…!”
“자격이 있고 없고를 결정하는 건 심판인 나야. 네가 아니라.”
미르카가 팔짱을 꼈다. 순간, 그녀의 두 눈에 파충류를 닮은 세로 동공이 나타났다.
보는 것만으로도 몸을 움찔 떨게 만드는 드래곤 아이.
“그러니까 알아서 잘 가보려무나.”
“…!”
“뭐해? 어서 안 치우고.”
“…젠장!”
엘릭이 다급하게 움직였다.
세 용들이 일제히 브레스를 뿜어낸 것도 바로 그때였다.
콰르르르릉-
번쩍, 번쩍!
콰콰콰콰!
동계의 권능
절대영도
엘릭은 재빨리 동계의 인장을 있는 힘껏 쥐어짰다.
주변의 기온이 확 내려가면서 얼음 결정들이 나타나 수십 겹의 두꺼운 벽을 세웠다.
설마 이렇게 미르카가 막무가내로 자신을 안배로 끌어들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으니!
더군다나 저것들은 그저그런 숨결도 아닌 무려 미르카가 키우는 용들의 숨결.
당연히 위력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메피의 힘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으면 덜 부담됐을 텐데!’
이곳은 안배라 그런지 메피스토가 열어주었던 힘이 아예 남아 있지 않았다.
대신에 자신의 힘을 쓸 수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브레스를 막을 수 있을지는 모를 노릇.
그래도 이대로 끌려가면 위험하다.
엘릭은 이를 악물고 청춘의 인장에 담긴 힘도 바짝 끌어올렸다.
콰지직-
어쩐지. 심장 옆에 자리 잡은 마정석이 깨지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 * *
‘흥. 이러고도 네가 안 넘어오고 배기나 보자.’
미르카가 정말 엘릭을 안배에다 처박아버리려고 그러는 건 아니었다.
짜증은 짜증이고, 안배는 안배다.
그녀가 절대 그것들을 구분 짓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 기회에 자신의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는 것으로, 엘릭의 혼을 쏙 빼놓을 생각이었다.
‘날 아주 여왕으로 떠받들게 해주마.’
세상 모든 이들이 그러했다.
그녀의 힘을 보고 나면 알아서 고개를 숙이거나 충실한 신도가 되었다.
그러지 못한 사람은 딱 한 명.
시조뿐.
‘아니, 따지고 보면 두 명인가?’
엘릭보다도. 그리고 황금사자보다도 먼저 무덤에 다녀간 적이 있던…!
하지만 미르카의 생각은 오래 가지 못했다.
불덩이가 엘릭에게 작렬하려던 바로 그때.
무언가가 반대쪽 하늘에서부터 엄청난 속도로 날아와 단번에 브레스를 모두 날려버린 것이다.
흡사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콰아아앙!
세 개의 숨결이 통째로 부서지면서 사방으로 흩날렸다.
뿌옇게 일어난 흙먼지를 헤집으며 누군가가 나타났다.
‘누구지?’
뜻하지 않게 도움을 받은 엘릭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쩐지 실루엣이 익숙했으니까.
넓은 어깨와 방패처럼 두꺼운 등.
굵은 팔다리와 함께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그가 엘릭이 있는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야! 해도해도 이건 너무한 것 아니냐?”
“…어?”
여전히 상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쩐지 엘릭은 목소리만으로 그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확 하고 걷힌 흙먼지 자리.
사나운 눈을 한 사내가 엘릭을 잔뜩 노려봤다.
“율호왕!”
씨익!
엘릭과 눈이 마주치자 율호왕이 송곳니를 드러내 보였다.
그렇게 찾을 때는 코빼기조차 안 보이더니.
휴일란 때 이후로 처음 봐서일까.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수련을 했다더니.
간만에 보는 그에게선 전과는 다른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훨씬 더 정갈해지고 예리해진 기운.
황금사자라는 라이벌을 만나고 난 뒤로 깨달음이라도 얻은 모양이었다.
제국의 오랜 적이었다던 그가 한 층 더 강해질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친구의 성장에 뿌듯해하는 그때, 율호왕이 엘릭을 향해 걸어왔다.
포옹이라도 하려는 걸까.
엘릭은 괜히 시큰해지는 콧잔등을 긁으면서 그를 안아주기 위해 양팔을 펼치는데.
덥썩!
‘응…?’
율호왕이 대뜸 그의 멱살을 붙잡으며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황금사자가 나타났었잖아! 한데, 대체 왜 나를 부르지 않은 거야!”
“…그, 그게.”
“내가 그놈과의 승부를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면서! 정말 이러기냐!”
율호왕의 두 눈은 호승심과 분노, 그리고 아쉬움으로 아주 크게 활활 불타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엘릭은 짜게 식은 얼굴로 율호왕을 바라봤다.
어떨 때는 참 멋있으면서도, 또 어떨 때는 철이 없어 보이는 양반.
“안 부르긴. 제가 얼마나 찾았는지 아십니까? 듣지도 않고 애배배 거리셨던 게 대체 누군데!”
“뭐, 애배배? 애배배?”
“제가 틀린 말 했습니까!”
“난 정말 못 들었었다! 그런데 어떻게 대답을 해!”
“그러게 누가 사라지래요? 애당초 그러지만 않았으면 아주 실컷 맞붙었겠구만.”
“아니야,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이건 형제의 도리가 아니지.”
“도리는 무슨. 그 정도 했으면 도리는 다 지킨 거거든요? 멱살이나 놓으시죠?”
“너 같으면 놓고 싶을 거 같으냐? 재미는 너 혼자 다 봤는데 이렇게라도 좀 풀어야겠다.”
“아니, 세상사가 어디 다 족장님 뜻대로 되는 줄 아십니까? 떼쓰지 말고 놔요, 좀!”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보면서.
“….”
용 세 마리와 함께 잊힌 미르카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둘을 멍하니 바라봤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