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77화
하르간
하르간이 여태 경험한 메르빙거란 놈들은 하나 같이 고집이 세고 인성이 글러 먹었던 놈들.
여전히 ‘봄’의 아르세우스를 사랑하긴 하지만… 그래도 사실은 사실이잖아?
특히 그녀를 메르빙거로 데려왔던 오토 한은 지금도 이가 갈릴 정도로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었다.
이렇게 하자면 싫다, 저렇게 하자고 해도 싫다. 싫은 건 뭐가 그렇게 많은지, 아주 입에 ‘싫다’는 말을 달고 살았었다.
하물며 이 녀석은 당대의 메르빙거 가주였다.
말을 잘 들을 리가 없잖나.
“….”
결국 하르간은 빤히 엘릭을 쳐다보았고.
엘릭은 그런 그녀의 시선을 느끼곤 어깨를 으쓱거렸다.
“왜 그렇게 보시는지는 알겠는데…. 저 그렇게 싫다는 거 강요하는 사람 아닙니다?”
“…그래. 그럼 이 이상 귀찮게 하지 말고 썩 꺼져.”
하르간은 솔직히 지금도 믿기가 어려웠지만, 내친 김에 잘 됐다는 듯이 휘휘 손을 저었다.
“넵!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엘릭은 그렇게 미련 없이 뒤를 돌아 왔던 길로 향했다.
그러면서 보란 듯이 한쪽 소매를 걷더니 인장 위를 손으로 벅벅 긁었다.
“아… 이건 앞으로 평생 못 쓰겠네. 어쩔 수 없지. 아르세우스가 어어어어엄처어어어엉 슬퍼하겠어.”
당연한 말이지만, 속살 위에는 청춘의 인장이 보란 듯이 드러나 있었고.
지금껏 미동조차 하지 않던 그녀의 동공이 조금씩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빙고.’
그녀는 아직 자각하지 못한 것 같았지만, 의자에 걸쳐져 있는 손에도 부쩍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빠직!
의자가 괴상한 소리를 내면서 갈라지기 시작했다.
* * *
사실 엘릭도 하르간을 회유하는 게 쉬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토 한과 하르간이 계약 관계라는 것도 진즉에 겨울6장에게 들었던 내용이었고.
하지만 하르간이 메르빙거에 합류하게 된 계기가 아르세우스 때문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가 좋아서 안달이었다지? 으흐흐흐!’
메피스토가 봤으면 또 저 웃음이냐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을 엘릭의 모습을 보면서.
까드득!
하르간은 그런 엘릭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엘릭의 노림수가 무엇인지 알아챈 것이다.
‘그럼 그렇지.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어.’
부탁할 때부터 아르세우스를 언급하면 도리어 자신의 반감을 살 수 있으니 일부러 연기를 한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서.
문제는 지금 상황이 전부 엘릭의 개수작임을 알면서도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녀석이 일부러 슬쩍 보여준 인장에선 그토록 그리워하던 이의 향기가 짙게 배어 있었다.
외면하고 싶어도 외면할 수 없는 이끌림.
‘짜증나!’
엘릭의 꾀에 넘어가는 게 싫어 자존심을 지키려고도 했지만.
그래도 어쩌겠나?
사람이 된 이상 감성이 앞서는 건 어쩔 수 없을 일일진대.
-아르세우스가 어어어어엄처어어어엉 슬퍼하겠어.
저 말이 더 짜증났다.
자꾸만 메아리처럼 귓가를 왱왱 맴도는 것 같았다.
아르세우스가 슬퍼한다니.
죽는 것만큼이나 싫다. 생각하기도 싫었다.
심지어 그게 자신 때문이라면?
물론, 아르세우스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안다.
저것이 엘릭이 아무렇게나 떠든 헛소리라는 것도.
하지만 ‘설마 진짜 그렇게 된다면?’이라는 생각이 자꾸 그녀의 마음을 괴롭혔다.
결국.
“…하여간… 빌어먹을 메르빙거 자식들.”
하르간은 이를 악문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야만 했다.
어느새 반으로 완전히 쪼개진 의자가 옆으로 쓰러졌다.
자신의 마음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도, 저놈은 보란 듯이 여전히 등을 보이고 있었다.
하여간 얄미웠다.
“거기 서.”
엘릭은 순간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그녀를 돌아봤다.
속과 달리 여전히 얼굴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
그 모습이 더 하르간의 속을 끓게 만들었다.
“응? 왜 그러십니까?”
“….”
하르간은 눈으로 엘릭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면서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자 오른손을 감고 있던 붕대가 풀리면서 안쪽에서부터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낫?’
말 그대로였다.
농작물을 밸 때 쓸 것 같은 낫.
차이점이 있다면 자루와 날이 전부 크다는 것 정도?
“낫은 전통적으로 추수를 할 때 쓰는 물건이다. 동시에 겨울이 곧 다가온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물건이기도 하지.”
그녀는 엘릭에게 낫을 던져주며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낫은 풍요와 수확을 뜻하면서도, 반대로 죽음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엘릭은 엉겁결에 낫을 받았다.
하르간의 무기가 특이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것을 선물해준 이가 바로 아르세우스라는 것도.
다만, 이렇게 처음부터 손에 쥐어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불그스름하게 변한 쇳날이 유독 눈에 띄었다.
“지금부터 그걸 가지고 날 잡아라.”
하르간의 설명은 간단했다.
자신은 절대 이 오두막집과 마당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대신에 너는 낫을 던지든 휘두르든 해서 어떻게든 자신을 다치게 해보라는 것.
엘릭은 혹시 낫에 다른 장치가 있나 싶어 이리저리 확인해봤지만.
단단하다는 것 외에 별다른 특징은 없었다.
“정말 그거면 되나요?”
하르간의 협조를 구하거나, 그녀의 기술을 배우러 온 것이기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얻어가는 건 네가 알아서 얻어가도록.”
하르간은 그 말만 남기고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사라졌다.
휘리릭!
“아, 음. 어렵네.”
엘릭은 낫의 자루로 뒷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아주 잠깐 동안 보게 된 하르간의 움직임이었지만.
하르간의 움직임은 정말이지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표홀하고, 예리하다.
바람, 그 자체가 된 것 같은 모습.
그 자연스러운 몸놀림만으로도 어째서 그녀가 겨울6장 중에서 최고라 꼽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살수다운 움직임…. 게다가 하르간의 장기는 이게 끝이 아니라고 들었는데.’
처음 마주쳤을 때 보였던 살기.
그것만 자유자재로 다뤄도 활용할 수 있는 범위가 아주 넓을 것이다.
그러니 시험을 이 좁은 구역으로 한정시켰다고 해도, 하르간을 따라잡아 상처까지 입히기란 쉽지 않을 게 분명했다.
하르간으로서는 아르세우스에 대한 미안함을 덜어내고, 엘릭을 완전히 쫓아내 버리기 위한 마지노선일 테지.
다만, 문제가 있다면.
‘…나한텐 너무 쉬운데?’
하르간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지만.
사실 엘릭에겐 그녀의 움직임이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보였다.
그녀가 향하려는 방향부터, 딛는 발의 위치.
그리고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중심을 잡기 위한 모든 미세한 움직임들 하나하나까지, 전부.
심안.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결을 드러내는 이 눈이 있는 한, 그녀는 어디로 숨어도 움직임을 모두 들킬 수밖에 없었다.
이를 테면, 상성 차였다.
‘게다가… 어디쯤에 나타날 건지도 알 수 있어.’
그녀가 이동할 때 얼마만큼의 힘을 쓰는 지까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으니, 위치를 예측하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머리.’
쉭!
엘릭은 그렇게 생각하며 적당히 고개를 숙였다.
하르간의 다리가 그의 머리가 있던 곳을 날카롭게 훑고 지나갔다.
허?
그런 한숨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뒤따라 피식 웃는 소리까지도.
엘릭이 공격을 피한 것을 우연이라고 생각한 것일 테지.
하르간이 다시 빠르게 움직였다.
‘문.’
그녀의 몸이 곧바로 오두막집의 문으로 향했다.
‘다시 머리.’
그러곤 문을 박차고 총알처럼 다시 엘릭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왔다.
이번엔 엘릭은 가볍게 몸을 돌리는 것으로 공격을 피했다.
흡!
하르간이 당혹해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제야 엘릭이 공격을 피해낸 것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이어져라】.”
촤르륵!
엘릭은 낫의 자루 끝부분에서부터 얼음 사슬을 길게 뽑았다.
그러곤 재빠르게 사슬을 왼손에 한 바퀴 감은 뒤, 아무것도 없는 오두막집 지붕을 향해 낫을 힘차게 던졌다.
쐐애액-
낫이 아주 빠르게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가로지른다 싶을 때였다.
파악!
그곳에서 하르간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거칠게 낫을 낚아챘다.
“…운이 좋구나.”
그녀는 손에 들린 낫을 흘낏 보고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러곤 짜증난다는 듯이 낫을 허공에 툭 던졌다.
엘릭은 사슬을 당겨 그대로 회수했다.
“횟수 제한 같은 건 없죠?”
“…이제 한 번. 앞으로 아홉 번 안에 날 잡아라.”
“치사하게.”
“싫으면 꺼지던가.”
파앗!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다시 모습을 감췄다.
그러나.
쐐애애액-
파악!
낫이 다시금 자신을 향해 정확히 날아왔을 때.
그녀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어, 어떻게…?”
반면, 엘릭도 얼떨떨한 얼굴이 되었다.
‘…진짜 너무 쉬운데?’
오죽하면 이렇게 날로 먹어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 * *
촤르르륵-
쉬쉬쉭!
엘릭이 사슬을 이용해 낫을 아무 방향으로나 휘둘러댔다.
겉보기엔 마구잡이로 그러는 것처럼 보였지만, 허공을 비행하는 낫이 도착하는 곳은 항상 똑같았다.
파악!
바로 하르간이 서 있는 자리.
“…제기랄!”
그녀는 가까스로 방향을 틀어 엘릭이 날린 낫을 피했다.
이번이 몇 번째였더라?
다섯 번째?
아니, 여섯 번째였던가?
횟수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어디로 가든지 매번 낫은 그녀가 있는 곳을 귀신같이 알아내고, 그때마다 상처를 입을 뻔했다는 것.
한때 음지의 제왕으로 악명이 자자했던 그녀로서는 동종 업계의 사람이 아니라 일개 마법사에게 읽힌다는 사실이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문제는 결과가 그런 자존심과 전혀 무관하다는 것이지만.
촤륵!
곧바로 낫을 회수한 엘릭은 낫이 손이 들리기 무섭게 다시금 다시 낫을 날렸다.
“흡!”
휘리릭!
공중에서 재빨리 몸을 회전시켜 이를 피한 그녀는 식은땀을 흘렸다.
‘이게 대체 뭐야?’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 이리도 자신을 쉽게 찾아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속도를 높여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머리를 노리고 날아오는 낫.
아무리 마력을 쓰지 않고 순수한 신체 능력으로만 상대하고 있다지만.
그래도 도저히 이해가 안 갔다.
심지어 애초에 이 시험의 목적은 암습을 계속 가하는 것으로, 죽음의 위기를 느끼게 하고 엘릭의 감각을 날카롭게 세우는 데에 있었다.
덤으로 그 과정에서 그의 육체도 넝마가 될 테니, 이를 회복해 주며 청춘의 인장도 덩달아 발전할 거고.
그러면서도 내심 엘릭이 시험에 질려 제 발로 나가기를 바라기도 했다.
‘자신은 인장을 성장시킬 기회를 줬으나, 엘릭이 무능력했다’는 식의 핑계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지금 꼴은 마치 자신이 사냥당하고 있는 꼴이 아니던가?
그 탓에 암습을 시도해 보기는커녕, 계속해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살수로서 누군갈 죽여 본 경험만 있던 하르간에게 지금과도 같은 기분은 정말이지 더럽기만 했다.
“하아아암!”
거기다 지루하다는 듯이 하품을 해대는 꼴이라니!
생전 어디에서도 이딴 무시를 받아본 적이 없었는데!
하르간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단단하게 솟았다.
하지만 그러기 무섭게.
파앗!
“….”
자신을 향해 낫이 쇄도해 왔다.
그녀는 허망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에 들린 낫을 바라봤다.
그녀가 낫을 돌려주지 않자, 엘릭은 다시 보란 듯이 하품을 쩌억 해대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뭐해요? 쫄?”
뚝!
그 순간, 하르간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하여튼 이놈의 메르빙거 자식들!!!”
엘릭을 만난 지 아직 반나절도 채 되지 않았지만.
속에서 쌓일 대로 쌓인 짜증이 터져 나왔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