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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347화 (346/405)

2부 87화

여름의 무덤

끼유우우!

새끼 용들은 기분이 좋은지 허공에 작은 브레스를 마구 뿜어댔다.

그동안 엘릭은 심안을 활짝 열었다.

루비 안에 화 속성의 마나가 잔뜩 뭉쳐 있었다.

아니, 그냥 뭉친 정도가 아니었다.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 있는 것이 일종의 정(精)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다가 우연찮게 사념이 맺히게 되면?

그때는 정령(精靈)이 되는 것이다.

일종의 영물(靈物)이라고도 할 수 있는 셈.

‘좀 더 살펴봐야겠는데.’

엘릭은 이번에는 루비를 떼었던 나무를 살폈다.

나무 안쪽. 마나의 길이 흐르는 것이 보였다.

위로 쭉쭉 뻗은 나뭇가지는 물론, 바닥에 굳게 자리 잡고 있는 뿌리까지.

양분이 흐르는 길을 따라 마나가 대신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잎사귀의 세세한 세포막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마나가 스며들지 않는 곳이 없었다.

아무래도 영물은 루비가 아니라 이 나무를 말해야 할 것 같았다.

허!

엘릭은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이런 영물이 한두 개도 아니고 아예 군락지를 이루고 있는 숲이라니?

정말 갈수록 말이 안 되었다.

‘루비도 형태만 루비의 형태를 띨 뿐이지, 정확하게는 루비가 아니야. 화 속성의 마력 결정체… 가 맞겠지.’

보석나무가 뿌리를 박고 있는 지면도 마찬가지.

그 아래로 흐르는 마나의 양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영맥(靈脈), 아니, 이 정도 수준이라면 용맥(龍脈)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용이 틀어 앉아 있는 것처럼 거대한 마나 스트림이 흐르는 장소.

고대 용종들이 둥지를 꾸리는 곳도 보통 이러한 장소들이었다.

보석룡 샤이나크의 무덤처럼.

새끼 용들이 이곳을 좋아하는 것도 당연했다.

‘용맥에서 화 속성만 전부 루비 나무쪽으로 쏠리고, 풍 속성은 다이아몬드 나무쪽으로 쏠리고 있어.’

다이아몬드 역시 형태만 다이아몬드일 뿐, 풍 속성의 마력 결정체였다.

결국 그 뜻은 하나.

엘릭의 인상이 차갑게 변했다.

‘…수용하는 마나의 속성만 다를 뿐이지, 악마수랑 완전 판박이야.’

열매를 맺는 조건이 마나냐 마기냐의 차이만 있을 뿐.

속성 결정체가 맺히면 보석나무, 악마가 맺히면 악마수인 셈이었다.

‘너무 이상해. 어떻게 악마수와 보석나무의 구조가 똑같을 수 있지?’

결국 두 나무의 근본(根本)이 같다는 뜻.

여기까지 알고 나니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보석나무가 마족을 잉태하게 하는 악마수와 같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아무리 생각해도 명확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수상하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기본적으로 용(龍)과 마(魔)는 물과 기름처럼 절대 양립할 수 없는 상반된 존재들이었다.

용종은 세계의 법칙과 질서를 수호하며 영지(靈智)를 쫓는 현인의 종족들.

반면에 마족은 미지(未知)와 무지(無知)에서 오는 공포를 관장하는 존재들이었다.

그러니 그들은 항상 서로를 죽이려 했다.

괜히 메피스토가 보석룡을 제 창으로 찔러 죽인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고대에 용종들과 메르빙거가 가까운 관계이지 않았던가.

사실 엘릭은 용종이 마족에 대해 증오심을 똑같이 갖고 있으니 맺게 된 공동 전선의 개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새끼 용들이 악마수와 똑같은 나무의 열매를 먹고 있다?

뭔가 불안한 생각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당장 새끼 용들에게 먹는 걸 멈추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끼유유유!

끼유유!

“….”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보석을 먹고 있는 녀석들을 보고 있자니, 그 말이 쉽게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왠지 그랬다간….

‘날 갉아먹으려고 들겠지?’

물론, 이유는 그것만은 아니었다.

지금껏 제대로 된 먹이를 챙겨주지 못했다는 미안함이랄까.

일단은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았다.

‘지금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문제가 생기면 바로 개입해도 돼.’

사실 문제가 있긴 있었다.

‘몸집이 커졌어.’

먹어치우는 보석의 숫자가 많아질수록 새끼 용들의 덩치가 아주 조금씩이지만 불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용들과의 페어링도 짙어진 기분.

녀석들의 행복한 기분은 물론, 생각까지 어렴풋이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전에도 이거랑 비슷한 생각을 해본 적이 있지 않았나?’

-…우리는 본래 마도의 궁극을 좇고자 했던 학자 집단에 불과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더 큰 힘을 갈구한 나머지 마(魔)에 물들며 세상에 커다란 폐해를 끼쳤었고, 뒤늦게 그 잘못을 깨우칠 수 있었다….

-그릇된 것들을 바로잡고 지난날에 대해 속죄하기 위해 우리가 만들어지고, 가문이 탄생하게 된 것이니.

-마를 박멸하는 것만이, 우리 가문에 남겨진 사명이니라.

언젠가 가문의 안배를 열었을 때에 듣게 되었던 옛 비사(祕史).

그동안 관심을 크게 두지 않았었지만, 이제는 얼핏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결국.

엘릭은 메피스토를 돌아봤다.

보석나무와 악마수의 동일한 메커니즘.

숲으로 향하는 포탈을 지키고 있던 식인 늑대.

가문의 선조들이 남겼던 메시지.

모두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마신에게서 비롯된 대마왕들 중에서도 최고 서열을 지니고 있었다던 메피스토라면 뭔가를 알고 있지 않을까?

아니,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계속 짓고 있던 저 표정도 그러하고.

[알고 있죠?]

『다짜고짜 생뚱맞게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메피스토는 여전히 뚱한 표정이었다.

[제가 무슨 의문을 가지고 있을지 알고 있잖아요?]

『모른다.』

[아, 좀.]

『…하아!』

[용과 마. 동전처럼 정반대된다고 알려져 있던 두 종(種)이 동일한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는 이유. 대체 뭡니까?]

『….』

메피스토는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용들과 좋은 기억이 없는 만큼, 그들과 관련된 일은 언급조차 하기 싫은 것이다.

“….”

하지만 어느 때보다 엘릭의 눈빛은 진지해 보였다.

결국 메피스토는 한숨을 짙게 내쉬면서 말했다.

『자신 있느냐?』

[뭘요?]

『진실을 알고도 지랄을 안 할 거라는 자신.』

[…저 마법산데요?]

엘릭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의 도리는 아주 간단하죠.]

-마법사의 제1원칙.

지식을 쫓는다.

지식에는 절대 옳고 그름이 없음이니.

지식을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옳고 그름이 있을 뿐, 지식에는 죄가 없다는 것.

그래서 지식을 파고 또 파고 들어 궁극적으로 진리(眞理)를 얻어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마법사가 반드시 지켜야 할 자세일지니.

무지와 공포를 추구하는 마족과 절대 양립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엘릭은 바로 이 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것이고.

메피스토도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었다.

『그래. 네 추측이 맞다.』

엘릭은 ‘혹시나?’하고 생각했던 것이 진실이 되자, 잠시 큰 충격을 받았지만.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곧 숨을 고르면서 메피스토의 말을 경청했다.

『네 표현 중에 잘못된 것이 있다.』

[뭔데요?]

『용과 마는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를 비추는 거울에 가깝지.』

[거울… 이요?]

『그래. 거울. 거울은 서로를 비추지. 똑같은 모습으로, 똑같은 형태로. 하지만 자세히 보면 거기에 맺히는 상(像)은 항상 반대이지 않으냐?』

[…!]

엘릭은 그제야 메피스토의 비유가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서로 반대되는 상을 맺고 있는 거울.

하지만 다시 이것을 역설적으로 뒤집어서 말하면, 두 상은 결국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기도 하다.

즉, 용과 마도 마찬가지라는 것.

그들은 서로 추구하는 바가 다르다.

보이는 모습도 다르다.

그래서 메르빙거와 용종은 함께 했고, 마족과 대척점을 이루었다.

시조와 마신은 매번 부딪쳤다.

하지만 그들의 본질은. 태생은. 뿌리는.

‘…하나.’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던질 수 있는 질문이 있다.

-그릇된 것들을 바로잡고 지난날에 대해 속죄하기 위해 우리가 만들어지고, 가문이 탄생하게 된 것이니.

속죄.

대체 뭘 속죄해야 한다는 것일까?

* * *

『억지 된 추측은 하지 마라.』

메피스토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엘릭의 상념을 도중에 끊었다.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한 투.

그러면서 그는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더 자세한 건 사계를 모두 완성한 뒤에 생각해도 충분할 것이다. 그때면 네 녀석이 궁금해하는 비밀이 모두 풀릴 테니.』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메피스토는 겨울6장들과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사계를 완성하면 모두 알게 될 거라는 것.

그것은 시조님이 완성하셨던 영역, 대자연(大自然)을 빨리 구축하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평소 엘릭이었다면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겼을 일이었지만.

이제는 절대 아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메피스토가 숨기고 싶어 하는 사실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너무 급하게 열려고 하지 말자. 얼마 남지 않았어.’

보석의 숲 너머에 여름의 무덤이 있지 않은가.

그곳을 거치면 좀 더 진실에 근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엘릭은 제 팔에 있는 원죄의 인장을 바라봤다.

이전에 늑대를 흡수하며 경험한 일 덕분일까.

엘릭은 그동안 인장을 단단히 잠그고 있던 잠금장치가 일부 풀렸단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인장 너머에서 넘실거리는 포악하면서도 엄청난 양의 마기.

칼이 손에 쥐어지면 쓰고 싶은 것이 사람의 심리다.

‘한번 써보고 싶은데.’

이제 마기도 제대로 쓸 수 있겠다, 조금 전의 일로 원죄의 인장에서 흘러나오는 마기가 바로 앞에서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문제는 역시나 완전히 풀린 게 아니라는 것.

작동 원리를 모르니, 개방하는 것도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런 엘릭의 생각을 읽었던 것일까?

『아직도 본왕의 힘을 탐내는 것이냐?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더냐. 너에게는 천만년도 이르다고.』

뜨끔!

엘릭은 괜히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조금 당황했다.

메피스토의 입가에 맺힌 냉소가 짙어졌다.

그 모습이 너무 재수 없고 꼴사나워서 짜증이 났다.

그 때문일까.

괜히 엘릭은 속에서 조금 생뚱맞은 생각을 했다.

메피스토의 마기로 메피스토의 저 재수 없는 낯짝을 후려갈기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하는….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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