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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329화 (328/405)

2부 69화

여름의 유산

“….”

엘릭이 다소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이자, 아르세우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메르빙거가 메르빙거지, 그럼 다른 게 된단 말이냐?”

“그거야….”

엘릭은 왠지 살랑살랑 나뭇가지를 흔들어대는 세계수의 유목이 신경 쓰였다.

“…아닙니다. 아무것도. 그냥 너무 잘 자라줘서 놀란 겁니다.”

“그런 거라면 다행이구나. 난 혹시라도 우리와 같은 아이가 나오면 어쩌나 싶었지.”

“….”

이에 아르세우스는 기쁘다는 듯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엘릭은 대체 뭐라고 말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이제 ‘신아’는 ‘청춘’으로 변했으니, 너에게도 큰 변화가 있을 게다. 회복 능력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런가요?”

그의 말에 엘릭은 제 몸을 살폈다. 그러나 아직은 인장의 변화가 체감되지 않는 것 같았다.

평소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아르세우스는 그런 엘릭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며 말했다.

“나가면 알게 될 게다.”

그가 말을 마치자 심상 세계가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처음처럼 빛이 시야 전체를 덮었을 때, 엘릭은 그가 나지막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잘 키워주고 있어 고맙구나.

* * *

빛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엘릭은 잔뜩 격양된 메피스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게 말이 되느냐! 이그드라실이라니!』

아무래도 그의 내면세계를 일부 엿본 모양이었다.

엘릭은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짜증내는 투로 말했다.

[아, 목소리 좀 낮춰요. 귀 아프게.]

『지금 본왕이 목소리를 낮추게 생겼느냐! 네놈이 이그드라실을 키우고 있다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지 네놈도 알지 않느냐?』

[생사를 같이하는 동료가 그만큼 강해진다는 건데 기뻐해야지, 왜 화를 냅니까, 내기는.]

『동료? 너, 너…!』

뻔뻔하게 말하는 엘릭의 모습에, 메피스토는 뒷목을 부여잡고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본왕이 어찌 메르빙거와’ 따위의 말이 들리긴 했으나, 엘릭은 대충 한 귀로 흘렸다.

그러면서 곧바로 제 몸을 살폈다. 인장의 변화를 느끼기 위함이었다.

그는 방금까지만 해도 전신을 두들기던 통증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전투로 인해 쌓인 피로나 근육통, 그리고 잔상처 정도는 이미 없어진 지 오래였으니 말이다.

아르세우스의 말대로 인장이 성장한 만큼, 몸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고 회복해주는 능력이 눈에 띄게 좋아진 상태였다.

“…이게 인장의 힘인가?”

이 정도면 거의 초회복(超回復)이라고 할 만한 수준이지 않은가.

엘릭은 어쩐지 ‘청춘’이라는 단어가 가진 힘을 알 것 같았다.

“【맑고】, 【따스하여라】….”

그렇기에 청춘(靑春).

새싹이 돋는 봄철처럼 푸릇푸릇한 느낌을 주는 것일 테지.

‘평소라면 며칠을 앓아누웠을 텐데.’

인장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잎사귀 하나만 그려져 있던 신아의 인장은, 청춘의 인장이 되며 작은 나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그라고 했었지?’

내심 이그가 완전히 자라면 어떤 모습을 하게 될지 기대가 됐다.

순간 성격이 선조들과 같이 악독한 면이 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기우지, 암! 기우고말고.’

세계수는 주인의 성격을 닮는다고 했으니까.

그러니까 분명히 사람 좋은 녀석일 게 분명했다.

『…또 무슨 되도 않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지.』

메피스토는 그동안 자신이 봤던 메르빙거 중에서도 가장 메르빙거 같은 엘릭을 보면서 미간을 좁혔다.

그러던 그때.

“…는군.”

엘릭의 귓가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시로?’

엘릭이 소리가 들린 쪽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그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빛이 잘 들지 않아 반쯤 어둠에 묻힌 곳.

그녀는 검을 지팡이 삼아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바닥에 피가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안색도 창백해진 상태.

저대로 뒀다간 곧 얼마 가지 않아 죽을 게 분명했다.

채앵!

“움직이지 마라, 메르빙거.”

“거기서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싸우겠다는 걸로 알겠다.”

그녀의 주위는 금사자군이 지키고 있었다.

진작 달려들었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아무래도 시로의 상태가 좋지 않다 보니, 그녀를 지키는 걸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그들도 시로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지 안색이 어두웠다.

문제는 그들 역시 몸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하다는 것.

“오해하는 거 같은데, 그럴 생각 없거든? 도와주려는 거니까, 쓸데없는 짓 말고 물러나 줄래?”

비행선에서 떨어질 때야 시로 정도의 실력자라면 별문제 없이 살 수 있을 거라 여겨 신경 쓰지 않았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아무래도 비행선이 폭발하면서 큰 피해를 입은 모양이었다.

금사자군도 마찬가지. 다들 저 몰골로는 협곡을 빠져나가지도 못할 것이다.

“헛소리하지 마라.”

“그딴 개소리를 믿을 거 같아?”

하지만 그들의 엘릭에 대한 적개심은 말할 것이 없었고.

더 이상 접근한다면 목숨을 던지는 것도 불사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시로 또한 분노한 표정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게 도움을 받고 싶어 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이것 참.”

저들의 입장이 이해되지 않는 게 아니었기에, 엘릭은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찼다.

하지만 그렇다고 친구인 크롬헬의 부인을 죽게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

“어쩔 수 없나.”

엘릭은 얼굴을 구기며 뒷머리를 북북 긁었다.

바닥 난 마력은 청춘의 인장 덕분에 어느새 다시 채워진 상태.

금사자군을 잠시 제압하는 정도는 충분할 터였다.

“【갇혀라】.”

휘휘휘휘-

적당히 힘 조절을 한 눈보라가 금사자군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역시 이딴 짓을…!”

“죽여버리…!”

그녀들은 달려들다 말고 갑자기 바닥을 뚫고 튀어나온 얼음 사슬에 몸이 단단히 묶이고 말았다.

“놓…!”

“읍! 으으읍”

소리를 지르려 해도 빙독이 입까지 가려버리는 통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갓 잡은 활어도 아니고. 좀 가만히 있어. 그리고 내가 굳이 너네들 해코지할 거면 이런 정도로 끝내겠냐?”

엘릭은 악다구니를 지르는 그들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편으로는 저들의 맹목적인 충성심이 대단하다 싶기도 했다.

그러다 엘릭은 시로의 눈앞에서 자세를 숙여 눈높이를 맞췄다.

“자존심 그만 부리지? 어차피 여기서 나갈 수도 없잖아.”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 일이다.”

“꼴에 자존심은.”

“네놈 따위에게 도움 받을 이유 따윈 없다!”

콜록콜록!

그녀는 엘릭을 향해 소리를 지르더니 이내 거칠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목소리를 내기 힘들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이었다.

“어이쿠? 그럼 부하들이랑 다 같이 여기서 손에 손잡고 죽으려고?”

“군인이 전장에서 죽는 게 뭐가 이상하단 거지? 자연스러운 일이다.”

“글쎄.”

엘릭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말도 틀린 건 아닌데, 과연 크롬헬이 그걸 좋아할까?”

“…!”

“아무리 그 친구가 공과 사를 확실하게 구분하는 성격이라고 해도 자기 아내까지 그렇게 되는 걸 보고 싶어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

“아무리 정치적으로 적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걔는 내 친구거든. 적어도 내 친구가 슬퍼서 우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

엘릭은 그렇게 말하면서 잡으라는 듯이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진심이 담긴 엘릭의 말에 시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에게는 사자공가의 자식으로서 자존심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홀로 남게 될 크롬헬의 쓸쓸한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부인으로서 살 것인가, 전사로서의 자긍심을 지킬 것인가.

반드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

어느 하나 쉽게 고를 수 없는 문제였으나, 의외로 시로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엘릭의 손으로 향하고.

“잘 생각했어.”

곧 짧은 생각 끝에 그의 손을 잡으려 팔을 뻗던 그때였다.

푹!

무언가 엘릭의 뺨을 스치고 지나가더니 그대로 시로의 미간을 뚫고 지나갔다.

“…!”

비현실적이다 싶은 광경에 엘릭의 눈이 저절로 커졌다.

툭!

시로가 피를 흘리면서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푹푹푹푹-

시로의 숨이 끊어지는 즉시, 엘릭이 제압해놨던 금사자군들 또한 같은 공격을 받고 목숨을 잃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기습.

엘릭은 황급히 공격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죽은 줄만 알았던 레펜트가 비릿한 미소를 지은 채 검지를 올린 채 서 있었다.

그의 손끝에선 희뿌연 연기가 피어오르는 중이었다.

“너…!”

“왜? 내가 그대로 죽을 줄 알았나?”

엘릭의 표정이 잔뜩 분노한 듯 와락 일그러졌다.

레펜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여유롭게 미소 짓고 있는 표정과 달리 숨소리가 거칠었다.

“그렇게 많은 마족들을 때려잡기로 유명한 메르빙거가 그렇게 손속이 약해서야 쓰나. 그렇게 은혜를 베푼다고 한들, 저들이 알아줄 것 같나? 오히려 무너진 자존심을 복구시키겠다고, 제 치부를 가리겠답시고 달려들기 바쁘지.”

레펜트는 황실에 대한 적의가 가득해 보였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녀석은 왕국 연합과 함께 제국의 가장 큰 적이라 불리는 자유혁명군의 간부였으니까.

“나중에 오히려 나에게 감사하단 인사할 생각이나 해두라고.”

말을 하는 내내 그는 자꾸 기침을 해댔다.

아무래도 호인에게 입은 상처가 아직 덜 나은 모양이었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지만. 그가 살아있을 수 있는 건, 반대쪽 손에 들고 있는 정체불명의 큐브 덕분인 것 같았다.

그곳에서부터 나온 기운이 레펜트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있었으니까.

파아아아-

‘저 큐브…!’

『여름의 유물이로군.』

[…저게 뭔지 알아요?]

『본왕이라고 다 알까. 하지만 여름의 의념이 꾹꾹 눌러 담겨 있는 걸 봐서는 범상치 않아 보이긴 하는구나. 비행선의 엔진이나 마정석 같은 게 아닐까 싶은데.』

레펜트는 엘릭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깨달았는지 큐브를 슬쩍 들어 보였다.

“아, 뭘 보나 했더니, 이걸 보고 있었나? 어떤가? 괜찮아 보이지? 후후. 망가진 엔진에서 복구하느라 어찌나 힘들었는지 자네는 모를 거야.”

“…그럼 그것만 들고 가면 될 걸, 왜 굳이 여기까지 온 거지?”

“겸사겸사라고 해두지. 어쨌거나 황실의 인사를 하나쯤은 데려가야 나도 면목이 서서 말이야.”

“마탑과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생각하지 않나 보지?”

“하!”

레펜트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지? 마탑도 결국엔 황실의 개. 혁명군에게 사자공가나 마탑이나 황실과 같은 적일 뿐이다. 둘이서 싸운다면… 뭐, 우리만 좋은 일 아니겠나?”

스르르!

레펜트의 몸이 조금씩 허공으로 떠올랐다.

“이 이상 대화를 길게 해서야 서로 간에 좋을 건 없겠지? 나나 자네나 상태는 그리 좋지 못하니까 말이야. 그러니 다음에 보세.”

다음에 보자.

그 말이 엘릭의 귀에 강하게 꽂혔다.

엘릭은 녀석을 그대로 보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몇 걸음을 쫓지 못했다.

아무리 청춘의 인장을 얻었다 하나, 이전에 무리한 피로가 잔뜩 쌓인 탓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기랄.”

이곳에는 시로와 금사자군이 남아있었다.

레펜트를 무리해서 쫓다가 사체라도 수습하지 못했다간 큰일이었다.

결국 엘릭은 이를 악물고 말았다.

괜히 가슴이 쓰라려 왔다.

하지만.

『어설픈 동정 따윈 하지 마라.』

메피스토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로 꽂혔다.

무덤덤하면서도 강렬한 어조.

『너의 설득으로 생각을 바꿨다고 하나, 이들은 전사였다. 전장에서 적과 마주해 치열하게 싸우다 죽었다. 그것을 축복할지언정 동정하는 것은 저들에게 있어 모욕이나 다름없음이니.』

모욕이나 다름없다.

그 말이 엘릭의 심장을 후벼 팠다.

『그러니 너 역시 이들의 죽음을 슬퍼할지언정 가슴에 길이 남겨 기억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난 아직 멀었구나.’

엘릭은 가만히 두 눈을 감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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