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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338화 (337/405)

2부 78화

하르간

엘릭은 자신을 향해 포효하는 하르간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아, 이거 너무 좋네.’

청춘의 인장을 활용한 심안은 거의 사기나 마찬가지였다.

예민해진 감각이며 몸놀림은 물론, 빠른 판단력까지.

오히려 자신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나름 그녀를 배려한다고, 한두 번 정도는 속아주려 했으나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이제 좀 잘 보여야지.’

속아주기도 전에 몸이 반사적으로 반응해버리니 원.

탁!

엘릭이 사슬을 당기니, 낫이 힘없이 따라왔다.

슬쩍 하르간의 얼굴을 보니, 그녀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울그락불그락 했다.

옆에서 톡 건드리면 터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

‘이제 슬슬 끝내볼까?’

휭휭휭!

엘릭은 사슬을 뱅글뱅글 돌리면서 눈을 반짝였다.

지금까지야 그녀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실력을 가늠할 의도였으니 쿡쿡 찔러보는 정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이제 ‘해볼 만하다’고 판단을 내린 이상, 시간을 더 끌 필요가 없었다.

남은 횟수도 몇 개 안 되기도 하고.

엘릭의 그런 생각은 하르간도 똑같이 내린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어떡하지…?’

조금 전에 버럭 화를 냈던 것과는 다르게.

이대로 있다간 천 년 전처럼 또 메르빙거에게 코뚜레에 걸릴지도 모르겠다는 위기감.

그런 생각에 하르간은 속이 바짝 타들어갔다.

대체 어디로 움직여야 하는 걸까?

마력을 유동해야 하나?

아니면 다른 ‘인격들’을 꺼내야 하나?

아니다.

그래서는 테스트에서 이길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정작 자신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하르간은 자부심 하나로 살았다.

그걸 절대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상태에서 대치하길 몇 분.

“하르간.”

엘릭이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

여전히 싱글싱글 웃는 낯을 한 채로.

“…왜 그러지?”

하르간은 웃는 엘릭의 낯짝을 휘갈겨버리고 싶은 마음을 꾹꾹 억누르면서 물었다.

“이대로 끝내기엔 너무 아쉽지 않아요?”

“뭐?”

이건 또 무슨 개수작일까.

하르간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팼다.

“아, 왜 그렇잖아요. 이왕에 하는 테스트인데, 그래도 마무리는 재미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너…!”

순간, 하르간은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울컥하고 말았다.

하지만 엘릭이 교묘하게 던진 말에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래서 하는 말씀입니다만. 저랑 내기 하나 하실래요?”

“…계속 말해봐라.”

제법 구미가 당기는 말이었으니.

“이번 기회를 마지막으로 이기는 사람의 소원을 하나 들어주기. 어때요?”

“남은 기회는 모두 없던 것으로 하고?”

“그럼요. 구미 당기지 않아요?”

“…으음.”

하르간이 눈을 가늘게 뜨며 생각에 잠겼다.

어쩐지 엘릭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따지고 보면 썩 나쁘지 않은 내기였다.

대략 지금 엘릭에게 남은 기회는 4번 남짓.

그것을 한 번으로 줄일 수 있다?

‘이번 한 번 정도는 충분히 안 잡힐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녀라고 해서 숨겨둔 비술이 없는 것도 아니니.

더군다나 메르빙거에게 강제 소원권을 쓸 수 있다는 말은 아주 구미가 당기는 것이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찾아오지 말라며 소원을 빌 수도 있고.

혹은 자신이 못 다한 미련에 대해서도 시켜 먹을 수도 있다.

‘여태 놀림 받은 것에 대해 마음껏 되갚아줄 수도 있고.’

엘릭은 아직 모르고 있었지만, 하르간은 속이 아주 좁은 편이었다.

결국 하르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릭도 뭔가 노림수가 있으니 이딴 제안을 한 것일 테지만.

‘그 낯짝을 아주 보기 좋게 다져주마.’

하르간은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메르빙거에게 세상의 쓴맛을 톡톡히 맛보게 해 줄 참이었다.

“좋다. 나중에 다른 말 했다간 가만 안 둘 것이니 그리 알거라.”

“속고만 사셨어요?”

“메르빙거한테는 그랬지.”

“….”

이번에는 엘릭도 할 말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자신도 같은 메르빙거들에게 한두 번 속은 게 아니었으니.

“크흠! 험험! 저는 선조님들과 다르게 아주 착한 메르빙거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퍽이나 그렇겠군.”

엘릭이 헛기침을 하면서 변명을 둘러댔지만, 하르간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하여간 이게 전부 다 못된 선조님들 때문이야. 대체 다들 어떤 삶을 사셨기에 이렇게 신뢰를 못 사는 거야?’

엘릭은 평소 자신이 하는 짓은 전혀 생각지도 않은 채, 아르세우스나 오토 한을 원망하면서 다시 자세를 갖췄다.

‘그래도 뭐, 걸렸으면 됐지.’

사실 그도 몰랐던 것이다.

하르간이 이렇게 순진하게 걸려들 거라고는.

그렇게 메르빙거에게 시달렸을 텐데도 이렇게 또 걸리는 걸 보면 사실 속은 착한 사람이 아닐까.

탁!

그런 생각과 함께 손끝에 다시 낫이 잡히고.

파아아앗-

두 사람이 다시 지면을 박차며 움직였다.

‘이러면서 하나 둘씩 배우시는 거지.’

문득 메피스토가 곁에 있었다면 그녀에게 안쓰러운 눈빛을 보냈을 것만 같았다.

* * *

남은 겨울6장들은 혼자 돌아온 미아를 보며 하나 같이 놀란 표정이 되었다.

“설마… 엘릭이 어둠의 바다를 혼자서 건넜나?”

체페슈가 묻자, 미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하지만. 하르간. 위험해.”

체페슈를 비롯한 다미르와 나하트람이 차례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받는 걸 제일 싫어했던 친구였으니. 그럴지도.”

“설득하는 과정에서 몇 번 죽겠는데?”

내면세계인 만큼 실제로 죽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죽음’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정신적인 충격은 고스란히 남으니까.

그 과정이 계속 반복되면 자칫 폐인이 될 수도 있었다.

사실 지금까지 엘릭이 버틴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던 것이다.

“하르간을 상대로 몇 합이나 버티려나?”

나하트람은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면서 질문을 툭 던졌다.

그들 네 명 역시 살아생전에는 손에 꼽히는 강자들이었다지만.

그래도 하르간은 그들이 절대 못 미치는 실력을 지니고 있었으니.

또 그만큼 하르간은 자신의 신념이 아주 강한 편이었다.

귀찮게 하는 존재가 있다?

손속에 절대 자비를 두지 않았다.

그것이 설사 메르빙거라 해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엘릭의 성격도 좀 지랄 맞은 게 아니지 않나? 오토 한이 그랬던 것처럼 순순히 넘어올지도?”

“당시에 오토 한은 이미 ‘겨울’을 완성했을 때가 아니었나. 지금의 엘릭과 비교하긴 힘들지.”

“그래도 엘릭 같은 메르빙거다운 메르빙거도 잘 없으니까… 결국에 데려오지는 않을까?”

그래도 여론은 결국 ‘엘릭이 하르간을 데려오긴 데려올 것이다’로 기울었다.

그동안 그들이 봤던 엘릭의 그릇과 실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좀 짜증나는 게 아니어서 문제였지.

다만, 그 과정에서 엘릭이 몇 번 죽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렸다.

“고양이처럼 한 9번은 죽지 않을까?”

“어림도 없는 소리. 하르간이 어떤 놈인데. 못해도 스무 번은 될 거라고 본다만.”

“뭐? 엘릭이 이룬 경지가 있는데 무슨 스무 번이야?”

“상대는 하르간이다, 나하트람. 과거에 그녀에게 그렇게 당해놓고도 정신을 못 차렸나 보군.”

“뭐? 당하긴! 스무 번이라 말한 너나 당했지. 난 그래도 비등했거든?”

“아니었던 것 같은데.”

“왜? 지금이라도 확인해볼래?”

“나쁘지 않지.”

체페슈는 나하트람과 다미르의 설전을 지켜보다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한마디 툭 뱉었다.

“멍청하긴. 지금껏 엘릭을 봐놓고도 모르나? 내가 딱 정해주지. 열 번. 정확히 열 번일 것이다.”

그러자 이번엔 불똥이 그에게로 튀었다.

“넌 또 뭔 헛소리야?”

“매일 해골만 가지고 놀더니 똑같이 골이 비었나 보군.”

체페슈는 팔짱을 끼며 콧방귀를 낄 뿐이었다.

“하여간 무식하게 몸만 쓰는 것들 같으니라고. 너희들이 위대한 마법사들에 대해 대체 뭘 알까? 그렇지 않나, 미아?”

그 한마디에 셋의 시선이 전부 미아에게로 쏠렸다.

“…난. 왜.”

그녀는 부담스러운 눈길에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그녀로서는 이딴 것으로 말싸움을 벌이는 이 세 명이 한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열 번이면 어떻고 스무 번이면 또 어떻단 말인가.

결국 엘릭이 하르간을 설득하는 것이 중요한 거지.

“그러니까 어떻게 생각하냐고. 응?”

“내 말이 맞다고 생각하지?”

“뭐래는 거야. 내 말이 맞지? 그렇지?”

“….”

얼굴도 시커먼 남정네 셋이 제 의견에 동조해달라며 동시에 얼굴을 밀어붙여 온다.

그것이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아무 대답도 안 해줬다간 끈질기게 들러붙을 게 뻔한 일.

결국 미아는 가볍게 한숨을 푹 내쉬면서 자신의 생각을 꺼내야만 했다.

“…한 번.”

“….”

“….”

“….”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풉!”

누군가의 웃음을 시작으로, 세 남자는 모두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푸하하하!”

“들었냐? 한 번이란다! 한 번!”

“그건 좀 아니지 않은가?”

“재밌는 농담이었어, 미아.”

어찌나 웃는지, 그들의 눈가엔 모두 눈물이 맺혀져 있었다.

순간, 평소 감정 표현이 적던 미아의 얼굴에 짜증이 어렸다.

이럴 거면 차라리 묻지를 말던가. 대답하고 나니 비웃는 꼴은 대체 무엇인지.

“그럼. 해. 내기.”

그 때문에 미아는 평소라면 생기지 않을 오기가 생기고 말았고.

“응?”

“내기…?”

“오, 그거 좋지.”

다른 세 명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다미르가 이어서 말했다.

“정답에 가장 근접한 이를 앞으로 큰형이나 큰누나로 모시기로 하지, 어떤가?”

“좋다.”

“후후! 오늘 못생긴 동생들이 잔뜩 생기겠는걸.”

애당초 세 사람은 미아가 내기에서 이길 거라고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미아가 못 마땅한 모습으로 그들을 바라보던 그때였다.

“오, 갑자기 덩치 큰 세 동생을 두게 되셨네요?”

언제 왔는지 엘릭이 미소를 지은 채 나타났다.

순간, 미아를 비롯한 겨울6장들의 시선이 똑같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모두가 놀란 얼굴.

그가 이렇게 빨리 돌아올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덩치 큰 세 동생이라니? 미아가 이겼다고?”

“내가 잘 못 들은 거지?”

“테스트는? 그런 거 아예 없었어?”

나하트람, 다미르, 체페슈가 모두 잔뜩 안달 난 표정으로 질문을 쏟아냈고.

“마침 저도 예쁜 동생이 하나 생겼거든요?”

엘릭은 대답 대신에 씩 웃어 보였다.

“동… 생?”

“서, 설마…?”

순간, 세 사람의 동공이 미친 듯이 지진을 일으켰다.

“이참에 동생들끼리 인사 나누시죠. 뭐해요? 어서 나와서 동. 생. 들. 끼. 리. 인사 나누시지 않고.”

엘릭의 시선이 돌아간 곳. 네 사람의 고개도 똑같이 돌아갔다.

그러자 하르간이 잔뜩 풀이 죽은 채로 모습을 드러냈다.

밖으로 드러난 한쪽 눈에 우울함이 가득했다.

“…!”

“…!”

“…!”

이를 본 나하트람과 다미르, 체페슈의 얼굴이 절망감으로 물들었다.

하르간의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엘릭은 단 한 번도 죽지 않았다는 것을.

터억!

바로 그때, 미아가 그들의 어깨에 작은 손을 얹었다.

“뭐해.”

끼기긱. 마치 고장난 로봇처럼 돌아간 세 사람의 시야에 차갑게 웃는 미아의 얼굴이 잡혔다.

“큰절. 해. 누나한테.”

어쩐지 그 웃음이 메르빙거 같아 보였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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