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94화
여름
그러거나 말거나.
황금사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허리춤에서 칼을 빼 들고 그녀를 향해 가려는데.
콰아아아앙!
일순간 격진이 일어나며 묘실이 크게 흔들렸다.
한 번의 진동으로 주변에 잘 정리되어 있던 보물과 마도구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우우웅-!
진동이 너무 강한 탓에 마법진이 망가지고 말았다.
그 때문에 여름이 있는 블랙홀이 불안정하게 흔들리기 시작했으니.
자칫하면 기껏 열게 된 안배가 닫힐 수도 있는 상황.
쿠구구궁!
계속된 극진(劇震)에, 황금사자를 따라온 감사자는 물론 마법사들마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중이었다.
“어떻게 된…!”
“이런 건 계산에 없었…!”
혼란에 빠진 그들의 반응을 보면서.
황금사자는 곧바로 이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이 누군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이 섞였다.
짜증.
황금사자가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메르빙거어어어어어!”
* * *
화산에서 멈추지 않고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와 지금도 바닥에서 느껴지는 진동.
‘여름’의 무덤 앞에서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던 기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상관에게 물었다.
“도, 도망쳐야 하는 거 아닙니까?”
“도망은 무슨. 입 다물고 자리나 지켜. 언제 놈이 나타날지 모른다.”
“하지만…!”
“감찰국 마법사들이 당장 일이 벌어질 만한 화산 활동은 없다고 장담했다. 그러니 기다려라.”
그의 상관이 단호하게 답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 역시 불안감이 가득했다.
아무런 이상이 없을 것이라던 호언장담과는 다르게, 지금 분위기는 확실히 부하의 말대로 심상치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건 다른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
하나 같이 사색이 되어 흔들리는 눈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자리를 뜨지 않는 건 어디까지나 사자공가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었다.
그러던 그 순간.
콰아아앙!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화산이 폭발하고 있었다.
콰앙!
콰아앙!
그리고 그 여진과 함께 다른 화산들마저 덩달아 연쇄 폭발을 일으키기 시작했으니.
분화구에서 쉴 새 없이 뿜어지는 검은 연기.
갈라진 지면 사이로 솟구치는 용암.
그리고 계속 이어지는 여진까지.
모든 것이 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두려움을 부르는 장면이었다.
“피, 피해라!”
“다들 전열을 유지한 채로 자리에서 물러난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다들 제자리를 지켜!”
“하지만 1열에서는…!”
하나 같이 통일되지 않은 명령 탓에 기사와 검사들은 어쩌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말았다.
참모부가 전멸하면서 정확한 지시 전달이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잠깐의 방황은 지옥문을 여는 계기가 되고 말았으니.
단숨에 유황 가스를 동반한 용암과 바위들이 전부 포위망을 향해 쏟아졌다.
“젠장!”
기사와 검사들이 일제히 하늘에서 떨어지는 바위들을 향해 검기를 날렸다.
촤촤촤!
수백의 푸른 검기와 바위들이 허공에서 충돌하며 굉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재해를 막아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바위가 잘게 부서졌다고 해도, 결국 그 뒤엔 유성처럼 불길에 휩싸인 자잘한 바위들이 있었으니까.
쾅쾅쾅!
용암이 묻은 돌멩이가 비처럼 내리자, 삽시간에 산맥이 불바다로 변했다.
“으아아악!”
“살려줘!”
화염에 휩쓸리는 것은 물론, 낙석에 깔려 죽는 이들이 빠르게 늘어나고 말았다.
거기다 격진 때문에 중심조차 잡기 힘들었으니.
몇몇은 균열 아래로 떨어지기까지 했다.
포위망이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결국 사람들은 목숨을 지키기 위해 전부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들어올 때는 너희들 마음대로여도, 나갈 때는 아니란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엘릭이 곧바로 움직였다.
샤아아아아-
열풍이 불어닥치는 하늘 사이로 냉풍이 내려앉더니 얼음 화살이 도열했다.
쉬쉬쉬쉭-
푸푸푸푹!
도망치는 기사들의 머리통으로 얼음 화살이 거세게 내리꽂혔다.
“비켜라, 저건 내가 부순, 커헉!”
더 나아가, 하늘에 직접 뛰어올라 불덩이를 막으려던 간부의 뒤통수에 우박을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머리가 깨진 그는 허공에서 즉사한 채 추락했다.
그제야 엘릭이 그들 사이로 숨어들었다는 것을 깨달은 기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주변을 둘러봤다.
“어디냐 대체!”
하지만 앞에서는 화산의 잔해가 계속해서 몰려오는 중이었다.
정신없는 와중에 하르간의 장기를 발휘해 은신술 펼치는 엘릭을 찾을 수 있을 리가 만무한 일.
푹!
“크윽!”
그런 와중에도 기사들의 수는 빠르게 줄어가고 있었다.
* * *
‘아주 쉽구만, 쉬워.’
엘릭은 어렵지 않게 눈앞의 적을 죽이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놈에게 박힌 얼음송곳을 뽑자, 붉은 피가 솟구쳤다.
동시에 기사가 힘없이 쓰러지며 비탈길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콰콰콰쾅!
“이쪽에 지원을… 크아악!”
“대체 어디서 이딴 것들이…!”
거기다 휼과 용아병들이 그들을 상대하고 있으니.
적들의 상황은 더욱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내 흔적까지 남겼으니 나머지도 정신을 못 차리겠지.’
언제든 엘릭이 나타날 수 있다는 생각에, 아마 제대로 싸울 수가 없을 터.
그사이 엘릭은 심안이 가리키는 방향대로 빠르게 움직였다.
『음? 이쪽이 맞는 것이냐? 보기엔 무덤과 반대 방향인 것 같다만.』
메피스토는 엘릭이 향하는 방향을 보고는 물었다.
[조금 돌아가려고요. 아무리 이렇게 해도 포위망을 정면으로 뚫는 건 힘들어 보여서요.]
『그럼 이 짓거리는 왜 하는 것이냐?』
엘릭은 대답 대신 전방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간 메피스토는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리를 피워 놈들을 그쪽으로 몬 것이군.』
“맞아요.”
엘릭은 움직이는 방향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마법을 난사하고 있었다.
자신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전혀 알아보지 못하게.
더불어 자신이 움직이기 쉬운 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저들은 마지막까지 엘릭에게 농락을 당한 셈이었다.
탁!
그러다 도착하게 된 분화구.
우웅!
그 순간, 마도경식이 격하게 진동했다.
여름의 무덤이 여기에 있노라고 반응을 하는 것이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이거 들어가기가 너무 빡센데.’
처음 멀리서 황금사자를 발견했을 때만 해도 발 디딜 곳이 그럭저럭 있는 편이었는데.
지금은 발생하고 있는 폭발 때문인지 대부분이 용암에 잠긴 상태였다.
‘어디냐.’
엘릭은 심안을 통해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언뜻 보기엔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곳. 하지만 시커먼 유황 가스 너머로 숨겨진 문이 눈에 들어왔다.
‘찾았다!’
누군가 인위적으로 막아둔 입구.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여름의 묘실로 향하는 문이 강제로 개방되어 있다는 것을.
주변에 잔잔하게 퍼져 나가는 여름의 힘이 너무나 불규칙했다.
마치 성이라도 단단히 난 것처럼.
『여름, 여름이라!』
메피스토가 과거를 회상하며 뭐라고 중얼거리는 동안.
쐐애애액-
엘릭은 망설임 없이 입구를 향해 몸을 날렸다.
보석들이 가득한 통로를 빠르게 주파하고 얼마 있지 않아 묘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먼저 엘릭의 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블랙홀이 보였다.
흐릿하게나마 여름의 모습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안배를 강제로 열려다 실패한 모양.
아니나 다를까.
그 아래엔 황금사자가 잔뜩 분노한 표정을 한 채 수하들과 함께 있었다.
“메르빙거어어!”
그는 엘릭을 보자마자 눈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그동안 참아왔던 격노를 처음으로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엘릭은 그런 녀석에게 차갑게 웃어 보이면서 얼음창을 오른손에 꽉 쥐었다.
서로 대치하고 있는 두 사람.
먼저 움직인 것은 황금사자였다.
화아악!
그는 단번에 엘릭을 죽일 기세로 전력을 다해 검기를 날렸다.
금빛 검기가 허공을 찢으며 그대로 엘릭에게 쇄도했다.
바라만 보고 있어도 전신이 갈가리 찢길 것만 같은 압도적인 위력.
엘릭은 몸을 비틀어 가까스로 검기를 피했다.
콰르르릉-
검기는 그대로 통로를 향해 날아가 출구를 완전히 지워버렸다.
퇴로가 사라진 셈이지만, 그곳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황금사자가 계속해서 검기를 날린 탓이었다.
촤촤촤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검기가 엘릭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평소라면 피하는 것조차 어려웠을 테지만.
메피스토의 힘 일부를 빌린 지금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으니.
완벽하진 않아도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터였다.
파지직!
엘릭의 한쪽 날개를 덮고 있던 마기가 메피스토의 것으로 바뀌었다.
마기의 색이 더욱더 짙어졌다.
칠흑(漆黑).
마치 새벽 밤하늘의 색깔을 고스란히 그곳에다 담아둔 것 같았다.
동시에 인장 속에 그려진 늑대가 직접 나타나기라도 한 것처럼 거친 공기가 흘렀다.
엘릭의 눈에 맺힌 심안도 조금씩 검게 물들기 시작했으니.
팟! 파바밧!
힘찬 날갯짓과 함께 엘릭이 곡예와도 같은 비행을 펼쳤다.
앞뒤 가리지 않고 자유롭게 움직이며.
엄청난 속도에도 부드럽게 방향을 틀었다.
딱 필요한 만큼.
최소한의 동선으로 아슬아슬하게 검기를 피했다.
그 탓에 계속해서 몸에 새겨지는 잔상처가 계속 늘어났지만, 엘릭은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조금이라도 한눈을 판다면 그대로 몸이 반으로 갈라질 수 있는 아슬아슬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
그런 엘릭을 보며 황금사자의 표정도 덩달아 굳고 말았다.
비록 엘릭이 반격조차 하지 못하고 피하는 데 급급하다고는 하나.
자타공인 대륙 최강인 그의 공격을 피하고 있는 것이었으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엘릭에게서 풍기는 격(格)은 이전에 보았던 엘릭의 것이 절대 아니었다.
시선도 마찬가지.
저것은 궁지에 내몰린 약자의 눈이 아니었다.
기회를 포착하려는 사냥꾼의 눈.
사냥이라니!
감히 다름 아닌 자신을 앞에다 두고…!
파지지지직!
황금사자의 검에서 엄청난 양의 뇌전이 응집되고.
콰르르르릉-
힘차게 내리긋는 검격에 따라 뇌전이 엘릭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분화구가 만들어내는 열기를 모두 찢어발길 정도로 엄청난 뇌전이 휘몰아쳤지만.
엘릭은 그것을 전혀 걱정하지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웃기까지 했다.
“보셨으면 좀 도와주시죠, 선조님?”
바로 그 순간.
파아아앗!
마도경식이 화려하게 빛났다.
정확하게는 좌측에 박힌 붉은 루비가 요요한 빛을 발휘했으니.
거기서부터 뿌려진 빛줄기가 블랙홀에 다다랐고.
안쪽에서부터 어이없어 하는 여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처음 보는 선조에게 하는 첫 마디가 도움 요청이라니. 그러고도 네가 메르빙거라 할 수 있느냐?』
엘릭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투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써먹을 수 있는 건 다 써먹는다. 그래야 메르빙거죠.”
『그것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닌 듯하군.』
그 외침과 함께.
활짝 열린 블랙홀에서부터 ‘여름’이 이쪽을 향해 손길을 뻗었다.
그 순간.
퍼퍼퍼퍼펑-
엘릭의 머리 위로 떨어지던 낙뢰가 찢겨져 사라졌다.
너무나 허망하게.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