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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326화 (325/405)

2부 66화

여름의 유산

『이 시대에도 저만한 감응력을 가진 자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게 왜요?]

『네놈도 알겠지만 보석은 고유의 속성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걸 아티팩트 형태가 아니라, 속성을 밖으로 끄집어내서 일정한 형태의 마법으로 구현하기란 매우 어렵지. 그걸 전부 감응력으로 해내고 있는 것인데… 이 시대에서는 거의 보지 못했던 방식이란 말이지.』

확실히 엘릭도 놀랄 정도이긴 했다.

어찌 보면 전혀 새로운 형식의 마법이라 할 수도 있는 셈이니.

『문제는 그만큼 질 좋은 보석을 사용해야 하니 돈은 상당히 많이 깨졌겠군.』

아니나 다를까, 메피스토의 말마따나 레펜트가 빛을 잃고 잘게 부서진 보석을 보며 툴툴거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수인족 때문에 성채를 몇 개나 날려 먹은 건지, 원.”

툭.

툭.

“단단하군.”

시로는 얼음 속에 갇힌 호인을 가볍게 두들겨보고 피식 웃었다.

“재미난 술수를 부리네. 확실히 마법사라는 족속들은 신기하단 말이지. 이제 좀 알았다 싶으면 별의별 새로운 것들이 계속 나타나니.”

“믿던 병기도 못 쓰게 되었는데 아주 자신만만하시군?”

“그럴 만하니까.”

“누가 황금사자 딸 아니랄까 봐, 잘난 척은.”

레펜트는 시로가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했다.

“더 재미난 걸 보여줄까?”

레펜트가 차갑게 웃으면서 흑요석을 품에서 꺼냈다.

보석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미 한 번 꺼내기 시작했으니 돈이 얼마가 들던 확실하게 일을 마무리 지을 참이었던 것이다.

“어디 한 번 해보던가.”

시로는 턱을 높이 치켜들었고.

“두 번 다시 어른에게 예의 없이 굴면 안 된다는 걸 가르쳐주마.”

레펜트가 흑요석을 거세게 튕겼다.

번- 쩍!

흑요석이 허공에서 폭발했다.

그리고 돌풍을 그리면서 퍼져나가는 검은색 칼바람.

콰콰콰콰-

칼바람은 단숨에 시로는 물론, 얼음 속에 갇힌 호인마저 단칼에 벨 것처럼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때까지 시로는 여유롭기만 했다.

“재미있군. 그럼 나도 재미난 걸 보여주도록 하지.”

칼바람이 시로의 목덜미에 닿으려는 순간.

콰아아앙!

갑자기 호인을 얼어붙게 만들었던 얼음이 폭죽처럼 터져 나가더니.

쐐애애액-

새빨간 질풍이 통로를 가로지르면서 칼바람을 모조리 분쇄, 단숨에 레펜트가 있는 곳까지 다다랐다.

“크허허허헝!”

“무슨…!”

그야말로 신속(神速).

레펜트는 눈앞까지 다가온 녀석이 호인인 걸 깨닫고 뒤늦게 품속으로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엘릭도 미처 움직임을 놓칠 정도였으니.

퍼억!

레펜트의 가슴에 호인의 발톱이 깊숙하게 박혔다.

“…컥!”

레펜트는 반사적으로 호인의 손목을 붙잡았다.

필사적으로 발톱을 밀어내려 했지만, 순수한 완력으로는 호인을 당해낼 수 없는 노릇.

“안… 돼…!”

콰드드득-

호인의 발톱이 더욱 깊숙이 가슴을 파고들면서.

촤아아악!

그대로 좌우로 찢어버렸다.

쿵!

레펜트의 몸뚱이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품에 있던 보석들이 와르르 쏟아지면서 그 위로 핏물이 가득 쏟아졌다.

“어때? 내 쪽이 훨씬 더 재미있지 않았나?”

시로는 레펜트의 시체를 보면서 씩 웃다가 다시 엘릭을 돌아봤다.

“어쩌지? 이제는 조금 전과 완전히 반대가 되었는데.”

시로가 엘릭과 레펜트 둘을 상대해야만 했던 조금 전과 완전히 역전된 상황을 꼬집어 말했다.

하지만 시로와 엘릭, 둘 모두 보이는 반응은 똑같았다.

“그러네.”

“별 감흥이 없는 눈치로군.”

“어차피 나와는 별 관계 없던 사람이어서.”

엘릭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차피 레펜트와는 적이 될 수밖에 없는 관계였다.

시로가 처치하지 않았어도, 아마 엘릭이 어떻게든 상대해야만 했겠지.

순서가 달라졌을 뿐인 것이다.

『이제는 사람 목숨을 가지고 냉혹하게 판단할 줄도 알고. 많이 달라지긴 달라졌군.』

메피스토의 가벼운 웃음소리를 뒤로 한 채, 엘릭은 두 눈을 가늘게 좁혔다.

“사실 그쪽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었고.”

“자신만만하군. 좋아. 어차피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을 테고, 이 자리가 마지막일 테니 무슨 질문이든 받아주마.”

전사로서의 아량이라도 되는 걸까.

엘릭은 어이가 없었지만, 굳이 그걸 거절하지는 않았다.

호인이 자신에게 언제든 달려들 준비를 하는 걸 슬쩍 보면서 시로에게 물었다.

“이거, 크롬헬의 뜻이냐?”

시로가 나타났을 때부터 계속 확인하고 싶었다.

아무리 황자비라도 마음대로 군대를 동원할 수는 없는 일.

감찰국이 처한 정치적 위기 때문에 사자공가도 최근 들어 몸을 사리고 있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그녀의 행보에 있어 크롬헬이 눈을 감아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다.

그러니 이게 전부 크롬헬의 의지인지가 궁금했다.

요새 들어 여러 일이 있었다 해도, 친우라 생각했던 크롬헬이 자신을 이렇게 대놓고 죽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아내가 남편을 위해 칼에 피를 묻히겠다는데 누구 뜻인지가 그리 중요할까.”

엘릭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녀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결국 그녀가 하는 행동의 결과가 모두 크롬헬의 것과 다르지 않을 테니.

하지만.

그래도 아직 두 사람 사이에 최소한의 ‘선’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아낸 것만으로도 충분히 족했다.

“그럼 두 번째.”

“그 옆에 있는 호인.”

“…?”

“안드로모프의 호왕, 맞나?”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흑의 설원에서 데려온 게 맞냐면… 맞을걸?”

시로의 냉소가 더 짙어졌다.

“아, 그러고 보니 그쪽에 있는 금수들과 친분이 있었던 것 같은데. 많이 마음이 아프겠어?”

“…그렇군. 휴! 정말이지, 다행이야.”

안도에 찬 한숨.

시로로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었다.

그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다행… 이라고?”

“어.”

엘릭이 싱긋 웃었다.

“너네들 하는 짓거리 보니까, 마지막 남은 정까지 확 떨어져서 말이야. 정말 마음 놓고 깽판 쳐도 되겠다 싶어서.”

“자신만만하군. 여하튼 이것으로 질문은 모두 끝났다.”

시로는 검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이니. 엘릭 메르빙거, 네 선조의 무덤에 친히 같이 묻어주마.”

“미안한데, 어쩌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데.”

시로가 무슨 말이냐며 따지려던 그때였다.

쿠쿠쿠쿵!

갑자기 거친 진동과 함께 선체가 정지했다.

마치 시간이 정지라도 한 것처럼.

“무슨…?”

시로가 고개를 위로 번쩍 들었다.

내부를 밝히던 불이 정신없이 깜빡거렸다.

“너희들도 재미난 걸 보여줬으니 이젠 나도 보여줄 차례잖아?”

“뭐…?”

시로가 순간 드는 불안감에 허리를 두 눈을 크게 떴고.

“타샤가 왜 여태 안 보이는지 생각 안 해봤지?”

“…!”

묵직한 소리와 함께 선체가 갑자기 강한 진동과 함께 서서히 한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끼기기긱-

“저놈, 죽여!”

시로가 다급하게 외치면서 뇌전이 섞인 검기를 날렸다.

쿠르르릉-

크허허헝!

통로의 벽면을 따라 샛노란 검기가 빠르게 퍼져나가고, 호인이 엘릭에게 높이 도약했다.

마치 먹이를 낚아채려는 야수와 같은 모습.

하지만 엘릭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용이, 용삼!”

지금껏 로브 안에 숨어있던 레드 드래곤과 블랙 드래곤이 엘릭의 양쪽 어깨 위로 얼굴을 삐죽 내밀었다.

끼유!

끼유유?

“전방을 향해 힘찬 브레스!”

끼유, 끼유유!

레드와 블랙이 재미있을 것 같다며 서로 꺄르륵 거리더니, 일제히 아가리를 쩌억 벌리면서 거칠게 숨결을 내뿜었다.

거친 불덩이와 독 덩어리가 호인에게 쏟아졌다.

레펜트가 사용하던 보석 마법보다 훨씬 정갈하고 강렬한 원소 덩어리들.

콰아앙!

호인은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다 말고 앞길을 막는 귀찮은 것들을 부숴버리겠다는 듯이 팔을 거세게 휘둘렀지만.

퍼어엉-

화아아악!

독 덩어리를 부수는 순간, 아차 싶은 얼굴이 되고 말았다.

발톱에서부터 팔뚝까지, 독기가 단숨에 엄습하면서 피부가 새카맣게 물들었던 것이다.

거기다 독이 흩어지면서 흡입하고 만 가스가 기도와 폐를 썩게 만들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

중독 속도가 빨라도 너무 빨랐다.

호인은 허공에서 몸을 비틀어 어떻게든 독기를 몰아내려 했지만.

화르르르륵!

곧이어 닥친 불덩이가 머리 위로 떨어지면서 전신을 휘감았다.

크헝헝헝!

호인은 바닥에 주저앉아 몸을 박박 긁어댔다.

체내에서는 독기가.

체외에서는 열기가 그를 숨 막히게 만들었다.

그것도 세상 모든 고통 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럽다는 작열통(灼熱痛). 오히려 강맹한 생명력이 그를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시로가 어떻게 도와주려 해도 힘들었다.

함선이 옆으로 기울어지면서 자세를 바로 잡기도 힘들었으니까. 까딱하다간 그녀도 선체가 쏠린 방향으로 쓸려나갈 것 같았다.

이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시로의 안색도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안 돼…!”

하지만 그녀의 바람이 무색하게.

쿠쿠쿵!

함선이 지상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 * *

비행선의 조종실.

타샤는 마침 멱살을 잡고 있던 유령선 자객을 그대로 태워버렸다.

화르르륵!

“컥… 컥!”

단말마와 함께 검게 타버린 그가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후우…!”

그녀는 손을 가볍게 털면서 주변을 쭉 둘러봤다.

그곳엔 금사자군, 그리고 생체 병기들의 사체가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끼유유!

그 순간 그녀의 어깨 위에 앉아 있던 골드 드래곤, 용일이가 날개를 퍼덕이며 울음소릴 냈다.

그러더니 자신을 칭찬해달라는 듯이 타샤에게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알았어, 알았어.”

타샤는 미소를 머금으며 용일이의 턱을 가볍게 쓰다듬어주었다.

용일이는 기분 좋다는 듯이 몸을 파르르 떨었다.

“엘릭 님도 참 언제 이런 걸 생각하셨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타샤를 원동력실에 남기면서 엘릭이 했던 주문은 아주 간단했다.

-원동력실을 파괴하고, 조종실까지 점거할 것.

물론,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그게 가능한가 싶긴 했다.

선체의 크기가 상당했고, 그만큼 적의 수도 많았으니까.

하지만 용일이를 그녀에게 붙여준 것이 신의 한수였다.

다행히 원동력실의 결계는 엘릭이 대부분 해제를 해두었기에 마무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조종실까지 찾아가는 것도 마찬가지.

용일이가 정확하게 길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엘릭이 마법을 통해 길을 미리 숙지시켜뒀던 것.

더구나 용일이는 마법의 조종이라는 용종답게 많은 면에서 타샤에게 도움을 주었다.

디스펠 결계와 비슷한 마법을 펼쳐 적들의 마법을 교란시킬 뿐 아니라, 타샤에게 버프를 걸어주기도 했으니까.

덕분에 타샤는 어렵지 않게 모든 임무를 완성할 수 있었다.

‘게다가 호위로 용아병까지 그림자에 담아주셨고.’

실패하려야 실패할 수가 없는 조합인 셈이었다.

“그럼 이제 마무리를 해볼까?”

타샤는 용일이를 적당히 더 쓰다듬어주고는 양손을 위로 뻗었다.

그녀의 어깨에서부터 시작된 불길이 허공으로 뿜어졌다.

화염은 곧 조종실을 모조리 불태워버렸다.

모든 흔적을 지워버리려는 듯.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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