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91화
여름
동계의 권능
절대영도
쩌저적!
청갑옷이 놀란 눈을 한 채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 사이, 적갑옷의 검이 엘릭의 목을 노리고 휘둘러졌다.
쐐애액!
그는 고개를 숙여 어렵지 않게 공격을 피한 뒤, 곧바로 반격에 나서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아래에서부터 느껴지는 살기에 몸을 뒤로 젖혔다.
창끝이 엘릭의 턱 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쯧, 아쉽네.”
어느새 청갑옷이 얼음에서 벗어나 위로 창을 쳐올린 것이다.
녀석은 아깝다며 혀를 차면서도 공격을 연거푸 퍼부어댔다.
그 뒤 이어지는 정신없는 두 실험체의 연계 공격.
촤촤촤촤!
쉬쉬쉬쉭-
창을 피하면 검이 날아오고, 검을 피하면 창이 날아오기의 반복.
심지어 공격 하나하나가 치명적인 급소를 노리면서도, 갈피를 잡기 어려울 정도로 불규칙하게 들어오고 있었다.
엘릭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힘겹게 피하는 것뿐.
심지어 종종 떨어지는 낙뢰는 그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빈틈이 없을 정도로 양쪽에서 압박해오는 공격.
적갑옷의 검에 붉은 오러가 쓰인 것은 그때였다.
“끝이다.”
그는 비릿하게 웃으며 정갈한 자세로 검을 수직으로 그었다.
어설프긴 하지만, 황금사자가 보여줬던 자세와 굉장히 흡사했다.
스걱!
“…!”
신성력을 머금은 얼음창이 그대로 반으로 갈라졌다.
그러기 무섭게 적갑옷의 뒤에서 청갑옷이 창을 내지르며 모습을 드러냈다.
창끝에 오러를 덮은 채 벌처럼 날카롭게 쏘아지는 공격.
창은 정확하게 엘릭의 심장을 노리고 있었다.
얼음창은 부서져 맞받아칠 수도 없었고, 완벽한 타이밍에 찔러 들어와 미처 피할 틈도 없었다.
“【얼어붙어라】.”
엘릭은 언령과 함께 지면을 세게 밟았다.
콰아아앙!
얼음 가시가 방패처럼 튀어 오르면서 심장 부근을 막았다.
오직 한곳만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마력을 응집시킨 만큼, 척 보기에도 강도가 높아 보였다.
콰아아앙!
그곳을 중심으로 커다란 파동이 일어나 허공에 퍼졌다.
엘릭은 그 반동으로 멀찍이 날아가 땅에 처박혔다.
쾅, 콰르르르!
바닥에 긴 고랑을 남기며 쭉쭉 밀려나다가, 용암이 굳은 현무암 지반을 만나면서 겨우 멈출 수 있었다.
“젠장….”
후두둑!
욕지거리를 뱉으며 상체를 일으키자 흙과 바닥의 파편이 마구 쏟아졌다.
엘릭은 시선을 내려 가슴팍을 살폈다.
다행히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몸이 조금 많이 욱신거리는 것 빼고는.
그마저도 청춘의 인장 덕분에 빠르게 회복되는 중이었다.
“…더럽게 강하네.”
이대로 계속 싸웠다간 끝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언제 다시 포위망이 구축될지도 모르고.’
이들 두 실험체를 쓰러뜨린다고 해도, 포위망을 맞닥뜨리면 정말 큰일이었다.
‘방법을 만들어야 해, 방법을.’
처처척!
두 실험체가 다시 기세등등하게 엘릭 앞에 섰다.
“이 이상의 반항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어차피 가짜인 네가 우릴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을 테니.”
“….”
“너에 대한 악감정은 없다. 우린 그저 진정한 ‘기사’가 되고 싶을 뿐이니까.”
“기사?”
“설명해줘도 넌 모르겠지.”
적갑옷이 어딘지 모르게 씁쓸한 투로 말했다.
그 말을 끝으로 두 명의 실험체가 돌개바람을 그리며 달려들었다.
낄낄낄.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하는 듯 웃으며.
까드득!
엘릭은 이를 악문 채로 다시 얼음창을 소환해 손에 쥐었다.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면.’
츠츠츠-
엘릭이 마력을 다시 뽑아 올렸다. 마정석이 이대로 위험하다며 비명을 질러댔다.
그렇게 소환한 기운은 두 가지.
신성력과 마기.
마력회로가 다시 한 번 더 과열되었다.
‘만든다.’
모든 것은 은밀해야 한다.
저들이 절대 알아채지 못하게.
단번에 압도적인 파괴력을 보여야만 했다.
『너 설마?』
메피스토는 곧바로 엘릭이 무슨 짓을 벌이려는지 깨닫고 놀란 눈으로 물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잖아요? 그럼 좀 거하게 성대한 잔치를 보여줘야 하지 않겠어요?]
『…미쳤다, 미쳤다 말만 해댔지만. 정말 너는 미친 게 분명하다.』
메피스토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동안, 엘릭의 입가에 맺힌 냉소가 더욱더 짙어졌다.
지이이이잉!
얼음창에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처럼 밀집된 신성력과 마기.
두 개의 상반된 기운은 당장이라도 서로를 물리치려는 듯 반발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것을 억누르는 것도 상당히 힘에 부쳤다.
“죽어라, 메르빙거!”
“이만 너의 목을 내놓아다오.”
쐐애애액-
실험체들이 움직이는 순간.
“불꽃놀이, 좋아하나?”
엘릭은 반발하던 힘을 그대로 놓아버렸다.
그 순간.
화아아악!
뜨거운 열풍이 불어닥치고.
“…!”
“…!”
빛무리가 두 사람의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콰아아아앙!
엄청난 크기의 버섯구름이 하늘 위로 치솟았다.
* * *
흡사 화산 폭발이라도 일어나는 듯한 규모의 진동.
버섯구름 모양으로 피어오른 흙먼지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 엘릭이 폭발을 일으킨 장소엔 분화구처럼 깊은 구덩이가 만들어져 있었다.
“쿨럭, 쿨럭!”
전신에 먼지를 뒤집어 쓴 엘릭은 입을 가린 채 기침을 해댔다.
그럴 때마다 그의 몸에서 먼지가 우수수 떨어졌다.
위력이 상당했던 만큼, 시전자인 그 또한 어느 정도 피해를 입은 것이었다.
“이래서 웬만하면 쓰고 싶지 않았는데.”
신성력과 마기의 충돌.
상반된 힘인 만큼 가까이 있기만 해도 스파크가 일어날 정도로 서로에게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그런 힘을 강제로 눌러 엉키게 만들었으니 누르는 힘을 풀었을 때의 반발력 또한 상당할 수밖에.
곧바로 그 자리에서 몸을 보호하는 빙벽을 세워서 망정이지.
그마저도 하지 않았다면 어디 팔 하나가 날아갔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미친 놈이 따로 없군. 아무리 이론적으로 안다고 해도, 그 두 가지를 그딴 식으로…! 하아! 본왕이 정말 말을 말아야지.』
오죽하면 메피스토도 꼴통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댈까.
정작 이런 일을 저지른 엘릭은 어깨를 으쓱이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할 뿐이었다.
[살았으면 됐죠. 안 그랬으면 여기 누워있는 사람은 제가 됐을걸요?]
엘릭은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돌렸다.
두 실험체는 이미 넝마가 되어버린 상태였다.
입고 있던 갑주는 박살나고, 무기는 망가진 상태.
일어날 기미조차 없어 보였다.
“끄으으…!”
유일하게 적갑옷만이 두 동강 난 검을 지팡이 삼아 겨우 앉아있을 뿐.
하지만 녀석 역시 그리 멀쩡하지는 못했다.
허리 아래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으니까.
거칠게 숨을 쌔액쌔액 내쉬던 적갑옷이 쓴웃음을 지으며 힘겹게 몸을 뒤집었다.
그는 초점 없는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다 말했다.
“…우리는.”
-죽지 마, 너는.
폭발 속에서 청갑옷은 그를 보호하려다가 먼저 죽어버린 상태.
적갑옷은 녀석이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자신도 곧 뒈질 것 같은 상황이건만. 이렇게 아파죽겠는데, 자기 편하자고 먼저 뒈져버리다니.
실험실에 있을 때부터 그랬지만, 정말이지 자기밖에 모르는 나쁜 새끼였다.
나쁜… 새끼.
보고 싶은 새끼.
“우리는 정말 ‘인간’으로는 살 수 없는 운명인가 싶다.”
“….”
“지금까지… 쿨럭! 그게 가능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나마 우리가 인간적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아니었군.”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에는 공허한 감정만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엘릭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평범한 사람과 같은 삶을 살아오진 않았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아마 짐승처럼 훈련받고 도구처럼 쓰였겠지.
‘비행정에 있던 실험체들처럼.’
엘릭은 수인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유언 아닌 유언을 들어주었다.
“실험체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 기사로서… 인정을 받았으면 했는데…!”
쿨럭! 그의 입에서 시뻘건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걸… 못 하고 죽어서 너무 아쉽네.”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질 거 같은 얼굴.
어느새 그는 눈에 띌 정도로 몸을 떨고 있었다.
어쩌면.
이들이 바라던 ‘진짜 메르빙거’나 ‘황금사자의 제자’ 같은 것은 ‘인정’을 받기 위한 수단일지도 몰랐다.
한평생 도구로만 부려졌기에 받지 못했을 인정.
“너는 충분한 기사였다.”
“…!”
엘릭은 자세를 낮춰 검을 쥔 그의 손을 잡아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본 어떤 기사보다도.”
그러면서 엘릭은 적갑옷의 손을 그의 가슴에 올려주었다.
다시 그를 바라봤을 때, 그는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를 지은 채 숨이 끊겨 있었다.
빠득.
자리에서 일어난 엘릭은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실험체라고는 하나, 말하는 걸 보면 평범한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이들이다.
단순히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냐 아니냐의 차이가 있을 뿐.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감정은 다른 사람들의 것과 똑같았다.
실험체들 또한 다른 사람들처럼 인정받으며 살아가고 싶었을 터.
그런 이들의 희망을 미끼로, 입맛대로 만들어 자신의 수단을 위해 이용하는 황금사자와 감찰국.
자신이 그들과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그저 역겨울 뿐이었다.
“역시 용서할 수 없어.”
엘릭의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의 시선이 저 멀리 있는 또 다른 포위망으로 향했다.
당장이라도 적들을 향해 쳐들어갈 것만 같은 모습.
메피스토는 무표정한 얼굴로 엘릭을 바라보다 한마디 툭 던졌다.
『많이 지쳐 보이는데 괜찮겠느냐? 이제 겨우 1차 포위망을 뚫었을 뿐인데, 더 강한 자들이 가득한 2차, 3차 포위망은 어떻게 뚫을 셈이냐?』
“….”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의 말대로 여름의 무덤까지 가려면 더욱 밀도 있는 포위망을 뚫어야 했다.
그곳에 있는 적들은 1차 포위망에서 봤던 기사나 검사들보다 실력이 월등히 높을 테니까.
『그러니 차라리 여기선 뒤로 빠졌다가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게 어떨까 싶은데?』
“아뇨.”
『…?』
하지만 엘릭은 여기서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저들이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한 건, 아직 여름의 무덤 발굴이 덜 돼서 그런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아직 여름의 무덤에서 얻을 게 많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엘릭을 막는 것이다.
만일 그에게 여름의 유산을 뺏기게 되면, 감찰국과 사자공가는 그만큼을 잃게 되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자칫하면 그사이에 무덤 도굴이 끝날 수도 있어요.”
따라서 메피스토의 말대로 한 발 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죽을 수도 있는데도?』
“네.”
힘겹게 숨을 고르면서도 엘릭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메피스토는 그런 그의 모습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어쩔 수 없군. 네놈의 각오가 그러하다면 본왕이 조금 도와주마.』
“…무슨?”
엘릭이 그게 무슨 소리냐며 되묻는 순간, 갑자기 원죄의 인장이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
곧바로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은 엘릭의 눈이 커졌다.
철커덕-
무언가가 열리는 소리.
인장에서부터 메피스토의 마기가 줄줄 흘러나왔다.
그토록 그가 사용하고 싶어 하던 힘의 일부가 개방된 것이었다.
마기는 텅 비어버린 엘릭의 마정석과 마력회로를 채울 뿐 아니라, 신체 곳곳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인장이 지닌 힘의 ‘일부분’인데도 불구하고.
그 양은 압도적으로 많았다.
마치 거대한 해일을 눈앞에 두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대체…!’
엘릭이 지닌 마정석은 사실 샤이나크와 메피스토의 기운들이 뒤섞이며 만들어진 것.
그러니 원죄의 인장에는 남아있는 힘이 없어야 옳을 텐데.
대체 이런 건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쿵!
쿵쿵쿵쿵!
쿵쿵쿵쿵쿵쿵…!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동시에.
화아아악!
엘릭을 둘러싼 세계가 ‘넓게’ 확장되었다.
일전에 식인 늑대를 흡수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말 그대로 전지전능한 느낌.
‘이게 메피가 보는 시야…!’
지금 이 순간.
메피스토의 빙의(憑依)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