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92화
여름
런치 컨트롤을 사용하고 있던 엘릭의 몸에도 서서히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날개는 물론, 정확히 신체의 오른쪽 부분 전체가 마기에 검게 물들기 시작한 것이다.
왼쪽엔 신성력, 오른쪽엔 마기.
-반신반마(半神半魔).
절대 탄생할 수 없을 것 같은 존재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
쿵쿵쿵쿵쿵-!
전신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심장이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격하게 뛰었다.
마치 지상을 하늘에서 굽어다 보는 신과 같은 시점. 모든 것이 자신의 손바닥 안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았다.
‘이전에 느꼈던 빙의보다 더 생생하다.’
그런데도 놀라운 점.
이것이 메피스토가 가진 힘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
그러니 더욱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괜히 메피스토가 자신의 힘을 사용하기엔 이르다고 말한 게 아닌 셈.
『지금 네가 온전히 본왕의 힘을 수용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봄’이 남긴 유산 때문이니. 절대 이 이상 무리하지 마라. 그 순간, 너는 붕괴를 면치 못한다.』
엘릭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메피의 말이 사실이었다.
지금까지 포위망을 뚫을 수 있었던 것도 전부 청춘의 인장이 육체를 지탱해준 덕분이었으니.
가뜩이나 한계점을 겨우겨우 버티고 있는 마당에 더 무리를 한다?
자살 행위나 다름없을 것이다.
하지만 엘릭은 매번 스스로를 무리한 영역으로 밀어붙였던바.
메피스토도 그것을 잘 알기 때문에 이렇게 신신당부를 하는 것일 터였다.
『힘에 휘둘리지 마라. 잡아먹히지도 마라. 그 순간, ‘너’라는 존재는 사라진다.』
엘릭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었다.
메피스토의 힘은 전설 속 악마가 속삭인다는 유혹처럼 달콤했다.
그냥 편하게 누워버리고 싶을 만큼.
『침착해라. 천천히 힘을 받아들이고 익숙해져라. 너를 놓지 마라.』
메피스토가 인도하는 대로.
후우우-
엘릭은 길게 호흡을 고르면서 자신의 뇌리로 쏟아지는 막대한 정보량에 익숙해졌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그림들이 그려졌다.
-산맥 전체에 퍼져있는 적들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보였다’.
조금씩 그들의 포위망이 어떻게 구축돼 있는지도 ‘보였다’.
어느 쪽에 병력이 집중되어 있는지, 어디가 상대적으로 허술한지.
그 모든 것이 ‘보였다’.
그리고 덕분에 ‘알 수’ 있었다.
여름의 무덤으로 향하는 가장 빠른 길이 어디일지.
‘직진, 그리고 여기선 왼쪽으로 틀어서 기사 세 명을 잡고, 하늘로 날아서 분화구 하나를 넘은 다음…!’
그 길에는 적들이 어떻게 나설 것이고, 자신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까지 전부 보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놈들을 지나고 또 지나다 보면 한 화산의 분화구에 닿게 된다.
이 주변 산맥 중에서도 유독 홀로 떨어진 화산.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용암이 펄펄 끓고 있는 그곳에.
누군가가 분화구 안으로 진입을 시도하고 있었다.
엘릭에게도 익숙한 얼굴과 기세.
‘황금사자…!’
그는 화려한 금빛 갑주를 입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러던 그 순간.
휙!
황금사자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다 말고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의 눈은 정확하게 엘릭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나 먼 거리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딸자식을 잃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
엘릭의 시야가 돌아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날 정확히 봤어.’
엘릭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었다.
역시 대륙 최강자의 눈은 피할 수 없는 것일까.
하지만.
쿵쿵쿵쿵쿵-!
‘해볼 수 있어.’
엘릭은 웃었다.
‘다시 부딪쳐 볼 수 있다.’
지난 번처럼 더 이상 뒤를 보이고 도망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러니 지금 엘릭이 해야 할 것은 하나.
일점돌파(一點突破)!
포위망 중에서도 허술한 부분만을 노려 빠르게 돌파하려는 것이었다.
“메피, 고마워요.”
『흥! 이제야 본왕의 위대함을 알겠느냐? 이제야 알았다면 앞으로 이 몸을 진심으로 경배할…!』
“다른 건 모르겠고, 딱 한 가지는 알 것 같은데요?”
『음?』
“이 정도로 강하면 확실히 건방질 수밖에 없지. 암, 그렇고 말고.”
『…뭐 이 새꺄?』
엘릭은 발끈하는 메피스토를 무시하고 흑백의 날개를 활짝 펼치면서 다시 활강을 시도했다.
쐐애애액-
그가 지나간 자리로 희고 검은 깃털들이 날리다 사라졌다.
* * *
2차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던 기사들은 이미 난리가 난 상태였다.
무전 마도구에서 쉬지 않고 들리는 비명소리.
-아아악!
-사, 살려줘!
-이게 무슨…!
포위망을 진두지휘하고 있던 사자공가의 책사, 랑스터는 인상을 딱딱하게 굳혔다.
1차 포위망에 이어 사자공가에서 비밀리에 키우던 ‘은사자(隱獅子)’들이 전멸한 것도 놀라울 일인데, 2차 포위망까지 속수무책으로 뚫리고 있다고?
아니, 뚫리는 속도만 따진다면 이번이 더 빨랐다.
이게 정말 인간으로서 가당키나 한 체력과 마력 수준인 건지.
주군이신 황금사자나 가능한 영역이 아닐까 싶은 일을 일개 ‘인간’이 해내고 있었다!
“놈이 나타난 위치가 어디냐? 곧바로 지원을 보내도록 하겠다! 다시 묻는다. 놈이 나타난 위치가 어디…!”
하지만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그저 거친 노이즈만 들릴 뿐.
치지지직-
치지지지직-
“제기랄! 이래서야 어디로 병력을 배치해야 할지 알 수가 없잖아!”
랑스터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는 처음으로 다른 감정이 맺히기 시작했다.
두려움.
자신이 어떻게 제어할 수 없을 자연재해를 만났을 때에나 볼 수 있을 법한…!
-이곳은 2구역! 놈이 나타났…! 크아악!
-13구역에서 지원을 요청…! 컥!
-다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5구역! 5구역이다! 이쪽에…!
그 뒤로도 정신없이 이어지는 보고에, 랑스터는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가능한 일이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옆에 있던 다른 책사의 안색도 창백하긴 마찬가지.
아니, 두 사람만이 아니었다.
참모부에 있는 모두가 다 비슷한 반응이었다.
2구역과 5구역은 랑스터를 기준으로 전방에 위치해 있었고, 13구역은 비교적 후방에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상식적으로 절대 ‘동시다발’적으로 출몰이 가능할 수가 없었다.
가능하다면?
그건 인간이 아니었다.
신적인 존재였지.
-30구역…!
-허억, 허억, 놈이 17구역에…!
-22구역! 22구역에 놈이 있습니다!
“…설마 진짜로 이 넓은 포위망들을 전부 헤집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랑스터는 어떻게든 침착함을 되찾고자 했다.
아무리 엘릭이 포위망을 제 집 안방처럼 날뛰고 다닌다고 해도, 결국 노리는 바는 한 곳일 테니까.
‘무덤. 결국 녀석은 무덤으로 올 수밖에 없을 거다.’
애당초 그가 휴크란 화산 지대에 온 것도 자신들이 점령하고 있는 무덤에 오기 위해서였으니.
‘이렇게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니는 것도 전열을 혼란케 하기 위해서일 테고…. 그러다 빈틈이 생기면 곧바로 무덤까지 달리려 할 테지. 역시 놈은 용의주도한 성격이야.’
랑스터는 그동안 연구했던 엘릭 메르빙거가 보였던 행보들을 절대 잊지 않았다.
간계(奸計)에 능한 전사.
그것이야말로 랭스터가 내린 그에 대한 평가였으니.
엘릭 메르빙거는 마법사라고 한들, 마법사라기 보다는 책사이자 전사에 가까운 타입이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무덤으로 갈 것이다.
“아아, 내 말 들리나? 참모부에서 전한다.”
랑스터는 무전 마도구를 입에 갖다댔다.
“1구역부터 10구역에 있는 병력은 전부 무덤이 있는 곳으로 결집하라.”
-충!
-충!
짧은 대답과 함께 그들이 움직이며 만들어 낸 진동이, 랑스터가 있는 막사까지 느껴졌다.
‘어떻게든 끝내주마. 더 이상 네 맘대로 날뛰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랑스터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불규칙적으로 움직인다 한들, 적의 생각을 알고 있으면 당황할 것이 없다.
무덤으로 가는 길을 두텁게 틀어막았으니 녀석의 계획에도 차질이 생길 게 분명했다.
“자, 이제 어떻게 나올 거냐? 메르빙거.”
승리를 확신한 듯, 랑스터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나.
-21구역에 놈이 출몰…!
-이번엔 12구역입니다!
정신없는 무전은 도통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지금 엘릭이 나타난 장소는 무덤과 반대되는 방향이었다.
“뭐지…?”
랑스터는 무언가 이상하다 느끼곤 시종에게 지도를 가져오라 명령했다.
촤륵!
그는 지도를 받아들곤 앞에 있는 책상에 활짝 펼쳤다.
그리곤 손끝으로 엘릭이 나타났던 구역을 하나씩 짚어나갔다.
그리고.
슥, 슥-
“말도 안 되는…!”
진실을 깨달은 랑스터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설마 참모부의 위치를 알아내려고…!”
그리고 그 순간.
“이래서 눈치 빠른 애송이는 싫다니까.”
누군가의 목소리와 함께 그의 눈앞이 번쩍이며 머리가 뒤로 젖혀졌다.
퍼억!
그의 이마에 박힌 얼음 단검.
“…!”
랑스터는 허망한 눈빛으로 앞을 바라보다 그대로 힘없이 쓰러졌다.
엘릭은 그와 다른 시체들을 쓱 훑어보다가, 바람처럼 참모부를 빠져나갔다.
* * *
촤악!
어느새 새로운 참모부를 발견한 엘릭은 망설임 없이 그곳에 있던 놈들을 전멸시켰다.
‘이걸로 마지막인가?’
2차 포위망의 구석구석을 돌면서 책사들만 골라 사냥했다.
일종의 머리를 자르려는 것.
현재 이 산맥을 뒤덮고 있는 이들의 숫자만 수천이 넘어가니, 이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참모부의 역할이 필수적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넓게 분포한 기사들끼리 소통도 되지 않을뿐더러, 지휘 체계가 완전히 꼬여 버릴 수 있으니까.
엘릭이 노린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머리가 잘린 몸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법.
책사는 물론이고 지휘관으로 보이는 이들까지 싹 다 골라 죽였으니, 당분간 기사들의 움직임은 혼란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거기까진 좋다만. 이렇게 하면 무덤에 진입하기 더욱 어려워진 것 아니냐?』
메피스토가 우려하는 표정으로 화산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엘릭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그를 따라 움직였다.
엘릭이 무덤으로 움직인다는 인상을 준 탓에, 대부분의 포위망이 그쪽에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아, 저거요?”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괜찮아요. 일부러 저쪽으로 몰아넣은 거니까.”
『일부러?』
“네.”
엘릭은 고개를 끄덕이며 1차 포위망을 벗어났을 때를 떠올렸다.
검사들이 바닥에 검기를 날리자 용암이 솟구쳐 나왔었다.
“용암은 원래 지하에서 강을 이루며 흐르잖아요?”
그리고 적들이 모인 부근엔 다른 곳보다 더 많은 양의 용암이 흐르는 중일 테지.
『너, 설마…?』
메피스토도 그제야 엘릭의 노림수를 깨달은 듯 놀란 눈이 되고 말았고.
씨익!
엘릭은 대답 대신 사악한 미소를 지으면서 여름의 무덤 외에도 곳곳에 보이는 여러 화산을 훑어봤다.
그리곤 차갑게 눈을 빛내며 하늘을 올려봤다.
“용이, 대기해.”
끼유유유!
언제 왔는지 용이가 붉은 비늘을 반짝이며 하늘을 날고 있었다.
“아주 화려한 불꽃놀이를 할까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메피?”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