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73화
신교 동맹
엘릭은 곧장 남부로 떠날 준비를 마쳤다.
시종들이 그가 탈 마차에 여러 짐들을 실었다. 그럴 때마다 마차가 요란하게 들썩거렸다.
“꺄아아! 드디어 우리 용용이들이 보석 숲으로 가네요.”
마차 안에서는 타샤가 이미 잔뜩 들뜬 상태로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이번 일정에는 타샤와 션도 동행하기로 이야기를 나눈 상태.
타샤는 용의 생태계에 대해 엘릭보다 많은 지식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화염 계통 마법에도 정통하기 때문이었고.
션도 우스던 아카데미의 최연소 교수 자격을 획득할 정도로 풍부한 지식을 갖고 있어서였다.
‘…뭐, 이게 맞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헤헤헤헤.”
엘릭은 새끼 용들을 전부 품에 안은 채 침을 질질 흘려대는 타샤를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녀는 한창 들뜬 상태였다.
어쩌면 보석의 숲에서 새끼 용들이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일지도 몰랐으니까.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을지 모르니 잔뜩 마음이 부푼 것이다.
반면, 션은 그런 타샤를 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에게는 그토록 사납고 거칠었던 누나가 낯선 모습을 보이니 도통 적응이 되지 않은 탓이었다.
거기다 엘릭과 함께 있으면 항상 무슨 일이 생기곤 하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휴…!”
션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준비가 끝난 모양이었다.
이랴!
말채찍 소리와 함께 마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 잠시만요!”
얼마 가지 않아 마차를 세울 수밖에 없었으니.
갑자기 네레스타 가의 시종 하나가 빠르게 달려와 마차를 멈춰 세운 것이다.
“어엇!”
마부가 말고삐를 확 당기자 마차가 덜컹거리며 제자리에 멈췄다.
다급한 목소리에 엘릭은 물론이고, 안에 있던 이들이 창틀 너머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급하게 왔는지 시종은 거칠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션이 던진 질문에 시종은 한참 동안 호흡을 고른 뒤에야 겨우 입을 뗼 수 있었다.
“엘릭 님, 잠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습니까?”
“엘릭을?”
“저 말씀이십니까?”
엘릭이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션도 전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
“예! 다름이 아니라 지금 가주님께서 신교 동맹의 교황을 만나고 계시던 중에….”
여전히 숨이 돌아오지 않았는지, 그는 힘겹게 침을 삼키곤 숨을 내뱉었다.
“교황청에서 엘릭 님을 직접 뵙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요청을 하였습니다.”
“음…?”
전혀 예상치 못한 말.
엘릭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렇게 갑자기?
그런데.
“….”
어쩐지 이쪽을 보는 션의 눈초리가 좋지 않았다.
엘릭이 인상을 팍 찡그렸다.
“…그 눈빛은 또 뭐냐?”
“또 무슨 사고 쳤지? 좋은 말로 할 때 말해.”
“내가 사고 치긴 무슨 사고를 쳐!”
“그게 아니면 교황이 갑자기 너를 왜 찾는 건데? 신교 동맹 쪽과 무슨 관계라도 맺은 적 있어?”
“있겠냐?”
“그럼 더 말이 안 되잖아.”
“아, 글쎄. 난 정말 모른다니까?”
엘릭이 주먹으로 가슴팍을 두들기면서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션의 눈초리는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도와달라고 타샤를 보았지만.
“…죄송해요.”
타샤가 계면쩍은 얼굴이 되더니 슬쩍 시선을 돌렸다. 사과까지 던지는 것이 확인 사실이었다.
타샤 님까지…!
엘릭은 더 충격받은 얼굴이 되고 말았고.
『쯧쯧. 이러니 평소 평판이 중요한 것이니라.』
[…조용히 좀 해주지 않으실래요?]
깐족대는 메피스토 때문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하아!
엘릭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다가, 다시 시종 쪽을 돌아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짐작가는 이유가 전혀 없다.
그동안 저들과 이렇다 할 접점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심지어 그와 헤이즈는 무신론자에 가까운 성격이어서 그 흔한 교회 한 번 간 적이 없었다.
“어려운 건 아니니, 일단 그러죠 뭐.”
어차피 교황청은 남부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시간을 잡아먹어봤자 얼마나 먹겠는가. 가는 길에 들르면 그만이었다.
『뭣이? 지금 가긴 어딜 간단 말이냐!』
물론, 메피스토에게는 날벼락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다 들었으면서 묻긴 뭘 물어요?]
엘릭의 목소리엔 다분히 조롱기가 섞여 있었다.
조금 전에 자신을 놀린 대가였다.
『아니, 생각을 해보아라. 지금이 그럴 때라고 생각하느냐? 황금사자도 어떻게 나설지 몰라 하루하루가 시급한 이 때에 어서 서둘러 움직여야지! 용! 그래, 네 용들도 빨리 성장을 해야 너의 성장에 도움이 될…!』
[핑계는. 그냥 메피가 교황청 가기 싫은 거겠죠. 아니다. 혹시.]
『혹시?』
엘릭은 비릿한 미소를 지은 채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겁먹은 건 아니죠?]
『어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먼 과거에는 본왕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버러지들 뿐이거늘! 더러워서 피하는 것뿐이니라!』
[에이, 누가 봐도 무서워하는 거 같은데?]
『이익! 아니래도!』
[발끈하는 거 보니 맞네, 맞아.]
메피스토는 엘릭이 자신의 말을 도통 믿을 생각을 않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 가거라, 가! 거기서 이 몸의 위대함을 보여주도록 하지!』
‘참 놀리기 쉬운 양반이란 말이지.’
엘릭은 씩 웃으면서 마부에게 곧장 교황청으로 가달라고 부탁했다.
다시금 말 울음소리가 들리며 마차가 움직였다.
물론, 이동하는 내내 메피스토의 미간은 도무지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휼은 그런 메피스토를 보곤 혀 차는 소리와 함께 한 마디를 툭 뱉었다.
내가 봤을 때 너는 평생 메르빙거에게 시달릴 거 같군.
『뭐, 인마?』
* * *
그렇게 얼마나 움직였을까.
교황령(敎皇領)에 들어섰을 때부터, 교황청의 풍경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성처럼 중앙에 우뚝 솟은 교황청의 본관. 그리고 그것을 중심으로 순백색의 건물들이 둥글게 자리하고 있었다.
건물들 사이사이 세워진 첨탑들은, 그 꼭대기에 있는 다양한 문양 탓인지 신비로우면서도 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다양한 종교가 모인 만큼, 규모 또한 상당한 모습이었다.
엘릭이 본관을 보며 교황이 자신과 무슨 대화를 하기 위해 부른 것일까 고민하는 순간이었다.
『보기만 해도 벌써부터 구역질이 나는군. 한 놈으로는 안 될 것 같으니 떼로 뭉쳐다니는 꼴이라니….』
메피스토가 점점 가까워지는 교황청을 보며 짜증난다는 투로 이를 박박 갈아댔다.
그러다 곧 뭘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흠, 그런데 예전보다 위세는 많이 떨어진 모양이야?』
위세가 떨어져?
엘릭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무슨 말입니까?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는데.]
대마전쟁에서 입은 피해가 크다고 하나, 그래도 신교 동맹은 일반 백성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다.
오히려 전쟁 이전보다 이후에 더 세가 불어났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제국 전반에 끼치는 영향력이 대단했던 것이다.
그동안 정치가 안정적이었던 것도 감안한다면, 세가 줄어드는 게 더 이상했다.
그런데도 위세가 떨어졌다고?
『말 그대로이니라. 본왕이 알고 있던 신들은 몇 남아있지도 않아 보이고….』
메피스토는 팔짱을 낀 채로 교단들을 쓱 훑어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나마 있는 것들도 격이 상당히 많이 떨어졌군. 4대 세력 중에서도 가장 떨어지는 것 같은데. 맞나?』
[글쎄요.]
엘릭의 머릿속엔 의문이 가득 찰 수밖에 없었다.
왜 메피스토가 그런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신교 동맹은 속세에 관여만 하지 않을 뿐이지, 마탑이나 사자공가에 비해 결코 뒤진다고 할 수 없었다.
특히 저들이 자랑하는 성기사단의 위용은 황실도 경계할 정도였으니까.
오죽하면 감찰국에서 신교 동맹의 권한이 하나로 집중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평가했을까.
『그러느냐? 음.』
메피스토는 가만히 얘길 듣더니 이내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뭔가 이상하다는 표정.
엘릭도 이유를 알 수 없어 의문을 가지는 동안, 어느덧 마차가 교황청의 구역에 진입했다.
그때부터 슬슬 각양각색의 옷을 입은 신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미리 준비하고 있던 건지, 마차가 정문을 지나는 순간 그들은 다양한 꽃들을 던지며 환영했다.
마차가 향하는 길 위로 수많은 꽃과 꽃잎이 쌓여갔다.
“어서 오십시오!”
“메르빙거에게 축복을!”
인파 속에선 무어라 중얼거리면서 기도하고 있는 신도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예상치 못한 환영.
마차에 있던 이들은 자못 놀란 표정이 되고 말았다.
‘잠깐만 들리라는 식으로 말하라더니. 이래서는 쉽게 여길 수가 없잖아.’
엘릭은 절대 이유 없는 호의는 없다고 여기는 주의였다.
뭔가 숨기는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하다는 생각에 오히려 더 긴장이 되었다.
무슨 말이 나올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럼 다녀올게.”
본관에 도착한 후. 엘릭은 혼자서 마차에서 내렸다.
어차피 저들도 엘릭과의 면담만을 요구했기 때문에 다른 두 사람까지 굳이 같이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또 사고 치지 마라.”
“또?”
엘릭은 인상을 팍 썼다.
메피스토에 이어 션까지.
대체 자신의 이미지가 어떻게 박힌 걸까?
“야, 누가 보면 내가 가는 곳마다 사고 치는 줄 알겠다?”
“아니야?”
션은 다시 한번 말해보라는 듯이 되물었다.
엘릭은 그의 눈을 바라보며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대답도 하지 않고 마차의 문을 세게 닫았다.
“…그럼!”
쾅!
“야!”
안에서 션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는 애써 무시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여기도 밖이랑 똑같네.’
어서 오라는 듯 깨끗하게 청소된 붉은 융단을 타고 올라간 뒤.
그 끝엔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사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환영합니다, 엘릭 님. 교황님과의 용무 때문에 오신 거죠?”
“예. 그렇습니다.”
“안쪽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왜 기다려야 하나 했더니, 금방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안쪽에서 한창 미사가 진행 중인 탓이었다.
그러나 잠깐만 기다려달라는 신도의 말대로 곧 끝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엘릭은 대충 중간에 있는 빈자리에 앉았다.
『저자가 교황이더냐? 생긴 것도 꼭 찐빵이나 팔 것처럼 생겼구나.』
메피스토는 단상에서 나긋한 목소리로 설교 중인 교황을 보며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냈다.
『대체 어디서 데려온 건지, 위엄이라고는 하나도 없군. 저래서 신도들을 휘어잡을 수나 있나?』
“….”
평소 같았으면 뭐라 했을 테지만, 딱히 틀린 말이 아니라 딴지를 걸 수가 없었다.
실제로 교황의 얼굴은 보자마자 찐빵이 연상될 정도로 푸근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으니.
심지어 가끔씩 말에 힘을 줄 때마다 볼살이 가볍게 떨려와, 경건해야 할 미사가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저런 놈을 교황이라고 세워서는 쯧. 본왕이 그렇게 느낀 건가?』
그러고도 메피스토는 계속해서 연합과 교황에게 악담과 저주를 퍼부었다.
듣고 있던 엘릭도 슬슬 지칠 때쯤. 다행히 미사가 바로 끝났다.
교황은 양 손바닥을 가볍게 위로 들어 보이며 마무리를 지었다.
신교 동맹에서만 사용되는 특유의 예법이었다.
“…오늘도 전지전능하신 분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지막한 신도들의 목소리들과 함께 미사가 끝났다.
신도들은 썰물처럼 본관에서 빠져나갔다.
덜컹.
본관의 문이 닫히고 내부에 남은 건 엘릭과 교황, 그리고 몇몇 종교의 주교들이었다.
엘릭은 그들과 대화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단상 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교황은 거기서 기다려 달라는 식으로 손짓했다.
자신들이 가겠다는 뜻이었다.
교황이 다가오자 엘릭은 동맹의 예법으로 인사를 올렸다.
그러자 교황은 웃으며 인사를 받아준 뒤 엘릭의 손을 붙잡았다.
마치 귀한 것이라도 만지는 양.
“반갑습니다, 엘릭 님. 갑작스러운 요청이었을 텐데 응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저야말로 오히려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신의 은총이 있으시길.”
“신의 은총이 있으시길.”
못마땅하다는 듯한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가관이구나. 이건 옆에서 툭 발로 차기만 해도 데구르르 굴러갈 것 같은데. 찐빵의 화신, 뭐 그쯤 되나?』
메피스토는 팔짱을 낀 채, 여전히 언짢은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놈의 가죽을 벗겨봐라. 피가 아니라 팥이 흐를 거 같지 않으냐?』
엘릭이 애써 무시하려는데, 교황의 입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그나저나, 옆에 있는 마왕이 많이 시끄럽군요. 허허허.”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정확하게 메피스토와 눈을 마주쳤다.
“…!”
『…!』
“허허허. 왜 그렇게 웃으십니까. 절대 봐서는 안 될 것을 보았다는 듯한 모습이시로군요.”
허허.
교황이 웃을 때마다 푸근한 턱살이 부르르 떨렸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