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82화
여름의 무덤
『이놈이 속고만 살았나! 믿기 싫으면 믿지 말던가!』
메피스토가 발끈하며 길길이 날뛰는 것을 보면서.
엘릭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네.’
자존심 강한 저 양반이 저렇게 말하는 건 일절 거짓말이 없다는 뜻이니까.
이제 엘릭은 어떻게 하면 메피스토를 다룰 수 있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마지막 확인차 물어본 거죠. 흐흐.]
『하여간 능글맞기는…! 으으!』
엘릭은 몇 번이나 메피스토를 달래면서 생각했다.
‘이번에 제대로 된 곳을 찾기만 하면 용들을 성장시키고 춘계의 인장을 완성시킬 수 있어.’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하르간이 가르쳐준 기술들을 완성시킬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도 차오른 상태였다.
엘릭은 보석의 숲으로 오는 동안, 피 나는 수련 끝에 하르간의 기술을 대부분 완벽하게 마투술과 하나로 뒤섞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현실에서는 달랐다.
하르간의 기술을 사용하려고만 하면 곧바로 육체에 과부하가 찾아온 탓이었다.
정신과 육체의 괴리(乖離).
하르간은 그것이 육체가 아직 완전하지 않기에 생긴 결과라고 말했다.
쉽게 말해 머리로는 아는데 몸이 따라와 주지 못하고 있는 상황.
하지만 청춘의 인장이 춘계의 인장으로까지 완성된다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진다.
기본적으로 신체 능력을 몇 배는 더 향상시켜줄 테니.
‘실제로 춘계의 인장과 하르간의 기술은 합이 잘 맞기도 하고.’
두 원주들이 연인이었던 만큼, 서로 간에 큰 영향을 미친 탓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을 무렵.
“찾았다.”
엘릭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웠다.
마차는 곧장 엘릭이 말한 방향으로 향했다.
덜그럭, 덜그럭!
거친 숲길에 마차가 흔들렸다.
* * *
칼날의 협곡.
본래라면 유령성이 있어야 할 자리.
하지만 이곳에 남은 거라곤 부서진 비행선의 파편과 셀 수 없이 많은 시체뿐이었다.
그런 곳에.
툭!
누군가가 조용히 나타났다.
얼굴 전체를 덮고 있는 로브 자락을 쓴 괴인.
그가 폐허를 쓱 훑어보더니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다 소리쳤다.
“여름의 유산은 수습했나?”
….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
“수습은 했나?”
괴인이 조금 짜증 섞인 질문을 던졌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대답 없는 메아리가 되었다.
“…자꾸 질문을 무시한다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데?”
살짝 짜증이 섞인 말투.
그 순간.
휘리리릭!
갑자기 괴인 앞으로 돌개바람이 형성된다 싶더니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다.
레펜트였다.
“하하핫! 우리 대장님도 참, 왜 그렇게 예민해져 있어?”
괴인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무시는 아니고?”
“에이. 그럴 리가. 어디서 또 이상한 놈들이 나타날지 알 수 없으니 주변 경계하느라고 늦은 거야.”
레펜트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가 세작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이후. 마탑과 네레스타 가의 추적이 시작되었으니까.
거기다 메르빙거의 봉신 세력이 되었다고 알려진 어나니머스까지 나서면서 발각될 뻔한 적도 몇 번 있었으니.
괴인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모습을 비추지 않았던 것은.
혹시나 주변에 꼬리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다행히 꼬리는 없었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눈앞에 있는 이 괴인에게 꼬리가 달라붙을 수 있다는 사실부터가 어불성설이었으니까.
‘만약 그런 게 가능했다면 진즉에 제국 놈들에게 붙잡혔겠지.’
제국 제1공적.
황실이 어떻게든 해치우고자 노력하였으나, 그 그림자조차 밟지 못한 존재.
대륙의 그림자.
자유혁명군의 총수(總帥)가 바로 그였으니.
“일단 ‘심장’은 놓쳤어. 정확히는 버렸다는 표현이 옳겠지만.”
레펜트의 말에 괴인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레펜트는 자기도 모르게 움찔 떨고 말았다.
총수이기 이전에 오랫동안 같이 함께 한 동료이자 친구였지만, 이럴 때는 참 무섭기 짝이 없었다.
사실 이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동안 세작으로 심어둔 레펜트를 마탑의 요직에 앉히기 위해 그동안 자유혁명군이 들인 세월과 자금, 그리고 노력이 적잖았으니까.
만약 ‘여름의 심장’을 얻을 수 있는 기회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쉽게 노출시킬 패가 절대 아니었다.
그런데 실패했다?
당연히 중징계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사안이었다.
“하지만!”
레펜트는 친구가 ‘정말’ ‘화’를 내기 전에 서둘러 외쳤다.
“구조식은 전부 머릿속에 들어 있으니 걱정 말라고!”
총수에게서 스멀스멀 흘러나오던 투기가 거짓말처럼 뚝 그쳤다.
“잘 됐군. 수고했다.”
그러면서 레펜트의 어깨를 두들겨주는 손길에는 힘이 가득했다.
‘진짜 이거라도 제대로 못 건졌으면 큰일 날 뻔했네.’
레펜트는 자신의 목이 온전한가 슬쩍 만져보았다.
“그럼 이쪽 일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된 것 같으니 가보도록 하지.”
“응…? 어디 가게?”
레펜트는 그제야 총수의 이번 나들이가 단순히 자신의 상황만을 확인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긴. 제국 놈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피고 있을 텐데. 이왕 나온 김에 미뤘던 일도 싹 다 정리하고 가려는 거겠지.’
레펜트는 곧바로 총수의 뒤를 쫓았다.
“만날 사람이 있다.”
“만날 사람? 누구?”
레펜트의 물음에 총수는 싱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옛 친구.”
* * *
두두두두!
엘릭 일행을 태운 마차가 달리길 얼마나 지났을까.
언제부턴가 숲의 풍경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바닥엔 노골적으로 마차를 쓰러뜨리려는 듯이 굵직한 나무 뿌리가 우둘투둘하고 나와 있었고.
몇몇 나무들은 수문장처럼 길을 떡하니 막고 있기도 했다.
어떨 때는 길 중간에 물이 흐르고 있어 엘릭이 물을 얼리고 나서야 그 위를 지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을 가고 있다 보니 길이 꽤 험했다.
“무슨 숲이 이래?”
션이 노골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자꾸만 험지로 들어가는 것 같으니 제대로 길을 찾은 게 맞나 싶었던 것이다.
엘릭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쩔 수 없지. 발길이 끊긴 곳을 뚫고 가는 거니까.”
“이쪽으로 가는 건 정말 맞아?”
“쟤들한테 물어보던가.”
그의 시선이 마차 앞에서 날고 있는 새끼 용들에게 향했다.
끼유유유!
끼유유! 끼유우?
새끼 용들은 아주 즐겁다는 듯이 울부짖으면서 서로 장난을 치기 바빴다.
닷새 전부터 새끼 용들은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었다.
무언가를 느끼기라도 한 건지, 난생처음 온 장소인데도 불구하고 익숙한 것처럼 굴었다.
엘릭이 심안으로 본 길과도 같은 뱡향.
덕분에 그는 심안을 닫고 편히 쉴 수 있었다.
정작 션은 계속 험해지는 환경 때문에 불안한 모양이었지만.
하아!
그러다 션은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어떻게든 걱정을 놓기로 마음먹었다.
‘저 얌생이가 별말 없는 걸 보면 알아서 잘 굴러가고 있는 거겠지.’
하지만 그런 결심도 잠시.
“….”
“이게… 정말 맞아?”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션은 물론, 엘릭마저 처음으로 당혹스러운 표정이 되고 말았다.
험난했던 환경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갑자기 넓은 공터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너머.
척 보기에도 음울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는 마을이 나타났다.
사람이 사는 것 같긴 한데, 인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당장 유령이라도 나오는 게 아닐까 싶은 마을.
“주민이… 없나?”
“아냐.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마을 주변의 나무가 말끔하게 베어져 있었고, 곳곳에 넓은 범위에 걸쳐 그을린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화전민들이 숲을 일부 태워 논밭을 일궜다는 증거.
‘그런데… 그런 화전도 일군지 한참 지난 것 같단 말이지.’
여러모로 수상쩍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휘이이이!
그때, 을씨년스런 바람 소리까지 났다.
괜히 소름이 돋았다.
“…조, 금 이상한 곳이네요? 호호.”
타샤는 조금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대체 이곳으로 그들을 안내한 이유가 뭘까?
엘릭이 새끼 용들을 가만히 바라봤다.
하지만.
끼유!
끼유끼유?
녀석들은 뭐가 문제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오히려 해맑은 모습 그대로 어서 가지 않고 뭐하냐며 마차 주위를 빙빙 날며 재촉하기 바빴다.
‘그래. 얘들이 뭘 알겠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열어본 심안도 똑같이 마을로 향하고 있었다.
“…일단 가죠.”
“알겠습니다.”
이랴!
마부가 채찍을 휘둘렀고, 마차가 다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끼유유!
* * *
마차가 천천히 마을에 들어섰다.
어찌나 조용한지, 말발굽 소리와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밖에 들려오지 않았다.
얼핏 보면 폐허나 다름없는 마을.
이곳에 지어진 집들은 하나 같이 불에 탄 것처럼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고, 농작물들 또한 관리가 전혀 되지 않은 상태였다.
한쪽에 쌓아둔 곡물들은 물론이고, 화전(火田)의 상태도 썩 좋지 못했다.
그곳에 자란 작물들은 전부 썩은 상태였으니까.
엘릭은 괜히 불길한 기분이 들어 마차 밖에 있던 새끼 용들을 전부 자신의 품으로 불러들였다.
끼유유!
방금까지만 신나있던 용들은, 엘릭의 분위기를 눈치 채곤 조용히 로브 안쪽으로 들어갔다.
메피스토는 마을을 쭉 둘러보더니 혀를 차며 말했다.
『참으로 이상하구나. 이런 곳에선 얼마 버티지도 못하겠거늘, 사람들이 살고 있다니.』
확실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토록 관리가 되지 않으면 제대로 먹지도 못해 살기도 힘들 텐데.
그 순간 엘릭은 집 창가에 눈만 내놓고 있는 마을의 주민과 눈이 마주쳤다.
깊게 그늘진 주민의 눈에는 경계심과 불안감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인지 그녀인지 알 수 없는 주민은 엘릭의 마차를 관찰하듯 살피다가, 곧 소리가 나도록 창문을 닫았다.
탁!
비단 그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엘릭의 마차가 지나간 집마다 하나 같이 경계하듯 창문을 닫은 것이다.
그럼에도 그 너머에선 이곳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역시 뭔가 좀 불안한데요.”
스산한 분위기에 겁을 먹었는지, 타샤는 제 몸을 안은 채 몸을 가볍게 떨었다.
션은 눈을 감고 마을 전체를 마나 스캔으로 쭉 훑었다.
화아아-
반투명한 기운이 그를 중심으로 넓게 퍼져나갔다.
몇 번이고 이를 반복한 션은, 다시 눈을 뜨고 타샤를 달래듯 말했다.
“그런 거 없어, 누나. 코빼기도 안 보이니까 신경 쓰지 마.”
“그럼 다행…!”
타샤가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이었다.
“멈춰라!”
끼익!
누군가의 외침에 마차가 우뚝 멈춰 섰다.
“엘릭 님…!”
마부가 도와달라는 듯이 엘릭이 있는 쪽을 돌아봤다.
엘릭은 무슨 일인가 싶어 마차에서 내려 앞을 확인했다.
마차의 앞길을 막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체 누구 허락을 받고 여길 들어온 거야!”
“마지막으로 기회 주겠다, 썩 꺼져!”
마을의 장정들이었다.
그들은 낫이나 갈고리, 그리고 삽과 같은 농기구들을 들고 우르르 모여 마차를 위협하는 중이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