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79화
하르간
미아를 제외한 나머지 겨울들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이제… 어떻게 하지?
꼭 그렇게 묻는 것만 같았다.
콱!
미아는 그들 어깨에 올린 손에 더욱 힘을 주며 말했다.
“뭐해. 인사. 해.”
다른 이들과의 키 차이 때문에 힘겹게 까치발을 들고 있는 모습이 귀여웠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조금 전에 그녀가 받은 비웃음을 돌려줄 수만 있다면 뭔들 못하겠냐는 표정.
다미르가 식은땀이 가득한 얼굴로 엘릭에게 물었다.
“엘릭… 대체 어떻게 하르간을 데려온 거냐?”
여전히 미아가 뒤에서 그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어떻게든 그녀를 무시해버리기로 작정한 것이다.
‘오, 저런 방법이?’
‘신실한 신의 사도답지 않게 약삭빠르군!’
그런 그의 생각을 눈치 챈 나하트람과 체페슈도 곧바로 태세 전환을 했다.
“그러니까. 절대 쉽지 않았을 텐데? 대단해, 대단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에게 이야기 좀 해줄 수 있겠나?”
“나쁜! 놈들!
홀로 남겨진 미아가 빽 소리를 질렀지만, 그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피식!
엘릭은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가문을 중흥시켰다는 옛 가신들이 이렇게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을 수 있는 건지.
다들 철딱서니가 없었다.
‘여기서 제일 어른은 나구만.’
어쩔 수 없지.
어른인 내가 나설 수밖에.
“으음….”
“음?”
“응?”
“그러니까 비법이 뭐냐고.”
“잘?”
“…잘?”
“네. 그냥 잘하니까 되던데요?”
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
“….”
“….”
나하트람과 체페슈, 다미르는 모두 멍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겨울6장 중에서도 최고라 불리며, 한때 오토 한의 ‘왼팔’이라고 불렸던 이를 잡아내는 게 ‘잘 하니까’ 되었다고?
‘그럼 그것도 못한 우리들은….’
‘혀 깨물고 죽으란 소린가?’
‘어째 잘난 채하면서 말하는 태도가 꼭…!’
세 사람의 생각이 똑같은 인물을 그려내고 있었다.
“오토 한. 똑같아.”
미아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들이 생각한 인물을 똑같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저리 재수 없을 수가 있을까.
그런 그들 사이에 있는 하르간은 여전히 뚱한 표정이었다.
그만큼 이번에 받은 충격이 크다는 뜻일 테지.
하지만 엘릭은 물론, 겨울6장도 모두 알고 있었다.
하르간은 아직 본 실력을 뽐낸 게 아니다.
‘하르간의 힘은 감정에서 발산되니까.’
그녀의 생전 별명은 삼두육비(三頭六臂).
세 개의 머리에 여섯 개의 팔을 가진 괴물이라는 뜻.
보통은 강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지만, 하르간은 달랐다.
‘서로 다른 감정을 가진 세 명의 인격이 내재돼 있다고 했지?’
기쁨, 슬픔, 그리고 분노.
격한 감정을 가진 인격들이 모두 밖으로 튀어나오면, 세상은 죽음으로 젖어들게 된다.
‘이제 그걸 나도 빌려 쓸 수 있게 된다.’
엘릭은 주먹을 꽉 쥐었다.
본 인격인 ‘기쁨’은 보법과 신법에 특화되어 있다.
‘슬픔’은 살인 기술을.
‘분노’는 파괴와 죽음을 담당한다.
현재 엘릭이 볼 수 있었던 건 ‘기쁨’의 보법과 신법이 전부였지만, 그것만으로도 당장 만족했다.
마력이 실리지 않았음에도 그토록 유용해 보일 수가 없었으니까.
회피면 회피, 반격이면 반격, 거기다 기동력까지.
상당수의 전력이 기하급수적으로 향상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이제 남은 건 한 명인데….”
겨울을 완성하기 위해 필요한 이는 이제 단 한 명.
숀.
살아생전 ‘악살(惡煞)’이라는 이명으로 유명했던 자였다.
다만, 그 역시 하르간처럼 종적을 감춘 채로 보이지 않는다.
엘릭은 그의 이름을 중얼거리면서 하르간을 돌아보았고.
“그는 때가 되면 나타날 것이다.”
그런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아르세우스를 제외하면 그녀가 유일하게 마음을 준 친구라더니, 그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음?”
“…?”
하르간이 왜 그러냐는 투로 빤히 바라봤고.
“말투가 조금 이상한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동생?”
“….”
엘릭의 태연스런 대답에 하르간은 다시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엘릭이 입꼬리가 장난스럽게 말려올라갔다.
“동생, 오. 빠. 에게 그런 말투는 아니지 않을까? 따라해 봐, 오. 빠.”
순간, 하르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새파랗게 어린놈에게 오빠 소리를 해야 한다니!
연상인 아르세우스도 그렇게 불러본 적이 없는데!
마음 같아선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는 노릇.
“…때가 되면.”
“응?”
“때가 되면… 나타날 겁니다… 오…!”
“오?”
“오…!”
“오오오?”
“오…!”
엘릭이 눈을 반짝일 때마다 하르간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겨울6장은 그 상황에 자기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면서도, 하르간이 받고 있을 심적 고통이 이해가 됐다.
“…빠.”
“그렇지!”
“으으으으!”
겨우 단어를 완성한 하르간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그래. 그렇게 말하니까 얼마나 좋아.”
“….”
“…그런데 주먹이 떨린다? 휘두를 거 아니지?”
“그… 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 하하. 하하하….”
하르간의 웃음소리에는 더 이상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엘릭은 여기서 슬쩍 한 발을 뒤로 빼기로 마음먹었다.
깐족거리는 것도 선을 지켜야하는 법.
그 선을 너무 많이 넘게 되면 뒤를 수습하기 힘들어진다.
“좋아. 좋아. 그런데 그게 무슨 말이야? 때가 되면 나타난다니?”
“숀은 나만큼…!”
하르간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을 이었다.
“…아니, 저만큼이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편이니까요. 다만, 저와는 결이 조금 다릅니다.”
“결?”
“저는 태생이 암살자입니다. 그래서 은둔해있는 것을 좋아하고, 밖으로 돌아다니기를 썩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숀은 다릅니다.”
“숀이라는 분, 기사 출신이셨지?”
하르간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활동하던 시절에 메르빙거만큼이나 유명했던 가문의 마지막 적자(嫡子)입니다.”
“…당시의 메르빙거 만큼이나?”
이건 엘릭도 들어보지 못했던 내용.
천 년 전이라면 사자공가도, 마탑도 존재하기 이전이다. 신교 동맹도 ‘동맹’을 이루지 못했던 상태.
메르빙거는 사실상 대륙의 최고 세력이라 할 수 있었을 텐데.
거기에 비견할 만 했다고?
하지만 단어 하나가 유독 가슴에 남았다.
마지막 적자.
그의 대에서 가문의 혈통이 끊겼다는 뜻이다.
‘…나와 비슷한 케이스네.’
엘릭 역시 천형(天刑)을 고치지 못했다면, 메르빙거의 대가 끊어졌을 테니까.
“그러다 보니 그는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합니다. 자신이 인정할 만한 실력자가 아니면 절대 모습을 내비치지 않죠. 그러나 그가 인정을 하게 된다면.”
“다르다?”
하르간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오토 한의 복심(腹心)이었던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엘릭도 고개를 끄덕였다.
6장들 사이에서 숀은 다른 별명으로도 유명하다.
오토 한의 오른팔.
하르간이 왼팔로서 메르빙거의 그림자를 자처했다면.
숀은 오토 한의 오른팔로서 메르빙거의 성벽이 되었다.
오토 한의 옆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 수호기사이기도 했다.
‘사실상 그 수호기사에게서 인정을 받는 것이, 겨울을 완성하는 최종 단계이겠지.’
엘릭은 깊은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하르간만 해도 만나는 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그보다 더한 숀을 만나기 위해선 대체 얼마나 시간을 들여야 하는 걸까.
조금 걱정이 된 탓이었다.
그런데.
“율호왕을 찾아봐라.”
“네?”
갑자기 나하트람이 툭 힌트를 던져주었다.
미아가 옆에서 어서 누나라고 부르라며 팔을 흔들고 있었지만, 여전히 못 들은 척 하면서.
“네가 황금사자와 싸운 이후로, 율호왕은 우리들과도 차례대로 비무를 치렀었어.”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그런데 왜…?”
말을 해주지 않았냐는 의문.
나하트람이 쓰게 웃었다.
“왜일까?”
“…율호왕이 이겼군요.”
“전승(全勝). 살다살다 그런 작자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나하트람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그때 다쳤던 오른쪽 어깨가 욱씬거리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경험한 패배에 다친 자존심은 생각보다 훨씬 컸고.
다른 6장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는. 안 졌어.”
미아만 빼고.
“넌 빠졌으니까 그렇지!”
“나. 달라. 너희들과. 싸움에. 미친. 단순한. 놈들.”
미아는 야만인들이라도 보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불러. 누나.”
“….”
나하트람은 욱하고 성질을 내려다가 다시 재빨리 미아를 바라봤다.
“하여간 개인 수련을 하겠답시고 떠나긴 했지만….”
“하르간이나 숀을 만나고 싶어 하겠네요.”
엘릭은 율호왕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그 호승심이라면 두 사람을 그냥 지나칠 리가 없겠지.
하지만 어둠의 바다에 있는 하르간은 사실상 그가 만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으니, 숀을 먼저 찾아갔을 것이다.
“맞아. 하지만 그 이상 알 수 있을 만한 단서는 우리도 없어서.”
나하트람은 안타깝다는 투였다.
내면세계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을 테니, 율호왕의 뒤를 쫓는다 해도 결코 만만치 않은 작업일 터.
그런데.
“아뇨. 그거면 충분해요.”
“응?”
엘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히려 잘 됐다는 투였다.
“굳이 찾을 필요 있나요? 같이 끄집어 올리면 되지.”
“…?”
“…?”
“…?”
“어떻게?”
“방법이 있나?”
겨울6장의 얼굴에 차례로 의문이 어리고.
엘릭이 씩 웃었다.
“율호왕을 부를 수 있는 아주 쉬운 방법, 있잖아요.”
“…!”
“…!”
“…!”
“아…!”
“…?”
나하트람과 체페슈, 다미르와 미아는 뭔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왜 그걸 생각지 못했을까 하는 표정.
그러면서도 기가 막힌 엘릭의 잔머리를 대단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역시 메르빙거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구나 싶었던 것이다.
다만, 그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하르간만큼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으니.
엘릭은 그런 동생(?)을 위해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율호왕이 가장 꺾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거든. 어쩌면 숀도 관심을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르고.”
엘릭은 어느새 찬란한 황금빛으로 젖어 있던 사자왕을 떠올렸다.
“황금사자. 그 자를 만나면 될 거야.”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