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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355화 (354/405)

2부 95화

여름

여름(夏).

미르카 메르빙거.

가진 능력을 따진다면 시조와도 비견될 만한 대마법사였으며.

용들의 어머니이기도 했던 자.

그리고.

모든 불과 그와 관련된 열(熱)의 종주이기도 했다.

당연히 뇌전도 거기에 해당되는 바.

“…!”

뒤를 돌아본 황금사자의 눈이 저절로 커졌다.

본능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이곳은 여름의 안방이나 다름없는 장소. 그녀가 힘을 쓴다면 무사할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불가한 부분도 있었다.

저곳에 있는 여름은 어디까지나 환상에 불과하다.

일종의 사념체.

그런데도 현실에다 이렇게 물리적인 간섭까지 가능하다고…?

그녀가 생전에 얼마나 뛰어난 마법사였는지를 절실하게 깨달을 수 있는 대목이었다.

더구나 이곳은 엘릭까지 있는 상황.

황금사자는 서둘러 다시 엘릭의 목을 베기 위해 속도를 내려 했지만.

『그건 안 되지, 라인하르트. 저 애는 나랑 볼 일이 있는걸?』

여름이 손가락을 가볍게 까딱였다.

그러자.

콰아앙!

묘실의 천장에 구멍이 뚫리면서 그 아래로 용암이 와락 쏟아져 내렸다.

떨어진 곳은 정확하게 엘릭과 황금사자 사이.

장막으로 공간을 가르는 것처럼 엘릭과 황금사자는 널찍이 떨어졌다.

아무리 황금사자라고 해도 직접 용암에 휩쓸려서야 좋을 게 없는 바.

결국 그는 수하들과 함께 뒤로 널찍이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설마 내가 이 정도로 끝낼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지?』

여름 미르카가 지휘하듯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휘이이이-

그 순간, 용암이 그녀의 손짓에 따라 격류를 일으켰다.

소용돌이를 그리면서 굽이치는 용암의 흐름에 따라 아름답던 묘실이 단박에 박살나고 말았다.

“큽!”

“으윽…!”

대번에 엄청난 열기와 유황 가스가 가득 차오르며 숨을 쉬는 것조차 어려워지고 말았다.

넓은 무덤의 절반 이상을 채울 정도의 엄청난 양이었지만.

미르카는 익숙하다는 듯이 손짓만으로 전부를 다루는 중이었다.

그 때문에 상당수의 마법사들이 거기에 휩쓸리거나, 독기에 중독되어 쓰러지고 말았다.

콰아아, 콰아아아!

용암이 마구 일렁이며 사자들의 앞길을 계속해서 막았다.

그리고 그들을 한 곳에 몰아넣은 순간.

스윽.

미르카가 가볍게 검지를 아래에서 위로 올렸다.

쿠르르르르-

끓듯이 마구 부글거리던 용암에서 엄청난 범위와 높이를 자랑하는 해일이 일어나면서 그대로 황금사자와 무리들을 뒤덮었다.

“와….”

『…흥. 보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나는군.』

엘릭은 미르카를 중심으로 수없이 변화하는 결들을 보면서 감탄을 터뜨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마치 아름다운 선율을 자랑하는 합주곡을 보는 것 같았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끝 하나하나에 맞춰서 춤추고 노래하는 세계.

하나 같이 섬세하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 하나하나의 움직임 속에 웅혼한 힘이 깊게 담겨 있었다.

또 다른 지고의 경지가 바로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이미 메피스토와 동화를 이루면서 전지를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건만.

저것을 보고 있노라니 다시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미르카는 ‘여름’이라는 별칭으로만 불렸을 뿐, 가주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당대 가주였던 시조님은 대체 어떤 분이셨을까?

그리고 하나 더.

미르카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다른 사계들도 그녀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와 비슷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뜻이다.

대체 어떻게 이런 마법사들이 한두 명이 아니라 다섯이나 한 세대에 나타날 수 있는 건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될 지경이었다.

‘뭐, 그건 네 명의 대마왕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메피스토는 미르카의 등장이 영 못마땅하다는 표정이었다.

과거에 겪었던 여러 고난들이 떠오른 탓이겠지.

‘그런데… 황금사자를 라인하르트라고 불렀지?’

엘릭은 미르카와 황금사자를 번갈아 보면서 눈을 가늘게 좁혔다.

‘황금사자가 누군지 알고 있다고…? 대체 어떻게?’

문제는 황금사자 역시 미르카를 아주 잘 아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는 점이었다.

그녀를 노려보는 시선에 분노가 잔뜩 서려 있었으니까.

딸을 해친 범인인 엘릭을 향한 분노와는 전혀 다른 성질의 분노.

뭔가 말로 표현 못 할 ‘한(限)’ 같은 게 있어 보였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과거에도 지금에도, 끝까지 마음에 안 드는군.”

까드드득!

황금사자는 인상을 단단히 구기더니, 이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후웁!

그의 가슴이 기형적으로 부풀어 오르면서 입가에 응축된 마력이 선환(旋環)하며 모여들었다.

순간, 곁에 있던 수하들이 황급히 제 귀를 막았다.

황금사자 비전

사자후(獅子吼)

압축됐던 힘이 그의 목소리와 함께 단숨에 터져 나왔다.

마치 사자가 포효라도 하는 듯한 광경.

묘실이 거칠게 떨렸다.

동시에 용암의 해일도 단번에 부서진 채로 가라앉았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

설마 용암을 통째로 소멸시켜버릴 줄은 몰랐는지, 미르카의 눈썹이 가볍게 꿈틀거렸다.

『그래, 뭐. 겨우 이딴 걸로 널 잡으려고 했던 게 잘못된 거지. 어쩌겠어.』

하지만 금방 대수롭지 않게 여기곤 양손을 앞으로 뻗었다.

‘큰 거다!’

엘릭은 양 날개를 힘차게 펄럭이면서 허공으로 솟구쳤고.

『그럼 이건 어떨까?』

쿠구구구구!

그가 있던 자리로 더 많은 용암이 쏟아져 내렸다.

천장이 아예 무너지다시피 떨어지면서 묘실이 통째로 용암에 잠기고 말았다.

『하여간 무식하기는! 저년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

도망칠 수조차 없게 아예 그냥 통째로 담가버릴 셈인 것이다.

황금사자와 수하들은 어떻게든 용암의 접근을 막아보려 애썼지만, 그것을 통째로 치워버린다는 건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제, 젠장! 황금사자 님!”

“아아아악!”

어느새 용암이 그들을 통째로 집어삼키고 말았다.

수하들은 완전히 녹아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되어버렸고, 그나마 실력 좋은 기사들은 오러를 외부로 방출했지만… 얼마 버티지 못할 게 분명했다.

꼬르르륵-

그들이 모두 통째로 용암 아래로 침잠했다.

“감히…!”

그 순간, 황금사자가 어떻게든 빠져나오려 용암 밖으로 손을 번쩍 뻗었다.

열기로 달아오르고 있는 얼굴이 그의 분노를 잔뜩 드러냈다.

하지만.

『이제 그만 좀 쉬라니까?』

미르카가 코웃음을 치며 무언가를 누르듯 손가락을 내렸다.

콰르르르르!

그러자 용암이 다시금 그를 삼키며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거대한 소용돌이는 그조차도 어떻게 거스를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수압을 자랑했다.

“크윽…! 미르카! 미르카아아아!”

황금사자는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발버둥쳤지만.

미르카는 귀찮다는 듯이 더 큰 해일을 일으켜 그대로 그를 덮어버렸다.

그리고 잠시 뒤.

“….”

여름의 묘실과 함께 황금사자 일행이 통째로 사라지고 말았다.

* * *

‘그렇게 힘을 쓰면서도 이런 세밀한 조절이 가능하다고?’

엘릭은 속으로 적잖게 감탄하고 있었다.

보통 강한 마법일수록 제어하기가 영 까다로운 게 아니다.

위력이 거세면 그만큼 반동이 심할 텐데, 저렇게 압도적인 화력을 보이면서도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니.

하물며 지금 그녀의 상태가 실체가 아닌 허상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역시 여름인가.’

사계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마법을 자랑했다는 그녀.

사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자신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우리 둘이서 해야 할 이야기가 있는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미르카가 말을 걸어왔다.

어째서인지 싸늘한 그녀의 눈빛.

괜히 긴장하게 만드는 분위기였다.

엘릭이 고개를 끄덕이자, 순식간에 사방이 화염으로 뒤덮였다.

그러나 이내 완전히 사라졌을 때.

엘릭은 눈앞에 펼쳐진 무한한 우주를 볼 수 있었다.

여름의 안배로 들어온 것이다.

비단 같은 은하수가 아무것도 없는 어두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어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냈다.

엘릭이 감탄하며 주변을 살피는 그때.

바로 앞에서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그곳에는 붉은 머리칼을 가진 여름이 팔짱을 낀 채 신경질적인 눈매로 그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

“….”

긴 침묵이 이어졌다.

엘릭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여름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평상시 그의 성격이라면 농담이라도 던졌겠지만.

어째서인지 지금은 전혀 그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녀가 내뿜는 타고난 위압감 때문일지도.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드디어 미르카의 입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가 내 안식을 방해한 못난 후손이구나. 대체 밖에서 뭘 하고 자빠졌기에 딴 놈들에게 무덤을 뺏길 수 있는 거지?”

갑작스러운 호통.

엘릭은 괜히 여름에게 개겼다간 정말 큰일 날 것 같아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유구무언이었다. 후손으로서 선조의 무덤을 지키지 못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으니.

“죄송하다고 하기 전에 잘했어야지. 이럴 때마다 죄송하다고 말할 셈은 아니겠지?”

“….”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건 무능한 작자들이나 하는 짓이다. 메르빙거라면 응당 완벽해야 하는 법. 그런데 네가 지금 한 짓은 대체 뭐란 말이냐?”

말을 할수록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개나 소나 내 무덤으로 들어오는 꼴이라니. 그 때문에 내가 얼마나 짜증이 났는지 알아?”

걸고넘어질 것도 있겠다, 미르카는 아예 초장부터 엘릭의 기를 눌러버리려는 속셈이었다.

‘이렇게 해야 다루기 쉬워질 테니까.’

메르빙거는 메르빙거가 아주 잘 아는 법.

점점 숙여지는 엘릭을 보면서 아예 머리를 굴릴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더욱 확실하게 눌러둘 생각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그녀가 다시금 말을 뱉으려는 그때였다.

“죄송하다는 말로 해결이 될 것 같…!”

“그러니 돌아가겠습니다.”

엘릭이 도중에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런데 그녀로서도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뱉었다.

“…뭐?”

순간, 미르카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물들고.

엘릭은 애처로운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메피스토가 봤으면 분명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하여간 잔머리를 굴리는 기똥찬 솜씨는 역대 메르빙거 중에서도 최고라고.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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