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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330화 (329/405)

2부 70화

여름의 유산

비행선이 부서지고, 가이는 살아남은 이들과 함께 유령성의 잔당들을 마저 처리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됐을 무렵, 그는 엘릭을 찾기 위해 곧바로 협곡 아래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 펼쳐진 풍경은 하나 같이 마법사들을 충격으로 내몰았다.

“…이게 정말 한 사람이 한 겁니까?”

“나한테 물어보지 마, 나도 모르겠으니까.”

“역시 마탑주 님, 대단하시긴 대단하시네요.”

“그냥 대단한 정도가 아니지. 다른 육망성 분들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하니까.”

그만큼 가이가 남긴 폐허의 현장은 대단했다.

“…그리고 가이 님처럼 말도 안 되는 수준을 가진 사람이 또 있네.”

협곡 깊숙한 곳.

그곳은 말 그대로 ‘얼음 바다’였다.

마치 거미줄처럼 협곡 전체를 아우르고 있는 얼음들.

어찌나 세밀하게 마력을 컨트롤했는지, 얼음은 아래로 내려가기 힘들 정도로 촘촘하게 얼어 있었다.

얼음의 강도도 얼마나 단단하던지 좀처럼 깨면서 지나가기가 쉽지 않았다.

아무리 전투 때문에 체력이나 마력이 상당히 소진된 상태라지만, 그들 대부분이 마탑에서도 내로라하던 워메이지들.

그런 그들의 힘으로도 쉽게 지나가기 어려우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협곡의 바닥.

멀지 않은 곳에서 엘릭의 뒷모습이 바로 보였다.

그래서 인사라도 걸려 했지만.

“…어?”

“음.”

그에게서 풍기는 숙연한 분위기에 마법사들은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묵묵히 맨손으로 바닥을 파고 있는 엘릭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할 뿐.

그의 옆엔 얼음으로 만든 관이 놓여 있었다.

거기에 곱게 누워있는 사람은… 마법사들도 아주 잘 알고 있는 이였다.

황자비 시로.

‘결국 일이 이렇게…!’

‘이걸 어떻게 한다?’

마법사들의 시선이 바쁘게 오갔다.

엘릭과 크롬헬의 옛 관계를 잘 알면서도, 곧이어 닥칠 정치적 후폭풍이 만만치 않으리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

엘릭은 마법사들의 기척을 느꼈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무덤을 팠다.

흙이 워낙 거친 탓에 손에 작은 상처들이 늘어갔지만,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그렇게 마법사들이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굴리며 엘릭을 보고 있을 무렵.

타샤가 조용히 다가와 엘릭 옆에서 무덤 만들기를 거들었다.

팍. 팍.

그렇게 두 사람의 소리만 협곡에 울려 퍼지고.

적당한 깊이가 됐을 때, 엘릭은 쓸쓸한 표정으로 관을 넣고 그 위를 다시 덮었다.

쩌저저적.

그리고 무덤 위에 세운 얼음 비석.

가이는 마지막까지 엘릭과 타샤의 모습을 보다가 조용히 수하들에게 일렀다.

“너희들은 유령성의 잔해를 수색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 * *

엘릭은 가이와 함께 네레스타 가로 돌아왔다.

시간이 제법 흘렀음에도, 엘릭의 마음은 여전히 심란한 상태였다.

크롬헬에게 이 일을 어떻게 얘길 해야 할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은 탓이었다.

“하아….”

만약 자신에게 같은 일어나면 어떨까 하는 상상도 들었다.

만일 이사벨이 죽었다는 얘길 듣는다면…?

생각도 하기 싫었다.

“…무슨 말을 해도 위로가 안 될 거 같은데.”

『뭘 그리 고민하는 것이냐. 있는 사실대로 말해주면 될 것을. 네가 죽인 것도 아니지 않느냐?』

“말이야 쉽지.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인 줄 알아요?”

자칫하면 황실과 더욱 사이가 나빠질 수 있었다.

레펜트가 자유혁명군 소속이긴 하나, 동시에 육망성이기도 했으니.

만일 황실과 사자공가 쪽에서 공식적으로 이를 문제 삼으면 그땐 정말로 골치 아파지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친구 부인이 죽었는데 모른 척할 수도 없는 일이고.”

『본왕은 이해가 가지 않는구나.』

“뭐가요?”

『그 여자는 네 선조의 무덤을 도굴한 도굴꾼이다. 네게는 친구인 수인족들에게 위해를 끼친 원수이기도 하고. 그런데 친구의 아내라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슬퍼하는 것이 납득이 가지 않아서 말이다.』

“….”

『슬퍼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고, 향후 대책을 어떻게 마련할 건지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메피스토의 눈빛은 진지했다.

『확실하게 선을 그어라. 너와 그 황자, 둘 사이의 선을. 그게 없으면 넌 평생 죄책감에 휘둘릴 뿐이다. 그래서는 널 따르는 수많은 신민들의 마음을 짓밟는 것이 될 뿐이야.』

“…!”

『군주의 옥좌란, 원래 그토록 무거운 자리인 것이다.』

엘릭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섣부른 동정을 하지 말라고 일갈하던 모습에 이어 이번까지.

엘릭은 찬물에 몸을 담근 것처럼 정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그동안 따로 간섭하지 않아도 일처리를 잘 해오던 네가 처음으로 이런 미숙한 모습을 보이니, 본왕이 다 어색하군.』

엘릭은 한참 동안 입술을 꾹 다문 채 침묵했고.

“…고마워요, 메피. 덕분에 정신이 좀 깨네요.”

『흥. 네놈이 한심한 꼬락서니만 보이니 갑갑해서 그런 것일 뿐. 따, 딱히 네놈이 걱정되어서 그런 것은 아니니 오해 말도록!』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홱 돌린 메피스토의 귓불이 또 붉었다.

엘릭이 픽 하고 웃던 그때였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드르륵!

가이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엘릭은 아니라며 고개를 담담하게 저었다.

“무언가 생각이 바뀐 모양이로군?”

가이는 엘릭의 변화를 알아챘는지 묘한 얼굴이었다.

엘릭은 검지로 볼을 긁적였다.

“걱정을 끼쳐 죄송합니다.”

“아닐세.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니. 친구를 정적으로 만나고, 그 정적과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 거기서 받게 되는 스트레스와 트라우마는 우리 같은 사람이 어쩔 수 없이 져야 할 멍에와도 같은 것일세. 미리 예방 주사라도 맞은 셈 치게나.”

가이는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엘릭에게는 유독 한 가지 단어가 가슴에 와 닿았다.

멍에.

확실히 자신은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메르빙거. 한 가문의 수장이자, 한 지역의 대표였다.

“여하튼 긴히 이야기 나눌 게 있었는데 잘 되었군.”

“뭔가가 있군요.”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유령성의 잔해를 수색하면서 찾은 게 있어서 말이네.”

순간, 엘릭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가 엘릭의 맞은편에 앉아 깍지를 낀 채 턱을 괬다.

“뭐를 찾으셨기에…?”

“감찰국이 실험‘하려’던 실험체 후보군들과 다른 인질들.”

“…!”

엘릭의 눈이 커졌다.

“만나보겠나?”

“…예.”

엘릭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찰국에 잡혀있던 이들 중에서 분명 수인족이 있을 테니까.

만에 하나라도 자신이 아는 이들이 있을 수도 있었다.

“말하길 잘했군. 따라오게.”

엘릭은 가이를 따라 다른 객실로 이동했다.

그곳엔 엘릭이 비행선에서 봤던 것처럼 몸 곳곳에 실험의 흔적이 있는 자들이 여럿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 정도가 훨씬 약하다는 것 정도?

한쪽 구석엔 예상했던 대로 수인족도 모여 있었다.

엘릭은 조심스레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은 모두 사색이 된 채로 연신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 주제를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니 제발 용서를…! 살려만 주십시오!”

“….”

그 모습에 엘릭은 말문이 턱 하고 막히는 기분이었다.

“보다시피 다들 정신적 외상이 상당한 상태라네. 그래서 섣불리 치료하기도 힘든 상태고.”

이들에게서는 안드로모프에서 봤던 수인족의 자긍심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거기선 상대가 누구든 간에 자신들을 핍박한 인간에게 복수를 하려 들었는데….’

그러나 이들은 모두 감찰국에서 철저하게 세뇌가 된 모습.

마음이 아팠다.

“하아…!”

엘릭은 얼굴을 손으로 덮으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만으로도 수인족들은 자신들이 뭔가 잘못한 줄 알고 연거푸 사과하기 바빴다. 몇몇은 아예 바닥에 엎드려 울부짖기까지 했다.

마음의 선을 확실하게 그으라던 메피스토의 말이 머릿속을 왱왱 울렸다.

지금은 죽은 시로에 대한 원망이 그만큼 더 컸으니까.

확실히 그의 말마따나 선을 확실하게 잡아놓지 않으면, 원망과 슬픔, 두 상반된 감정 사이에서 휘둘리기 십상일 것 같았다.

나는 나. 저들은 저들.

확연한 구분이 필요했다.

‘…이래서 이 사람들, 안드로모프로 무사히 보낼 수 있을까?’

고민이 깊어지던 그때였다.

“엘릭.”

“…?”

엘릭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션이 어느새 다가와 있었다.

조금 난감하다는 얼굴로.

“너, 바로 나가봐야 할 거 같은데?

“왜? 무슨 일인데?”

“누님 오셨어.”

“…!”

엘릭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고 말았다.

* * *

헤이즈가 엘릭을 기다리고 있는 곳은 네레스타 가의 식당이었다.

끼익.

엘릭은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다가와 식당 문을 살짝만 열었다. 내부 분위기를 살피려 몰래 엿보려는 것이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탁자에 앉아 하녀와 얘길 나누고 있는 헤이즈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만 따로 두고 본다면, 영락없는 단아하고 조신한 명문가 영애의 모습이었다.

“차향이 너무 좋네요. 이건 이름이 무엇인가요?”

“다행히 입맛에 맞으시나 봅니다. 이건 소프라노 산에서만 나는 물건으로 3월에….”

입을 가리고 다소곳하게 웃는 모습, 생각보다 분위기가 괜찮아 보였다.

‘기우… 였나?’

헤이즈가 직접 찾아올 때는 보통 두 가지 중 하나였다.

혼내거나, 화를 내거나.

『두 개 다 네가 잘못한 경우에만 있는 일들이로구나?』

[조용히 좀 해주실래요?]

하여간 어쩌면 오늘은 별일 없이 지나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헤이즈가 엘릭의 기척을 느끼곤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

“….”

메피는 헤이즈의 눈빛을 읽고 피식 웃었다.

『헛된 망상이었군. 명년 오늘이 네 제삿날이라고 봐도 되겠지?』

[…진짜 조용히 안 하실래요?]

『그래도 지난날의 인연이 있으니 네 제삿밥에다 향초는 좀 많이 피워주도록 하마.』

[제가 죽으면 메피도 같이 무덤으로 가는 거거든요?]

『으흐흐흐흐.』

[웃지 마요.]

『으히히히히! 푸히!』

[아, 좀!]

엘릭은 옆에서 낄낄대는 메피스토를 시궁창에 처박아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지금은 도저히 그럴 겨를이 없었다.

“엘릭.”

“으, 응?”

“거기 서서 뭐하니? 어서 이리 오렴.”

“….”

헤이즈의 눈꼬리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입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엘릭은 그제야 그동안 통 누나에게 연락을 하지 못했던 사실을 떠올리고 말았다.

물론, 그도 그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다. 감찰국이니 유령성이니, 최근 들어 여러 일들이 몰리며 좀 바쁜 게 아니었으니.

하지만 그런 말들은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했다.

“연락도 없고, 부인될 사람을 동부에 보내놓고 코빼기를 안 비춰?”

“….”

『최악, 그 자체의 남자로군?』

메피스토가 낄낄 웃어댔다.

“나는 너를 그렇게 키운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말이야.”

헤이즈는 옆에 있던 하녀에게 ‘실례할게요’라고 우아하게 인사하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녀의 손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워해머가 들려 있었다.

“누, 누나? 저기… 내 말 좀 들어… 줄래?”

“게. 다. 가.”

이제 헤이즈의 눈꼬리도 웃고 있지 않았다.

“네 애기까지 크고 있는데 대체 안 오고 밖에서 뭘 하고 다니는 거야?”

“…!”

콰드득!

엘릭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리고 말았다.

『최악을 넘어서서 아주 못 돼먹은 놈이었구나. 아무래도 명년 네 제삿날에 향을 올려주기로 한 약속은 취소해야겠다.』

메피스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혀를 끌끌 찼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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