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85화
여름의 무덤
마을과 제법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공터.
마을 사람들이 괴물에게 제물을 바치는 장소였다.
그런 만큼, 바닥엔 무언가 거칠게 쓸려나간 흔적과 함께 거대한 발자국이 곳곳에 찍혀 있었다.
혈흔 또한 아무렇게나 뿌려져 있었는데, 이전에 제물로 바쳐진 자들의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 중앙에.
‘젠장… 젠장젠장! 이 사기단들 같으니라고!’
션이 밧줄로 꽁꽁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괴물을 끌어내기 위한 미끼 역할로 이곳에 홀로 남겨진 것이다.
‘끝나기만 해봐! 둘 다 진짜!’
그는 분노가 가득 찬 얼굴로 속으로 욕지거리를 마구 내뱉었다.
아무리 자신이 마을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다고 했지만, 설마 미끼로 쓸 줄이야!
자신을 이 꼴로 만들면서 실실 웃던 엘릭과 타샤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노라니, 속에서 천불이 날 것 같았다.
제물로 바쳐지기 직전에 이건 공평하지 않다며 항의했지만.
-네가 제일 약하잖아?
타샤가 웃는 얼굴로 뼈를 때리는 통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사람의 가치를 힘으로 평가하는 못된 사람들 같으니라고!
하지만 거기다 대고 뻗댈 수도 없었다.
실제로 셋 중에서 제물을 뽑아야 한다면 전투 능력이 가장 떨어지는 자신이 되는 수밖에.
‘…라고 생각할 줄 알았냐?’
은혜도 모르는 메르빙거 자식!
션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엘릭과 타샤가 숨어있는 장소를 노려봤다.
하여간 이 일만 끝나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물론, 저들이 그런 걸 귓등으로 들을 사람들이지만.
한편.
엘릭은 풀숲에 숨어 마법으로 기척과 냄새를 지우는 중이었다.
혹여 괴물이 자신들을 눈치채면 안 되었다.
“【옅어지고】, 【사라져라】.”
그러다 뒤통수가 따끔거리자 뭔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션의 시선이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분명히 자신들을 감지할 수 없을 텐데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감정이 전해질 줄이야.
분노가 크면 불가능(?)한 것도 해내는 법인가 보다.
엘릭은 히죽 웃다 말고 곁에 있던 타샤에게 물었다.
“타샤 님, 저기 좀 보시겠어요?”
“뭘… 아!”
엘릭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녀의 눈에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는 션이 들어왔다.
평소였으면 눈도 제대로 못 맞췄을 동생일 텐데.
아무래도 적잖게 화가 난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누나로서. 연장자이자 인생의 선배로서 응원의 메시지라도 전해줘야 할 것 같았다.
[뭘 봐? 죽을래?]
“….”
[어쭈? 눈 안 깔아?]
션은 그제야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누나가 저럴 때면 벌어지던 일들이 떠오른 탓이었다.
힘이 약한 동생은 이번에도 이를 가는 수밖엔 없었다.
저건 누나가 아니었다.
피만 나눈 호적 메이트일 뿐이지.
엘릭은 그 모습을 보고는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구나, 친구야.’
누구보다 누이에게 당하는 기분을 잘 알고 있는 엘릭이었기에 괜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슬쩍슬쩍 자신을 노려보는 션의 시선을 뒤로 하고, 다시 흔적을 지우는 데 전념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주황빛을 띠던 노을이 완전히 지고 어두운 밤이 찾아왔을 무렵이었다.
턱, 턱!
어디선가 육중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왔다.’
엘릭은 본능적으로 괴물이 왔다는 것을 눈치채고 전보다 몸을 더 낮췄다.
턱, 턱, 턱-
녀석이 점점 더 가까워질수록, 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놈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심상치 않은 탓이었다.
흑의 설원에서 마주했던 괴물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것 같은 살기.
꼴깍!
션이 마른 침을 삼키는 동안.
스르르-
천천히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저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엘릭은 크게 놀라고 말았다.
크르르르!
집채만 한 크기의 늑대.
마기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마족의 일종으로 보였다.
전신을 뒤덮고 있는 검보라색 털은 불꽃처럼 금세 타오를 것 같았고, 숨을 내쉴 때마다 퍼져 나오는 마기는 독성이 다분했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 가장 신경 쓰이는 점이 따로 있었으니.
‘똑같아.’
자신의 팔뚝에 그려진 원죄의 인장과 말이다.
‘그러고 보니 마기의 성질도 비슷하잖아?’
어째서인지 메피스토가 떠올랐다.
엘릭은 언젠가 노루스 재상에게서 뽑았던 새끼 마족이 떠올랐다.
[메피.]
『본왕도 보고 있다.』
[저번에 괴물을 보고 싶다고 말했던 게 이런 이유에서였죠?]
『그래. 네놈도 의심은 했겠지만, 실은 이 마을에 왔을 때부터…!』
[설마 자식이 있었을 줄이야.]
『…뭐라?』
엘릭의 말에 메피스토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난 메피야말로 모태 솔로라고 생각했었는데. 충격이네.]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그럼 대체 애 엄마는 누구예요? 설산왕은 아닐 테고? 비슷하게 생긴 분인가?]
『이 새끼가!』
메피스토가 목에 핏줄을 세우며 발끈했다. 표정을 보니 어지간히 조금 전의 농담이 싫었던 모양이다.
[알았어요, 알았어. 그럼 쟤는 뭡니까?]
메피스토는 인상을 쓴 채 잠시 엘릭을 노려봤지만, 곧 한숨을 내쉬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마도.』
늑대를 보는 메피스토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본왕이나 마신의 개체군 중 일부인 거 같다.』
* * *
메피스토가 봉인된 시간은 무려 천 년여.
그전에 그는 자신의 흔적을 대륙 곳곳에 남겼다.
세상에 더 많은 미신(未信)과 무지(無知)를 만들어내어 마(魔)를 퍼뜨린다.
그래야만 자신의 영향력이 더 커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이런 행동을 먼저 개시한 자가 있었다.
-마신(魔神).
모든 마들의 최정점.
혹은 원조.
마신이 각지에 퍼뜨린 마는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다양한 민담이나 지역 전설로 남으며 갖가지 기현상을 일으켰으니.
『대표적인 예로 흑의 설원에서 봤던 악마수(惡魔樹)가 있지.』
마족이 잉태된다는 나무.
안트로모프의 재상인 노루스가 그것의 열매를 먹었다가 마족에게 집어 삼켜질 뻔했었다.
『그곳에도 본왕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정말요?]
엘릭이 놀라 되물었다.
생각해 보니 어지간한 마물들조차도 악마수에 쉽사리 접근하지 못했다.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마기는 험악하기 짝이 없었으니까.
‘근데 그게 메피의 분신 같은 거였다고?’
『본왕도 결국 마신의 분신이자 개체군이나 다름없음이니. ‘원죄’라는 진명도 바로 그 때문에 탄생한 것이니라.』
메피스토의 설명이 계속 이어졌다.
『한데, 여기에도 그 흔적이 있을 줄이야….』
크르르르!
늑대가 천천히 션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 순간, 엘릭은 어떻게 말할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잠깐만요. 그럼 지금 말은 마신이 퍼뜨린 마가 따로 있고, 메피가 퍼뜨린 마도 따로 있단 건데… 그게 어떻게 중복될 수 있는 겁니까?]
마신이 퍼뜨린 마의 종류는 아주 다양할 것이다. 그중 일부가 메피스토라고 한다면, 메피스토가 마신에게서 비롯된 대마왕이라는 말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지금 메피스토가 하는 말은 마신이 퍼뜨린 마와 그가 퍼뜨린 마가 겹치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두 개체가 ‘하나’가 아니고서야 그런 말이 가당키나 한가…?’
『네 친구가 늑대 뱃속으로 들어갈 것 같다만?』
[제기랄! 자세한 건 저놈 마저 잡고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엘릭은 어느덧 늑대가 션의 코앞까지 도착해 있는 것을 보고 다급하게 움직일 준비를 했다.
『흐! 글쎄다.』
메피스토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동안.
킁킁!
늑대가 어느새 션에게 코를 들이밀며 냄새를 맡았다. 다른 존재의 흔적이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
‘엘릭 이 개새끼야….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빨리 좀 나오라고…!’
션은 덜덜 떨면서 엘릭과 타샤를 원망했다.
여차하면 그 역시 싸울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큰 타격을 입히기엔 부족할 것 같았다.
쩌어어억!
그러다 늑대가 아가리를 벌리면서 션의 머리를 향해 들이밀 때.
“지금!”
엘릭은 타샤와 시선을 주고받고는 마력을 터뜨리며 풀숲에서 튀어나왔다.
둘의 몸에서 냉기와 화염이 휘몰아쳤다.
크릉?
갑작스러운 기습에, 늑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놀란 모습을 보였다.
타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불사조 두 마리를 소환해냈다.
피요오-!
불사조는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면서 빠르게 늑대의 아가리에 작렬했다.
크어어엉!
놈이 제 앞발로 입 주변을 마구 긁으며 괴로워했다.
그러는 사이.
다른 불사조가 날아와 션과 늑대 사이의 바닥을 날개로 긁었다.
화르르륵!
그러자 불길이 높게 치솟으며 거대한 화염 장벽을 일으켰다.
숲 전체를 태워버릴 것만 같은 화력.
크르르!
늑대는 자신을 집어삼킬 것만 같은 불길의 기세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동시에 바늘처럼 바짝 세워지는 털들.
크허어엉!
퓨퓨퓻-
거친 울음소리와 함께 바늘털이 화살처럼 쏘아졌다.
퍼퍼퍼펑!
위력이 얼마나 대단하던지 화염 장벽에 구멍이 숭숭 뚫리고, 불사조들도 날개를 다쳐서 떨어지는 가운데.
파아아앗-
엘릭이 빛의 날개를 활짝 펼치면서 땅 위를 빠르게 가로질렀다.
다미르의 신성력이 담긴 날개.
이것이라면 늑대에게 천적이나 다름없으리라.
‘하르간의 신법을 시험해볼 수 있는 기회.’
비록 춘계의 인장이 완성되지 않아 깨달은 만큼 구사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빙의를 이용하면 충분히 해볼 만했다.
파바바박!
처음엔 약간 어설프던 보법이, 빠르게 연계되기 시작했다.
하르간 오리지널
무명보(無名步)
엘릭은 물처럼 유연하게 움직이며 늑대의 털을 빠르게 피하고, 단숨에 늑대 앞까지 다다랐다.
‘오, 생각보다 쓸 만한데?’
엘릭이 속으로 적잖게 감탄을 터뜨리는 동안, 타샤는 션을 빠르게 구했다.
늑대가 뒤늦게 화들짝 놀라 물러서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엘릭의 손바닥이 녀석에게 다다랐다.
동계의 인장
빙열(氷裂)
콰직!
늑대의 머리통이 반쯤 부서졌다.
크허허헝!
고통에 가득 찬 포효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녀석을 둘러싸고 있던 마기가 불길처럼 거칠게 일어나 엘릭에게 달려들었지만.
파아아앗-
엘릭의 손끝에서 신성력이 치솟았다.
다미르 오리지널
자애의 검
빛으로 이뤄진 검이 횡으로 그어지면서 마기의 불꽃을 말끔하게 지워버렸다.
그리고.
“【꽂혀라】.”
엘릭의 창이 녀석의 목덜미에 강하게 꽂혔다.
퍼어어엉!
츠츠츠-
늑대의 몸뚱이가 폭발하면서 마기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어휴, 속이 다 시원하네.”
『…네놈, 설마 이걸 본왕이라 생각하고 두들겨 잡은 건 아닐 테지?』
“에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요.”
엘릭은 헤실헤실 웃으면서 대답하고는 슬쩍 작게 말했다.
“하여간 눈치만 빨라서는.”
『이놈이, 진짜!』
메피스토가 길길이 날뛰건 말건 간에 엘릭은 무시하고 손을 활짝 펼쳤다.
“【흡수되어라】.”
콰아아아아!
다량의 마기가 그의 몸에 흡수되며 원죄의 인장이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두근!
심장이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