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93화
여름
엘릭이 보석의 숲에서 알아낸 사실이 있다면.
새끼 용들이 모두 저마다 특별한 능력을 각성했다는 사실이었다.
-너… 뭐하냐?
그중 대표적인 게 바로 골드 드래곤 용일.
녀석은 보석나무의 바로 아래에서 배를 까고 누워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열매가 알아서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는 건가 싶어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지켜보는데.
보석이 정말 녀석의 입으로 알아서 떨어지는 게 아닌가.
심지어 각도도 정확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우연인 건가 싶었지만, 그 뒤에 떨어진 열매들도 똑같았다.
그 순간, 엘릭은 알 수 있었다.
용일의 게으름이 새로운 능력을 각성시켰다는 것을.
염동력.
지금 생각해도 참 어이가 없었다.
설마 보석을 그렇게 먹을 줄 누가 알았을까.
하지만 용들이 각 종류마다 독특한 이능(異能)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학계에도 널리 알려져 있는 바.
그래서 용이(레드)와 용삼(블랙)도 혹시 이능을 각성할까 싶어 가만히 지켜보았고.
얼마 가지 않아 두 녀석이 각각 불의 원소를 다루고, 물을 독으로 만드는 능력을 각성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특히 그중에서 용이가 대박이었지.’
용이는 지하에 흐르는 용암의 위치와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할 정도였다.
아니, 조금 더 집중을 한다면, 흐름을 일부 조작하는 것까지 가능했다.
아직은 용암의 큰 흐름까지 바꾸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영향을 끼치는 것은 가능했으니.
“으흐흐흐!”
『…너처럼 사악하게 웃는 게 아주 찰떡인 사람도 잘 없을 것이다.』
“예. 칭찬 감사하고요.”
엘릭은 이미 자신이 지나온 길목 곳곳에다 용일과 함께 염동력으로 마나 시드(Mana Seed)를 심어둔 상태.
마나 시드는 마력을 순수하게 응집시킨 구체로, 감지만 가능하다면 언제든지 폭발이 가능한 일종의 기폭제였다.
만약 마나 시드가 순차적으로 용암지대를 따라 폭발한다면?
거기다 추가로 용이가 흐름을 마음대로 조작하고.
용삼이 독성을 강화시킬 수만 있다면…!
‘아주 죽여 주는 불꽃놀이를 할 수 있겠지.’
이미 션과 타샤는 그의 신호에 따라 산맥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상태.
불꽃놀이는 아주 화려할 것이다.
그리고 계속 그의 앞을 가로막는 것들을 깡그리 밀어버릴 것이다.
사자공가의 전력 중 상당수가 이곳으로 끌려온 것 같으니 치명타를 먹일 수도 있다.
이를 테면, 일석이조.
실실 웃고 있는 엘릭을 보면서 메피스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리 봐도 본왕의 자리는 이 녀석의 것인 게 분명한데 말이야.』
* * *
준비도 전부 마쳤겠다.
엘릭은 본격적인 불꽃놀이를 시작하기 위해서 청춘의 인장을 발동했다.
초록빛 기운이 흐릿하게 전신을 뒤덮으며, 마력 재생의 효과가 극대화됐다.
그러기 무섭게 엘릭은 그 힘을 용일이에게 주입했다.
곧 터뜨릴 마나 시드의 위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기 위한 과정.
순간, 다량의 마나가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살짝 현기증까지 날 정도였지만 큰 무리가 생길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끼유유!
엘릭과 용일의 눈이 마주쳤다.
재미있어하는 용일의 사념이 한껏 전해졌다.
눈도 아주 반짝이고 있었다.
보석의 숲에 들어갔을 때처럼.
『아무래도 이 녀석, 깽판을 치는 것에 맛 들인 모양인데. 아아… 대마왕인 내가 용종들의 장래를 걱정하게 될 줄이야.』
엘릭은 메피스토의 근심을 뒤로 하고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용일이 마나 시드를 형성하던 염동력을 폭발시켰다.
퐁.
포포포퐁.
마치 비눗방울이 터지는 것 같은 아주 미약한 소리.
심지어 지하에서 들린 소리라 감각이 예민하지 않다면 듣지도 못할 만큼 아주 작았다.
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쿠쿠쿠쿠-
지진이 시작된 것이다.
아직 사자공가의 기사와 검사들은 이 사태를 눈치채지 못한 상태였다.
“음?”
“왜 그러지?”
“무슨 소리 듣지 못했나? 뭔가 기포 같은 게 터진 것 같았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환청이라도 들리나? 집중하게. 엘릭 메르빙거가 언제 여기로 닥칠지 몰라. 참모부도 모두 박살이 난 마당에.”
“…알았네. 주의하지.”
휴크란 화산지대 자체가 워낙에 다양한 화산들의 활동으로 여진이 잦으니 그중 하나로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안일함이 그들의 운명을 가르고 말았다.
곧 자극을 받은 용암이 위로 꿈틀대기 시작했다.
쩌저저적-
균형을 잡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격진이 산자락을 뒤흔들었다.
“어, 어어어?”
“무슨…!”
“화산이 터질 거라는 경고는 듣지 못했었는데!”
“지맥탐술사! 탐술사를 불러와, 어서!”
땅의 움직임을 읽는다는 이들을 다급하게 불렀지만.
콰콰콰콰!
이미 갈라진 지반에서는 시뻘건 용암이 분출되기 시작한 직후였다.
유황가스가 풀풀 날리면서 엄청난 열풍도 같이 불어 닥쳤다.
용이가 나선 것은 바로 그때였다.
드높은 상공 위.
녀석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눈을 한 채로 허공에다 길게 포효를 질렀다.
크아아아앙-
마치 새끼 사자가 울음을 토하듯이 귀엽기만한 소리였지만, 용암의 흐름에 자극을 주기엔 충분했다.
쿠구구구구-!
그 덕에 활화산들은 당장이라도 폭발하려는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휴화산들도 마찬가지.
강한 힘에 자극받고,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켤 기세였다.
엘릭은 단숨에 종말이 온 것만 같은 분위기를 보곤 만족스럽게 씨익 미소 지었다.
그리곤 전방에 팔을 쭉 뻗으며 외쳤다.
“잘한다 우리 용이! 한 번 더 전방을 향해 힘찬 함성 발사!”
끼유우우우우-!
엘릭의 성원에 힘입은 용이가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웃으며 다시금 울음소리를 냈다.
거센 진동과 함께 용암이 크게 넘실거렸고.
콰아아앙!!
콰과, 콰아앙!!
산맥의 지휘관이라도 된 것처럼. 엘릭의 손짓에 화산 두어 개가 굉음을 터뜨리며 하늘로 용암을 토해냈다.
“하하하하! 터지고 터져라!”
끼유, 끼유우우!
신난 듯이 외치는 엘릭과 용이.
화산 몇 개가 추가로 터지며, 하늘이 화산재로 검게 물들었다.
끼유, 끼유유!
용삼이 자신도 끼게 해달라며 엘릭의 소맷자락을 애처롭게 잡아당겼다.
다른 형제들과 같이 어울리고 싶다는 눈망울.
엘릭의 승낙이 떨어지자, 녀석도 형제들과 함께 합창에 참여했다.
독성이 짙어지면서 용암이 한껏 더 끈적끈적해지고, 하늘을 덮은 가스는 검게 물들고 말았다.
『…종말이로고.』
메피스토는 말문이 턱 막힌 채로 뒷짐을 쥐었다.
아무래도 인생, 아니, 마왕생에 있어 자신이 저지른 가장 큰 죄가 있다면.
조금 전 엘릭에게 자신의 힘을 일부 개방해준 게 아니었을까….
콰아아앙!
즐거워 보이는 엘릭과 새끼 용들과는 다르게.
저 아래에서는 빨갛고 검은 무언가가 온통 지옥도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 * *
쿠궁-
분화구에선 시도 때도 없이 낮은 진동과 함께 사람 키만 한 높이의 용암이 마구 솟구치는 중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할 정도의 활력.
심지어 검은 연기도 계속 뿜어져 나와 우중충한 분위기를 형성했다.
“….”
하지만 황금사자는 위태로운 환경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주군, 조금만 천천히 가주십시오. 그렇게 빨리 가시면 저희들이 길을 안내해드리기 어렵습니다!”
감사자 제오는 황금사자의 뒤를 허겁지겁 쫓으면서 소리쳤다.
훅 가문의 반트가 네임리스에게 사망한 이후, 새롭게 감사자가 된 그는 바하무트가 사망한 뒤로 사실상 황금사자의 오른팔 노릇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황금사자를 호종하기란 도무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때때로 용암 위도 아무렇지 않게 걸어 다니는 그의 뒤를 쫓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이나 안내원들 모두 어딜 가든 내로라할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런 막대한 자연의 힘 앞에서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할지니.
만약 여기서 갑자기 바닥이 꺼져 용암에 집어 삼켜지기라도 한다면?
딱히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같이 가자고 부탁을 드렸지만.
황금사자는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발걸음을 재촉하는 중이었다.
“허억, 헉! 이, 이곳입니까?”
그러다 갑자기 황금사자의 걸음이 갑자기 멈췄다.
분화구 벽면에 위치한 숨겨진 통로.
원래는 마법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사자공가와 감찰국에서 오래 전에 해제해두었던 장소였다.
“이것이… 메르빙거 가의 무덤…? 허!”
이런 분화구에 위치한 탓에 별다른 기대도 없던 제오는 통로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탄성을 내뱉고 말았다.
다른 호종 기사들도 마찬가지.
안내원들도 익숙한 광경이었지만, 매번 감탄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래로 향하는 통로는 일반 왕가의 무덤처럼 온갖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어 걸을 때마다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였다.
그 아래에 그려진 벽화는 이 무덤의 주인이 얼마나 용맹한지를 말해주려는 갖가지 신화를 담아내고 있었으니.
몇 개의 방과 계단을 한참 지난 뒤에야 드러난 묘실은.
“…!”
“…!”
“…!”
감탄의 수준을 넘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충격을 가져다주고 말았다.
화려한 내벽과 엄청난 양의 부장품.
금방이라도 저 안쪽에서부터 이 무덤의 주인이 걸어 나올 것 같은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말로만 전해지던 신화시대의 물건들이 이렇게나 많이 발견되다니….”
“이건 학계에서도 놀랄 만한 발견입니다.”
“여기에 수록된 책자들은 모두 실전된 고대 마법인 것 같습니다.”
“마도공학과 관련된 자료들도 보이고요.”
더 놀라운 것은 단순히 양만 많은 게 아니라 그 질에도 차이가 있다는 것.
생전에 이 무덤의 주인, ‘여름’이 얼마나 화려한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제오는 탐욕이 가득한 얼굴이 되어 벽에 걸려 있던 보석을 하나 집어 이리저리 살폈다.
“음?”
그러던 중 가만히 서 있던 황금사자가 눈에 들어왔다.
황금사자는 묘실의 안쪽에 공손히 놓인 석관 앞에 서 있었다.
그 위.
‘여름’의 초상화로 보이는 거대한 그림이 놓여 있었다.
“….”
확실히 초상화 속 얼굴은 아름답게 생긴 얼굴이었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무덤만큼이나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황금사자가 그런 미모에 홀린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언뜻 드러난 감정은 분명히….
‘그리움?’
마치 오래 전에 헤어진 연인을, 혹은 가족을 본 듯한 모습.
황금사자가 저런 모습을 보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제오도 적잖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주군과 메르빙거 간에 혹 무슨 관련이 있어서…?’
사실 팔사자 사이에는 그런 말이 암암리에 돌기도 했다.
신경을 쓰듯 안 쓰듯 하면서도 메르빙거의 움직임에 항상 귀를 기울이시던 황금사자의 모습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금색 머리와 녹색 눈. 세계를 샅샅이 뒤져도 그런 독특한 외양적 특징을 가진 이들이 몇이나 될까.
그런데도 황금사자는 그런 외양을 갖고 있었다.
검술의 대가라는 더 강한 특징 때문에 그동안 의문이 묻혔을 뿐.
그런데 여기서 또 저런 모습을 보이니 자연스레 의문이 생길 수밖에.
그때, 황금사자가 상념을 떨쳐내듯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서 자신의 머리를 세게 털었다.
그러면서 곁에 있던 안내원에게 물었다.
감찰국에서 붙여준 마법사였다.
“여름의 안배는 언제 열릴 예정이지?”
안배는 사자공가와 감찰국이 필사적으로 엘릭을 막고자 한 이유였다.
이곳에 있는 마법 서적들은 거의 분석이 끝났지만,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안배가 없으면 그 방대한 지식은 찌꺼기에 불과했으니까.
그렇기에 엘릭이 안배를 얻기 전에 그들의 가로챌 속셈이었다.
“묘실에 구성되어 있던 마법 해석이 거의 완료되었습니다. 구동만 시도하면 됩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흠.”
황금사자가 팔짱을 낀 채 손가락으로 팔을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평소와 다르게 조급해하는 모습.
마법사는 그런 그의 모습이 의아했으나, 얼마 전에 죽은 시로를 떠올리곤 납득했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은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로울 테니.
한편으론 괴물 같던 황금사자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이.
우우우우웅!
마침내 무덤의 마법진들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부터 나온 빛줄기가 정확히 석관 바로 위에 모여들더니, 이내 거대한 블랙홀을 만들어냈다.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심연으로 빠져들 것만 같은 짙은 어둠.
얼마 있지 않아 블랙홀 너머로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용들이 원을 그리며 하늘을 가득 메우는 광활한 풍경이 펼쳐졌다.
그 중심엔 초상화와 같은 얼굴을 한 여인이 대지 위에 우뚝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다 여인은 무언가를 감지했는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살짝 굳어진 얼굴.
“…미르카 메르빙거.”
황금사자가 알 수 없는 이름을 중얼거리면서 천천히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여름이라 짐작되는 여인은 그를 보며 예상치 못했다는 투로 물었다.
『어느 건방진 놈이 내 영면을 방해하나 싶었는데. 설마 라인하르트, 너냐?』
“…!”
“…!”
그녀의 말로 주변에 있던 모든 이들의 눈이 커지고 말았다.
지금껏 알려진 사실에 따르면 여름은 대략 천 년 전의 인물.
그런 그녀가 황금사자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역시 미르카, 당신이로군.”
황금사자의 녹색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