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81화
여름의 무덤
“이를 어쩝니까?”
“저라고 알겠습니까? 하루아침에 황자님께서 이리도 달라지시니….”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참…!”
엘릭이 궁에 들르고 어느덧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크롬헬은 끼니를 거의 거른 채 자신의 방에서 도통 나오지를 않았다.
그 탓에 궁에 있는 사람들은 영 불안한 게 아니었다.
“이거 뭐라고 말씀이라도 드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러다가 더 악화라도 되면 어떡합니까? 그분의 심기라도 건드리면…!”
가뜩이나 마족과 결탁한 일 때문에 황실의 숨겨진 검이라 불리던 감찰국이 사실상 무력화되어 황궁의 기능이 마비된 상황이었다.
거기다 제국의 중추인 마탑과 사자공가가 대립하고, 알게 모르게 음지에서 무력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에 조정과 황도의 분위기는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와중에 사실상 황태자 노릇을 하던 크롬헬이 모든 일에 손을 떼고 정권을 놔버렸으니.
그동안 그의 눈치를 보던 다른 황자와 황녀들도 슬슬 여러 귀족에게 물밑 접촉을 하기 시작했다.
크롬헬이 반쯤 폐인이 된 지금을 틈타 자신만의 세력을 만들려는 것이었다.
이는 당연히 황실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결과를 낳게 되는바.
궁의 사람들은 크롬헬을 안타까워하면서도, 그가 이 혼란을 잠재워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아, 안 됩니다!”
“놓아라!”
그러던 중이었다.
크롬헬의 방으로 향하는 긴 복도 끝에서 큰 소란이 들렸다.
근처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놓으래도!”
“그럴 수 없습니다! 진정하십시오, 집사장 님!”
모퉁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정갈한 복장을 한 노인이었다.
그의 아래엔 한 하인이 노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은 채 질질 끌려오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좀처럼 짐작하기 힘든 모습.
하지만 근처에 있던 시녀와 집사들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노인은 오랫동안 궁을 관리하고, 크롬헬의 옆을 지켜주었던 집사장이었다.
몇몇 집사들이 다가와 집사장과 하인을 번갈아 보다가 조심히 물었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일단 이 녀석부터 떼어 놓아라. 계속 귀찮게 구는구나.”
집사장은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안경을 올리며 말했다.
노인답지 않게 두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아, 알겠습니다.”
대체 무슨 일인지 영문은 모르겠으나, 집사들은 그의 말에 따라 하인을 떨어뜨리려 했다.
그러자 하인은 집사장의 다리를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외쳤다.
“안 됩니다! 크롬헬 황자님을 직접 알현하시다니요!”
“…뭐?”
순간, 그를 떼어 내려던 집사들의 동작이 멈췄다.
그들은 이게 무슨 말이냐는 듯이 집사장을 바라봤다.
“이 말이 사실이십니까?”
집사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들을 노려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래. 내 더 이상 궁이 개판으로 돌아가는 꼴을 가만히 지켜볼 수 없구나. 내가 직접 말씀드릴 생각이다. 그러니 어서 이놈부터 좀 떼어놔! 그 앞에 거치적대는 놈들은 전부 비키도록 하고!”
가뜩이나 여러 하인과 집사들에게 호랑이로 불리는 집사장이었지만.
오늘따라 그 표정은 더욱더 단호해 보였다.
하지만 집사들은 그를 순순히 보내줄 수 없었다.
그들도 하인과 마찬가지로 집사장의 팔다리를 붙잡고 말리기 시작한 것이다.
“다, 다시 생각해주십시오!”
“그러시다가 정말 큰일 나십니다!”
“이것들이 감히…!”
모두가 그를 말리는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크롬헬이 자신의 방에 칩거하면서 남긴 한 마디 때문이었다.
-누구든 내 휴식을 방해하려 든다면, 친히 목을 베어버리겠다.
그렇기에 궁 내부가 이렇게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모두가 전전긍긍하며 기다렸던 것이다.
4황자는 제 입 밖으로 꺼낸 말을 반드시 지켰으니까.
그런데 그런 곳을 집사장이 직접 들어가려 한다?
아무리 그가 크롬헬의 충복이라고 해도,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그들의 입장에서는 말릴 수밖에.
“그럼 내가 들어가지 누가 들어가겠느냐? 나와라!”
하지만 집사장의 고집도 크롬헬에 못지 않았으니.
그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기어코 그런 제재를 뚫고 크롬헬의 방문에 도착했다.
“아아…!”
“집사장님!”
“들어가겠습니다, 황자 전하.”
철컥!
집사장은 굳게 잠겨 있던 문을 가볍게 따고는 힘차게 열어젖혔다.
쾅!
암막 커튼이라도 쳤던 건지 크롬헬의 방은 빛 하나 들어오지 않았다.
바닥은 폭탄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갖가지 깨진 물건들 따위로 정신없이 어지럽혀 있었으니.
심지어 벽 곳곳에 남은 검흔은 그가 얼마나 괴로움에 몸부림을 쳤는지 보여주는 듯했다.
“…뭐지? 내가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침대에서 뒷모습만 보이던 크롬헬의 목소리가 들렸다.
완전히 갈라진 목소리.
하인과 집사들은 사색이 되어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집사장만이 안경을 다시 고쳐 쓰면서 안으로 들어섰다.
“접니다.”
크롬헬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다가 정면으로 자리를 옮겨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탕구트, 당신이군.”
“듣던 대로 정말이지 폐인이 따로 없으시군요.”
“내가 분명 말하지 않았나? 별도의 명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들어오지 말라고.”
“바깥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나 계십니까?”
“나가게. 지금껏 자네가 나와 시로에게 보여준 충성심을 보아 이번 한 번만 용서해줄 터이니.”
“너무나 어지럽습니다. 그것을 가만히 두고만 보고 계실 겁니까?”
“….”
“무슨 말이라도 해보십시오.”
“…내 말이 정녕 안 들리는 것인가? 아니면 그냥 무시하는 것인가?”
크롬헬은 짜증스럽게 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자신의 명령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할 말만 늘어놓으니 화가 날 수밖에.
하지만 집사장은 여전히 당당했다.
“그렇게는 안 되겠습니다.”
“자네…!”
“목을 치려거든 치십시오. 이깟 머리통 따위, 언제든 달게 드리겠습니다.”
집사장은 정말 필요하다면 잘라가라는 식으로 자신의 머리를 쭉 내밀어 보였다.
“…그런다고 정말 내가 못할 것 같나?”
“제 나이가 팔십하고도 아홉입니다. 충분히 살 만큼 살긴 했죠.”
“….”
크롬헬은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한참 동안 집사장을 노려보았고.
집사장은 전혀 미동도 없이 목을 내민 상태 그대로 서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숨 막히는 긴장감이 흘렀다.
그리고.
“…자네는 정말이지, 한결같군.”
결국 포기한 쪽은 크롬헬이었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상의 항복이었다.
집사장이 옷매무새를 고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은 죽을 때가 아니니까요.”
“그런가?”
크롬헬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리던 그때.
쿵!
갑자기 집사장이 양 무릎을 바닥에 꿇고 호소했다.
“황자 전하.”
“자네…!”
“이 늙은이는 황자 전하께서 얼마나 슬프신지 알 수 없습니다. 그저 10여 년 전에 자식새끼를 먼저 보내고 난 뒤에 이 늙은이가 겪었던 상실감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저 막연하게 추측할 뿐입니다.”
“….”
집사장의 아들은 크롬헬도 기억하고 있었다.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자신의 일에 충실하던 집사장이 처음으로 자리를 비웠던 때가 바로 그때였다.
“하지만 이 늙은이는 압니다. 황자 전하께서 이 하찮고 비루한 늙은 것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크신 분이라는 것을요.”
집사장의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되었다.
“그리고 이 제국을 새롭게 세워 올리실 그릇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니 부디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와 주십시오!”
“….”
“…부탁드립니다, 전하. 이 늙은 것의 마지막 소망을 들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한참의 침묵이 흐른 뒤.
“…그대에게는 미안하지만, 이제 그러긴 힘들 것 같군.”
크롬헬은 고개를 반대로 돌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다.
근 한 달.
그 긴 시간 만에 드러난 그의 모습은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볼살은 빠질 대로 빠져 볼품이 없어 보일 정도였으며, 눈은 마족의 눈이라 착각할 정도로 충혈되어 있었다.
윤기가 흐르던 머리는 건드리기만 해도 부서질 것처럼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사람들이 알던 위풍당당한 황자, 흑사자 크롬헬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집사장은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크롬헬이 갓 태어났을 때부터 훌륭한 황자로 자란 지금까지.
집사장은 그를 또 다른 아들로 생각해왔다.
한데, 그런 아들이 이리도 폐인이 된 모습을 보이니 슬프지 않을 수 없던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굳게 믿고 있었다.
크롬헬이 반드시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을.
집사장은 눈물을 훔치며 말을 이었다.
“아닙니다. 하실 수 있습니다.
“말은 고맙지만 더는….”
“황자비께서도 이런 모습을 원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
그 말에 처음으로 크롬헬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러니 부탁드립니다! 모든 것을 다시 바로잡아주십시오!”
집사장의 말을 끝으로 방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상태로 오랜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크롬헬은 물론이고 집사장 또한 아무런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크롬헬이 결정을 내리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마침내 쩍쩍 갈라진 크롬헬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래…. 시로도 이런 내 모습을 싫어하겠지.”
그의 눈가엔 여전히 슬픔과 그리움이 가득했다. 그러나 하나만큼은 달라져 있었다.
어느새 예전과 같이 생기를 되찾은 눈은 집사장을 똑바로 바라보는 중이었다.
“고개를 들어라.”
“…황자님!”
그런 크롬헬의 모습을 본 집사장의 얼굴이 화색이 되었다.
크롬헬은 의자에 대충 걸려 있던 옷을 입으며 말했다.
“나갈 채비를 하라.”
집사장은 지금 누구보다 기쁜 마음이었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크롬헬이 돌아왔다는 사실이었으니까.
“어디로 모시면 되겠습니까?”
“사자공가. 장인어른을 뵈러 간다.”
모든 걸 바로잡기 위한 첫 번째 장소.
그렇게 말한 크롬헬의 눈엔 깊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 * *
어느덧 엘릭의 마차는 한 숲에 도착할 수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숲.
엘릭은 마차의 창틀 너머로 그곳을 바라봤다.
끼유!
끼유유유!
새끼 용들은 자신들에게 좋은 곳으로 가려는 걸 알고 있는지, 벌써부터 한껏 들뜬 모습이었다.
아예 마차를 나와, 주변을 날아다니며 기분 좋다는 듯이 울부짖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러나 션만큼은 의구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숲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여기에 정말 보석의 숲이 있다고?”
일단 엘릭의 말을 따라 보석의 숲이 이곳에 있다고 해서 따라오긴 했다지만.
막상 와보니 드는 의문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아닌 게 아니라, 눈앞의 숲은 겉보기엔 평범한 숲이나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엘릭은 그제야 뭔가가 떠올랐다는 듯이 짝! 하고 박수를 쳤다.
“아, 생각해보니까 그걸 깜빡하고 있었네.”
“뭘?”
“보석의 숲은 착한 사람들한테만 보인다는데. 찾아도 넌 못 보겠다.”
그러면서 한쪽 입꼬리를 올렸는데, 션이 보기에 그토록 얄미울 수 없었다.
지금껏 아카데미에서 인성 파탄 난 메르빙거를 챙겨준 게 누구인데!
“이 새끼가?”
션이 순간 눈에 쌍심지를 켰지만, 엘릭은 못 본 척 무시하고 심안을 열어 숨겨진 길을 찾아냈다.
이제부턴 이 넓은 곳 어딘가에 숨어 있을 보석의 숲을 찾아야 했으니까.
미로처럼 빽빽하게 자란 나무들 틈으로 무수히 많은 길이 보였다.
엘릭은 그중에서 사람의 발길이 가장 적게 닿은 곳을 골랐다.
‘보석의 숲은 꽤 오랫동안 발견되지 않았을 테니까.’
사람들의 왕래가 적은 곳을 가다 보면 분명 찾을 수 있을 터였다.
물론, 그 탓에 몇몇 사람들 사이에선 아예 전설이나 민담 따위로 치부되기도 했지만.
다행히 엘릭에겐 확실한 정보원이 있었다.
[정말 있는 거 맞죠?]
옆에는 메피스토가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렇다니까! 대체 몇 번을 물어보는 게냐. 하도 오래되어 위치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만, 본왕의 눈으로 똑똑히 본 적이 있느니라.』
[구라면… 알죠?]
엘릭의 눈이 샐쭉하니 변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