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76화
하르간
“저한테 바란다니, 무엇을…?”
문득 창천의 신이 사르나이에게 빙의했을 때가 떠올랐다.
당시에 창천의 신은 조부와 시조, 둘 모두를 언급하지 않았던가.
그것과 어떤 연관이 있는 걸까?
다미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하다.”
“그게 뭐죠?”
“사계를 모두 손에 넣고 나면 자연스레 알게 될 테니, 조급해하지 말아라.”
“…또 그 말입니까. 알았습니다, 알았어요. 쳇.”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아닌 모양이었다.
애당초 이놈의 가문은 남이 쉽게 뭘 이루는 꼴을 못 보고 제대로 알려주는 게 없었으니까.
사계를 얻으면 알게 된다니.
누가 메르빙거의 가신 아니랄…!
그러다 불현듯 떠오른 메피스토가 했던 한 마디.
-네 시조의 비원?
-대자연(大自然), 자연 그 자체였다.
대자연.
거창하게 생각하면 삼라만상의 모든 것이라 할 수도 있었지만.
간단하게 생각하면, 지극히 단순하게 정의 내릴 수도 있었다.
‘사계가 모이면 그게 곧 대자연이잖아?’
* * *
엘릭은 다미르와 대화를 마치곤 저번처럼 미아와 함께 하르간이 있는 심연의 늪으로 향했다.
“오늘은. 성공해. 빌게.”
미아는 엘릭의 등을 두드려주다가 천천히 늪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엘릭이 아무런 방해 없이 집중할 수 있게 배려해주는 것이었다.
“고맙습니다.”
엘릭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늪을 응시했다.
검다기보단 어둡다고 표현하는 게 더 알맞아 보이는 색.
처음 왔을 때도 느낀 거지만, 이곳은 빛 한 점 비치지 않는 심해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찰랑찰랑.
몇 걸음 다가가니, 파도가 발목을 가볍게 적셨다.
마치 이번엔 제대로 들어올 수 있겠냐고 도발하는 것 같았다.
‘무슨 짓을 해도 다 실패했었지.’
이 늪은 모든 접근을 차단한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동안 어떻게 건널 수 있을까 한참 고민했고, 그에 대한 해답을 얻었으니까.
‘자기영역.’
휼과 오거스틴, 그리고 가이를 보며 깨우칠 수 있었다.
늪은 모든 것들을 삼켜 버린다.
거기서 의식을 보존하려면 자기영역을 확고하게 만들어서 의식을 보호시킬 필요가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아직 영역을 만들 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기본적으로 영역은 ‘자신의 비원’에 염두를 두는 것.
가령 네레스타를 누구도 넘보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 스스로가 괴물이 되고자 하는 가이. 세상에 복수와 공포를 심어주려는 휼.
둘은 자신만의 비원으로 세계를 개변시킨다.
그리고 그 비원은 무의식 깊숙한 곳에 자리하기 마련.
그러니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깊은 무의식 속의 비원을 깨닫는다면, 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생기는 것이다.
심연의 늪은 무의식의 바다라 할 수 있는 바.
결국 해답은 바로 저 안에 있었다.
‘내 비원은 뭐지?’
엘릭은 늪을 향해 한 발자국 더 다가가며 생각했다.
출렁이던 수면이 서서히 잔잔해지면서 거울처럼 그의 얼굴을 조금씩 비췄다.
엘릭과 물에 비친 엘릭이 눈을 마주쳤다.
“….”
….
긴 침묵이 이어졌다.
엘릭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자기 자신에 대해 곱씹었다.
지금껏 어떻게 살아왔는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답을 알 수 없는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도무지 그 끝을 알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저 심연 속으로 자신이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마침내 그 끝에 닿았을 때.
엘릭은 소회(所懷)한 바를 천천히 입에다 담았다.
마치 주문처럼.
“…온전한 나. 온전한 가문, 온전한 세계를 세우는 것.”
솨아아아-
그러자마자 수면의 떨림이 모두 멈추고 늪에 고요가 찾아왔다.
엘릭이 자신의 비원을 깨닫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
그 순간, 뒤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던 미아는 놀란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욕망을 똑바로 쳐다봤다고?’
비원을 깨닫는 것은 일반적인 마법사들에게도 아주 고된 작업이었다.
물론,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있다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 ‘아는’ 게 아니었다.
원하는 게 무엇인가? 꼭 이루고자 하는 게 무엇인가?
비원은 결코 그 정도로 가볍지 않았으니.
자신이 목숨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선, 긴 시간의 고뇌와 행동, 그리고 반성이 의무적으로 따라야 했다.
그런데 엘릭은 단숨에 그 모든 과정을 뛰어넘었다.
그만큼 그가 겪었던 일들이 무거웠던 것일까?
어쩌면 남들에게는 수십 년에 걸친 세월이, 엘릭에게는 단 몇 년으로 압축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어쩌면.
‘그것이 메르빙거의 가주들이 가져야만 하는 의무일지도….’
하지만 마음 아파하는 미아와 다르게 엘릭은 웃고 있었다.
드디어 심연의 늪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생겼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드디어 하르간을 볼 수 있겠네요.”
그는 미아를 돌아보며 그렇게 말하곤, 곧장 수면 위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어두운 물결이 차가웠다.
하지만 엘릭은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럴 때마다 그는 서서히 늪 속으로 가라앉았다.
발목에서부터 시작된 물결은 어느새 거의 머리끝까지 닿아있었다.
그럼에도.
엘릭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 * *
그렇게 얼마나 들어갔을까.
수면은 아득하게 멀어진 지 오래였다.
‘말이 늪이지, 이건 그냥 바다잖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둡고 깊은 무의식의 바다.
하지만 이전과 다르게, 더 이상 그 바다는 엘릭을 밀어내지 않았다.
그렇게 발을 디딜 곳까지 사라지고.
엘릭은 이제 여유롭게 헤엄치면서 더 깊숙한 곳으로 가라앉았다.
앞이 보이지 않아 제대로 길을 찾아가고 있는 게 맞나 싶기도 했지만, 그는 스스로를 믿었다.
‘온전한 나. 온전한 가문. 온전한 세계. 온전한 나. 온전한 가문. 온전한 세계…’
비원을 계속 되뇌던 그때, 갑자기 눈앞으로 황금빛의 작은 구(球) 하나가 만들어졌다.
마치 이곳으로 오라는 듯.
‘온전한 나. 온전한 가문. 온전한 세계.’
빛의 구가 계속 크기를 부풀렸다. 엘릭을 감싸고, 물살을 밀어냈다.
쿠쿠쿠쿠!
그 순간, 한쪽에서 격류가 일어나면서 엘릭을 밀어내고자 했다. 하지만 구는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엘릭을 계속 심해의 끝으로 안내하다가 끝끝내 주변을 모두 환하게 밝혔다.
빛의 구는 엘릭의 의식을 집중시킨 의념(意念)이었으니.
이를 바로 무의식의 바다 한가운데에 완전히 심어두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번- 쩍!
어두운 해저에서 거대한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두 눈은 정확히 엘릭에게 향해 있었다.
[…귀찮게 굴지 말라고 오지 말라 막았던 건데. 기어코 오고 말았군.]
어딘지 모르게 한숨이 가득 섞인 목소리였다.
짜증도 다분히 섞여 있었다.
[손님이 왔는데 계속 이렇게 두기만 하실 겁니까? 숨 막혀 죽을 거 같은데요.]
엘릭은 목소리의 주인이 하르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유들유들하게 웃었다.
[…]
정작 하르간은 어이없어 보이는 눈빛이었지만.
[하아…! 어쩔 수 없지. 따라와라.]
그녀가 말을 마치자, 엘릭을 이리저리 흔들던 격류가 거짓말처럼 멈췄다.
마음 편히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자, 엘릭은 점점 아래로 내려가는 하르간의 눈을 따라 보다 더 깊은 해저를 향해 헤엄쳤다.
‘이제 슬슬 힘에 부치는데.’
이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길어봐야 1, 2분 정도일까.
그래도 다행히 그때쯤 최하단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뿐!
엘릭은 가볍게 바닥에 착지했다.
여기서부터 하르간의 영역인지, 바다 한가운데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편하게 숨을 쉴 수 있었다.
“후우우! 으으, 이제야 좀 살겠네.”
엘릭은 숨을 몇 번이나 고르다 몸이 좀 편해졌다 싶은 뒤에야 겨우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지금껏 헤엄쳐 왔던 길이 밤하늘처럼 어둡게 펼쳐져 있었다.
그 사이사이로 작은 빛이 별처럼 흐르는 것도 보였다.
마지막 순간 엘릭이 남긴 자신의 ‘의념’이었다.
“쓸데없는 건 그만 보고. 용건이나 말해.”
엘릭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가 살짝 놀라고 말았다.
아무것도 없던 지층 한가운데에 어느새 오두막집 한 채가 놓였기 때문이었다.
그 앞마당에 한 여인이 아니꼬운 눈빛으로 평상에 앉아 엘릭을 보고 있었다.
붕대로 몸을 줄줄 감아 한쪽 눈만 드러낸 해괴한 행색의 여인.
‘하르간.’
확실히 다른 겨울6장들에게 들었던 느낌만큼이나 독특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하나뿐인 눈을 마주하고 있노라니, 등골을 따라 소름이 저절로 오소소 돋았다.
‘살수라더니.’
눈빛부터가 날카롭게 벼린 칼처럼 예리했다.
힘을 빼고 있는데도 이 정도다?
왜 겨울6장들이 자신들 중에 최고로 그녀를 꼽았는지를 알 것 같았다.
“겨울을 완성하고자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하르간 님의 도움이 필요하구요.”
엘릭은 귀찮은 티를 팍팍 내는 그녀의 눈빛을 무시하고 협조를 요청했다.
당신도 겨울6장이라면, 메르빙거의 당대 가주의 부탁을 함부로 거절하기 어려우리라 생각하면서.
그런데.
“싫다.”
“…예?”
너무나 단호하게 돌아온 즉답.
엘릭은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하르간의 눈빛은 그대로였다.
“방금 제대로 듣지 않았나? 싫다고. 겨울이라면 오토 한을 말하는 거 아닌가?”
“…맞습니다.”
“그와 나는 계약 관계였지 주종관계가 아니었어. 그러니 다른 놈들처럼 반드시 네 부탁을 따라야 할 의무가 내게는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엇보다…?”
“…죽어서는 좀 조용히 살고 싶다.”
하나밖에 내놓지 않은 그녀의 눈에선 어째서인지 수많은 감정이 느껴졌다.
피로.
권태.
짜증.
어쩐지 그녀가 살아생전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으음…. 이건 생각지 못했던 대답이라.”
“그런가? 하여간 내 알 바는 아니니 이만 돌아가.”
하르간은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명백한 축객령.
“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어쩔 수 없죠. 알겠습니다.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그래. 돌아가… 뭐?”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는지, 하르간은 살짝 놀란 눈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하르간 님께서 싫으시다면 어쩔 수 없죠.”
“….”
망설임 없이 뒤돌아 가는 엘릭을 보면서.
하르간은 샐쭉하니 의심의 눈초리가 되고 말았다.
메르빙거가… 이렇게나 말을 잘 듣는다고?’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