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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340화 (339/405)

2부 80화

여름의 무덤

엘릭은 그 말을 남기고 우선 외부 세계로 돌아갔다.

아주 쉬울 것처럼 말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쉬운 일인 건 아니었으니까.

화아아악!

시야가 반전되며 마차 내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덜컹덜컹.

마차가 가볍게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어? 일어나셨네요?”

그리고 타샤가 가장 먼저 엘릭이 돌아왔다는 것을 눈치채고 말을 걸어왔다.

“원하는 건 좀 얻으셨어요?”

“조금은요. 그동안 별일은 없었죠?”

“네. 아직은요.”

“다행이네요.”

엘릭이 안심하는 투로 답했다.

그가 잠시 이곳으로 돌아온 이유는 혹여 사자공가나 크롬헬의 공격을 받지 않았을까 걱정해서였으니까.

지금까지 그들과 작은 충돌이 계속 있었으나, 최근엔 황자비의 죽음과 유령성의 붕괴라는 큰일이 동시에 발생했다.

이만하면 그쪽에서도 본격적으로 공격을 해올 가능성이 충분히 존재했다.

아니, 엘릭만 집요하게 노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 아직까지 별다른 문제는 없는 모양이었다.

‘따지자면 이 상황이 오히려 이상한 거지만.’

하지만 엘릭은 그러한 사실이 도리어 찝찝하게 다가왔다.

그가 아는 그들이라면 결코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단순히 마탑과 신교 동맹이 있어서 그런 거 같지는 않은데.’

확실하지는 않다.

하지만 분명 다른 무언가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황금사자가 직접 움직일 수도 있는 거고…. 그렇다면 율호왕과 숀도 금방 만날 수 있으려나.’

모든 것이 맞물려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그나저나 보석의 숲까지는 얼마나 남았답니까?”

하지만 지금 당장 알 수 없는 일.

엘릭은 대충 생각을 정리하곤 물었다.

“아직은 좀 걸린다고 하네요. 길면 한 달 정도?”

“음… 그럼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좀 부탁드려요.”

“예?”

타샤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이 되물었다.

“아직 볼일이 남아서요.”

그 말을 끝으로, 엘릭은 다시 내면세계로 들어갔다.

* * *

그 뒤부터.

엘릭의 생활은 단조로웠다.

보석의 숲에 다다를 때까지 쉴 새 없이 내면세계와 외부를 왔다 갔다 했으니까.

심상 세계에 들어가선 혹시 있을지 모를 율호왕의 흔적을 찾으면서도, 하르간을 비롯한 겨울6장들과 차례로 자주 비무를 치렀다.

황금사자와의 충돌이 가까워지는 이때, 최대한 전력을 끌어올릴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엘릭은 최근 들어 자신과 겨울6장의 실력 차가 거의 없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이제 우리보다 훨씬 우위이다.”

나하트람의 말에 체페슈와 다미르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물론, 우리 각자가 맡고 있는 각 속성이나 성질에 있어서는 너보단 우위일지 모른다. 하지만 싸움 하나만 두고 보면, 전체적인 지식이나 깊이에서 이제 우리는 너와 비교할 바가 아냐.”

엘릭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오토 한을 대신해 자신의 스승이 되어주었던 이들에게서 칭찬을 듣고 있으려니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감동한 얼굴이로군?”

“…딱히 그런 거 아니거든요?”

이럴 때는 대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 건지.

엘릭은 언제나 자신만만하던 이전과 다르게 섣불리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것으로 겨울6장을 모두 넘어섰다고 할 수는 없었다.

나하트람이 말했듯이 그가 우위인 부분은 ‘싸움’과 같은 종합적인 면모에 국한될 뿐.

여전히 창술에서는 나하트람이,

마법에서는 미아가,

신성 마법에서는 다미르가,

흑마술에서는 체페슈가,

그보다는 훨씬 더 깊은 지식을 지니고 있었으니.

그것은 저들이 신화시대부터 활동해온 절대자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엘릭은 여전히 그들로부터 아직 더 많은 것들을 배울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

‘아직 하르간을 넘어서려면 멀기도 했고.’

오토 한의 왼팔이 지닌 무력은 다른 6장들과는 차원을 달리했던 것이다.

다행이라면 지속적으로 하르간과 비무를 치르다 보니, 그녀의 기술들이 점점 몸에 익기 시작했다는 것?

촤촤촤촤!

엘릭은 재빠른 발놀림으로 이리저리 움직이며 하르간이 휘두르는 낫을 피했다.

허벅지, 어깨, 허리로 날아드는 공격.

낫은 전부 아슬아슬한 위치에서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예전 같았으면 몇 번이고 찔렸을 법했지만, 걸음마 같던 그의 보법이 어느새 쓸 만한 수준까지 올라온 덕분이었다.

하르간은 허무하게 허공을 가른 낫을 빤히 바라보다 엘릭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제법이네. 벌써 이만한 경지까지 오를 줄이야.”

“이 오라버니가 좀 대단하지. 그런데 말이 짧다, 동생아?”

“….”

그 말에 하르간은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엘릭은 살기 어린 눈빛으로 이쪽을 노려보는 하르간을 무시하며 그동안의 성취를 돌이켜봤다.

‘확실히 많이 늘긴 했어.’

아직 하르간만큼 부드럽지는 못해도 자유자재로 보법과 신법을 쓸 수 있었다.

무명보(無名步).

무명신(無名身).

하르간은 엘릭에게 전수한 자신의 기예를 그렇게 불렀다.

무명은 ‘이름이 없다’는 뜻.

엘릭이 알기로 두 기예는 하르간이 평생을 다 바쳐 탄생시킨 무론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너무 성의가 없는 이름이 아닌가 싶었었지만.

-중요한 건 이름이 아니니까.

-말이 짧네?

-…으드득! 중요한 건 이름이 아니니까요.

-그럼?

-바로 제 자신이죠.

-…!

-결국 이 기예들도 한낱 도구. 중요한 건 저를 강화시켜주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언젠가 쓸모가 없어지면 바로 버릴 거구요.

도구.

당시에 그 말이 엘릭에게 줬던 충격은 아주 컸었다.

그는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토 한이 남긴 안배도. 아르세우스의 가르침도. 조부님의 말씀도. 겨울6장의 하교도.

모두 엘릭에게는 중요한 보물들이었다.

반드시 이해하고 단련해야만 하는.

그리하여 저 하늘에 떠오른 별처럼 빛내야만 하는.

그런 가문의 보물.

하지만 하르간은 딱 잘라 말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 보물을 사용하는 자신에게 있으니, 자신이 가장 중요한 게 아니냐고.

엘릭 역시 늘 하고 있는 생각이었지만, 이런 각도에서 들으니 큰 깨달음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때부터였다.

엘릭은 무명보와 무명신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똑같이 따라하려 애쓰지도, 형식에 구애받지도 않았다.

대신에 이리저리 섞어보았다.

어떨 때는 마투술에.

또 어떨 때는 마법 응용식에.

심안에 적용해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하르간의 기예에 몸이 완전히 적응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부터 엘릭의 실력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나하트람 등이 사실상 자신들과 비무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 것도 바로 그 시점부터였다.

동시에 이제는 하르간과 비무를 해도 더 이상 실력이 늘지 않는 시점이 찾아왔다.

벽이었다.

깨달음의 벽.

‘웬만하면 보석 숲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실력을 더 끌어올리고 싶은데… 역시 그 방법밖에 없겠지?’

엘릭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하르간을 빤히 바라봤다.

“…?”

하르간이 영 찝찝한 표정으로 엘릭을 바라봤고.

엘릭은 입꼬리를 쭉 올리면서 물었다.

“동생,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을까?”

“…또 무슨 얘길 하려고.”

하르간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시간이 꽤 흘렀건만, 아직도 엘릭이 제안한 내기만 떠올리면 치가 떨려온 탓이었다.

“제가 설마 응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오라버니이이?”

영락없이 비꼬는 투였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 하르간의 표정이 변하고 말았다.

“이제 이런 비무는 익숙하니까, 실전처럼 해줄 수 없을까? 특훈의 개념으로.”

“….”

“그렇게만 해주면 더 이상 오라버니 소리는 안 하게 해줄게. 물론 거기다 다른 겨울들처럼 존대도 해주고. 어때?”

척 듣기에도 딱히 손해 볼 것이 없는 제안.

하지만 워낙에 크게 덴 적이 있는 탓에 하르간은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는 엘릭이 굳이 꿍꿍이를 둘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죽을 수도 있을 텐데?”

“오히려 좋아.”

엘릭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

“진짜 죽을 수도 있다고.”

“그러니까 좋다니까?”

“…?”

“…?”

하르간과 엘릭이 똑같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두 사람의 대화가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엘릭은 뒤늦게 서로가 말하는 바가 완전히 엇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내가 지금 내면세계에서 죽어도 언제든 부활할 수 있다고 이해하는 걸로 생각하는 거지?”

“그럼 아냐?”

내면세계의 죽음은 분명히 진짜 죽음이 아니다.

육체가 죽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안정된 것만은 아니었다.

결국 죽음이란 경험은 영혼에 막대한 훼손을 가할 수밖에 없는바.

그런 훼손이 누적된다면 영혼이 위태로워지게 된다.

설사 그것이 아니더라도, 하르간이 작정하고 주는 죽음은 일반적인 죽음과도 차원을 달리했다.

자칫 정신의 붕괴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그럼 그 뒤에는?

식물인간이 되고 말겠지.

신체 기능은 남아있을지 몰라도, 뇌사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하르간은 바로 이 점을 경고한 것이다.

하지만.

“아냐. 정말 난 이해하고 있어. 지금 얼마나 위험한 짓을 하려는 건지도.”

“….”

엘릭은 이미 하르간의 말뜻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각오까지 하고 있었다.

하르간은 다시 생각해보라고 권하고 싶은 눈치였다.

아무리 엘릭이 얄밉다고 해도, 어쨌거나 연인의 후손이었으니까.

그러나 저 눈빛을 보고 있자니 섣불리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르세우스.’

연인의 눈빛이 딱 저랬으니까.

아르세우스는 그녀에게 만큼은 한없이 자상하던 사람이었지만, 때때로는 그녀조차 말리지 못할 때가 있었다.

바로 저런 눈빛을 보일 때였다.

뭔가를 단단히 결심한 눈빛.

“그렇다면야.”

결국 하르간은 엘릭의 선택을 존중하기로 마음 먹었다.

만약 진짜로 죽게 된다면?

자칫 메르빙거의 기나긴 역사에 종지부가 찍힐 수 있었지만.

그런 것쯤이야 충분히 각오를 해뒀겠지.

결과물은 온전히 메르빙거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하르간은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자세를 낮췄다. 그녀의 손에 들린 낫이 쩔그럭거렸다.

“그럼 확실히 배울 수 있게…!”

엘릭이 입을 여는 순간.

파아아앗-

하르간이 자리를 박차고 엄청난 속도로 거리를 좁혔다.

촤악!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 엘릭은 하늘을 바라보며 대자로 뻗어 있었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녀에게 숨통이 끊긴 것이었다.

“…?”

엘릭은 무심코 제 목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아무리 내면세계라도 통증은 느껴질 터. 그러나 어찌나 깔끔하게 잘렸는지 무언가 지나갔다는 느낌만 들 뿐이었다.

하르간이 그의 시야로 고개를 들이민 건 그때였다.

붕대 밖으로 나와 있는 하나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밝게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오라버니. 어서 일어나셔야죠?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그녀는 엘릭의 멱살을 잡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빌어먹을 메르빙거를 여러 번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주시다니. 이 기횔 놓칠 순 없죠.”

“….”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로부터 두 번 더 죽은 이후였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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