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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331화 (330/405)

2부 71화

여름의 유산

자식?

엘릭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러고 보니까 예정일이…?’

최근에 정신이 없어 몰랐는데, 생각해보니 예정일이 한참이나 지나 있었다.

그런 엘릭의 표정을 읽은 걸까.

순간 아차 싶어 얼굴 표정을 숨겨보려 했지만.

헤이즈가 어느새 더 싸늘해진 얼굴로 노려보았다.

“사정, 사정이 있었어!”

엘릭은 워해머가 날아들기 전에 다급하게 소리쳤다.

헤이즈의 눈이 가늘어졌다.

“해봐, 어디.”

만약 별 게 아니라면 죽을 줄 알라는 듯한 말투.

꼴깍!

엘릭은 마른 침을 삼키면서 천천히 이야기들을 늘어놓을 수 있었다.

황금사자와 감찰국부터, 유령성. 그리고 시로의 이야기까지.

헤이즈는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마음 같아선 정신 차리라고 한 대 쥐어박고 싶었는데….”

‘그, 그걸로 쥐어박혔다간 머, 머리통이 안 남아나지 않을까…?’

물론, 엘릭은 목젖까지 올라온 말을 억지로 삭였다.

“그래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보여서 그러지는 못하겠네.”

툭!

헤이즈는 손에 힘을 풀었다. 워해머가 바닥에 놓이자, 엘릭은 그제야 안도에 찬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물론, 헤이즈의 날카로운 시선까지 고와진 건 아니었다.

“그래도 가문을 일으킨다는 녀석이,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할 가족을 등한시 하고 있는 건 아니라고 봐.”

“……!”

“정신 똑바로 차려.”

“응……. 정말 미안해, 누나.”

“사과는 내가 아니라 이사벨에게 해야지.”

“알았어. 꼭 연락할게.”

엘릭은 머리를 맞지 않아도 이미 머리를 맞은 느낌이었다.

‘내가 대체 그동안 뭘 하고 다녔던 거지……?’

이제 메르빙거 가가 놓인 위치는 이전과 다르다.

명문가로서의 위엄을 되찾았고, 공작가로서의 위용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가문이 잘 나간다 한들, 막상 가족과 가솔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

그런 가문은 있으나 마나였으니.

엘릭은 뒤늦게 자신의 생각이 짧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동부도 들리고. 알았어?”

“누나.”

“왜?”

“고마워.”

“…….”

헤이즈는 ‘흥!’하고 콧방귀를 끼면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지만.

입가는 엷게 웃고 있었다.

* * *

잠깐의 소란이 진정되고 난 뒤.

엘릭에게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각났다.

‘어? 잠깐만.’

헤이즈가 안트로모프의 어린 호왕, 벨렌체와 사이가 좋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던 것이다.

게다가 헤이즈는 회사자의 인정을 받을 정도로 가진 바 무력도 대단하다.

그녀라면 이번에 구출한 수인족들을 데리고 무사히 안트로모프로 데려갈 수 있지 않을까?

“누나, 혹시 부탁 하나만 들어 줄 수 있어?”

“갑자기 부탁?”

“사실 이번에 생긴 일인데….”

엘릭은 침착하게 유령성에서 겪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거기서 만난 벨렌체의 아버지로 추측되던 호인의 이야기까지도.

콰앙!

헤이즈는 식탁을 강하게 내려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미친놈들…! 할 짓이 없어서 생체 실험을 한다고?”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새어나오는 기운.

엘릭은 이를 느끼곤 속으로 적잖게 감탄하고 말았다.

‘이전에 봤을 때보다 더 강해졌잖아? 아니, 어쩌면 당연한 건가.’

사실 동부엔 제국에서도 내로라하는 강자가 아주 많은 편이었다.

회사자부터 청사자, 적사자나 네임리스도 있었고, 별의 종군을 함께 뛰어다닌 이들도 있었다.

그들과 당연히 접점이 강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환경은 무력 수준도 올려둔 것이겠지.

“할게. 아니, 해야만 해. 내가 갈게.”

그러면서 블랙 스컬이 엘릭에게 정식으로 의뢰받은 것으로 처리하겠다고 덧붙였다.

“고마워. 블랙 스컬이면 우리도 믿고 맡길 수 있을 테니까.”

엘릭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용병단이 나서준다면 따로 걱정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그럼 앞으로 수인족들을 구출할 때마다 블랙 스컬에 넘길게.”

“……그렇게 많아?”

“응. 이번에 유령성 털어서 나온 기밀자료에 다른 실험장 위치가 나와 있었거든.”

마탑은 지속적으로 팀을 꾸려 그곳을 습격할 예정이었다.

하나 같이 비행선에서 봤던 실험장보다 규모가 큰 만큼 실험체의 수도 많을 터.

엘릭은 이들을 전부 헤이즈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단발성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면 좀 더 조직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겠네. 이 부분은 나도 용병단 사람들이랑 좀 더 고민해보고 나서 말해줄게.”

헤이즈는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나서면서 슬쩍 말했다.

“그럼 의뢰비는 두둑하게 준비해둬, 동생아.”

“…응?”

엘릭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사라진 이후였다.

“동부도 꼭 들리고!”

그러고 복도 저 멀리에서 들려오는 말을 마지막으로, 그녀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누나……?”

엘릭이 한참 동안 벙찐 얼굴로 제자리에 서 있어야만 했다.

* * *

“현재 저희 쪽 비밀 기지가 마탑에 의해 계속해서 기습을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현재 집계된 피해 장소만 벌써 네 곳으로…….”

크롬헬은 감찰국 요원의 보고를 들으면서도 별다른 질문을 던지지 않고 있었다.

늘 예리하기만 하던 평상시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

눈빛도 공허하기만 했다.

하지만 국장들을 오히려 그런 그의 모습에 두려움을 느끼는 중이었다.

‘이래서야…….’

‘우리의 목만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이지 않나……?’

‘지금이라도 망명을 알아봐야 하나? 안 돼.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지금의 그는 언제 폭발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상태.

사실 크롬헬의 바로 옆에 앉아있는 황금사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평소와 비슷하게 일말의 감정도 드러내지 않는 상태.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두려운 것이다.

언제 그 잔혹한 발톱을 드러낼지를 알 수 없으니.

그런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요원은 가까스로 떨리는 목소리로 계속해서 보고를 이어갔다.

“유령성의 전투 직후 곧바로 각지에 철수 명령을 내렸으나, 마탑이 워낙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탓에 피해가 커지고 있습니다.”

세상에 알려져선 안 되는 실험을 진행하던 장소이니, 철수를 하더라도 뒤처리를 확실하게 해야하는 바.

만에 하나 중요한 기밀이 저쪽에 넘어간다면 그만큼 상황은 악화될 뿐이었다.

그 탓에 빠른 철수는 불가능했다.

문제는 그러다보니 감수해야 할 피해도 계속 커지는 상태.

이러나 저러나 자신들에게 불리한 입장뿐이었다.

“…이상입니다.”

“…….”

요원의 보고가 끝나고 난 뒤에도, 크롬헬의 입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국장들은 서로가 눈동자만 데구르르 굴렸다.

‘어떻게든 해보시오.’

‘우리더러 어떻게 하라고!’

‘그럼 이대로 계속 황자님을 내버려두기만 할 거요? 정말 다들 죽고 싶어서 그러는 건가!’

‘제기랄! 우리라고 그러고 싶어서 그러냐고!’

수많은 무언의 시선들이 오고 갔지만, 이렇다 할 결론은 나오지 않는 상태.

사실 그들은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조금 전의 보고는 크롬헬의 귀에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을.

그가 기다리고 있는 소식은 단 하나뿐이었다.

1시간, 2시간…….

그렇게 의미 없는 시간이 흘러간 뒤.

처음으로 크롬헬의 입이 열렸다.

“…어디에도, 없군.”

“…….”

“…….”

“…….”

“누구 대답해보겠나? 시로의 행방은? 대체 언제 들을 수 있는 거지?”

어느 때보다 낮은 목소리.

감찰국장들의 심장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아, 아직 수색 중입니다! 그러니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면 모, 모셔오도록 하겠습니다!”

“…….”

크롬헬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관자놀이를 따라 새파란 핏줄이 일어났다.

황실 직속 기관이라는 것들이 황자비를 찾는데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니.

턱을 괴고 있던 크롬헬의 손이 검집이 있는 허리춤으로 움직이려 할 때였다.

벌컥!

갑자기 문이 열리며 다른 요원이 다급하게 달려왔다.

평소라면 아무런 언질도 없이 들어온 요원에게 무례하다며 호통을 쳤을 국장들이었으나, 그들은 사색이 된 채 그 자리에서 굳었다.

자칫하면 그들의 행동이 크롬헬의 신경을 더욱 긁을 수 있었으니까.

그런 국장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요원은 그들을 빠르게 지나 그대로 크롬헬에게 다가가 뭔가를 속삭였다.

크롬헬의 표정엔 처음으로 묘한 변화가 있었다.

황금사자는 이를 알아보곤 이유를 물었다.

“무슨 일이지?”

크롬헬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친구가…… 온 거 같습니다.”

* * *

크롬헬은 곧장 응접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는 엘릭이 보였다.

“왜 온 거지? 잡담을 나눌 만한, 그럴 만한 분위기는 아니지 않나.”

지금도 마탑과 감찰국은 거칠게 충돌하고 있는 중.

마탑 소속인 엘릭이 대놓고 황실을 찾아올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맞아.”

“그런데?”

“그래도 반드시 해야 할 얘기가 있어서.”

엘릭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크롬헬은 그 표정을 보고서 순간 가슴이 욱신거렸다.

그는 시로가 왜 유령성으로 향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걸 사전에 막지 못해 얼마나 당황했던가.

그런데 엘릭이 돌아온 상황.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깊게 생각하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무사히 약혼자가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

한데, 엘릭이 뭔가 전할 소식이 있다고 한다.

엘릭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에메랄드 눈에 굳은 표정을 한 크롬헬의 모습이 담기고.

“―. ――.”

엘릭은 유령성 전투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전부 설명해주었다.

그것이 반려의 마지막을 지켜보지 못한 친우에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으니까.

『말했지만. 전사들의 대결에서 미안하다는 감정은, 동정이라는 감정은 사치이고 모욕이다. 정당한 승부였고 승자는 너였을 뿐이다.』

메피스토의 조언을 뒤로 한 채, 모든 말이 끝났을 때.

“…지점에 가봐. 그곳에 그녀를 묻었다.”

크롬헬은 듣고 싶지 않은 대답을 들은 것에 대해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입안에 비린 맛이 가득했다.

엘릭은 웬만해선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친구의 그 얼굴을 보고 있자 씁쓸함이 몰려왔다.

“가볼게.”

엘릭이 돌아서서 응접실을 나서려는데, 크롬헬이 처음으로 입을 뗐다.

“…고맙다. 그녀를 묻어줘서.”

“…….”

엘릭의 발걸음이 잠시 멈췄다.

“엘릭.”

“어.”

“우리는 아직 친구겠지?”

“네가 아직까지 그렇게 생각한다면.”

“너는?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친구야. 안 맞는 구석도 많지만, 여전히 친구.”

“그렇군. 잘 알겠다.”

엘릭이 그렇게 응접실을 완전히 떠난 뒤.

홀라 남은 자리에서. 크롬헬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역시 널 아직 친구로 생각하고 있지만……. 그러니 친구지만… 누구 하나가 죽어야만 끝날 악연이 되어버린 친구 사이로구나…….”

혼잣말엔 어딘지 모르게 씁쓸함이 배어 있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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