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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325화 (324/405)

2부 65화

여름의 유산

엘릭은 잠시 멍했던 정신을 차리고 그의 머리 쪽을 향해 손을 올렸다.

되도록 살리고 싶지만, 그 역시 다른 실험체들과 마찬가지로 이미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

다른 수인족들처럼 그의 고통도 끝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사체는… 가져가는 게 좋겠지.’

엘릭이 그렇게 생각하면서 마법을 발동하려는 순간.

번쩍!

곤히 잠들어 있는 줄만 알았던 수인족의 눈이 떠졌다.

그리고 동공에 어린 명백한 적의.

“…!”

엘릭은 반사적으로 얼음 화살을 날렸다.

하지만 호인(虎人)의 움직임이 그보다 조금 더 빨랐다.

와장창!

그의 우악스런 손길이 유리관을 박살내면서 엘릭의 목을 노렸다.

깨진 유리 조각과 물이 마구 튀고.

쐐애액!

엘릭은 가까스로 바닥을 굴러 그 손길을 겨우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얼음 화살 역시 조준이 실패해 호인의 뺨을 스치다 천장에 박혀버렸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콰장창창!

그 소란이 신호가 되어 미처 아직 처리하지 못한 다른 실험체들이 일제히 유리관을 부수며 나온 것이다.

크르르…!

그들은 하나 같이 안광을 터뜨리며 이쪽으로 달려들었다.

『본능만 남은 들짐승들이 따로없군 그래?』

[지금 그런 말이 나옵니까!]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콰콰콰콰!

바닥에서 얼음 가시를 잇달아 일으키면서 저들의 접근을 막고자 했지만, 실험체들은 전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았다.

수인족은 자신이 가진 막강한 피지컬로 모조리 때려 부수면서 달려왔다.

더구나 가장 선두에 있는 호인은 그보다 더 위압적이었으니.

‘강체술까지 본능적으로 사용하고 있어…!’

가뜩이나 호왕 일족의 힘만 해도 대단할진대, 그걸 효율적으로 사용하기까지 하니 환장할 노릇.

그가 생전에 얼마나 뛰어난 투사였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하우…!”

엘릭은 잠시 물러서던 걸음을 멈추고 지면을 세게 밟았다.

쿵!

진각. 강체술의 기본기는 자세를 단단히, 그리고 바로 잡는 데서 나온다.

길게 내뱉은 숨결과 함께 입김이 그의 주변을 감싸고.

퓨퓨퓨퓨-

회전하는 손날과 함께 마력도 웅혼한 힘을 선보였다.

강체술을 사용하는 호인에 맞서서 엘릭도 똑같이 강체술로 맞서려는 것이다.

강체술

전5초, 백호난아

엘릭이 날린 일격과 호인이 날린 일격.

둘의 자세는 거울을 갖다댄 것처럼 아주 똑같았다.

퍼어어엉!

두 주먹이 맞닿은 자리.

공기 터지는 소리와 함께 막강한 충격파가 두 사람의 신체를 흔들었다.

백호난아는 전5초식 중에서도 가장 큰 파괴력을 자랑하는 기술.

두 사람의 주먹이 피투성이가 되고, 어깨 부근까지 칼로 난도질 한 것 같은 길쭉한 상처가 났다.

그 주변은 더 처참했다.

함선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진동과 함께, 마법사들의 도주를 막기 위해 얼렸던 문들이 모조리 와장창 박살나고 말았으니까.

‘무슨 힘이…!’

아무리 선대 호왕으로 추정된다고 해도, 이건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녹야와 휼의 힘이 가미된 일격을 단순히 완력만으로 버텨낸다?

아무리 마족의 인장이 이식되었다고 해도, 이건 너무 위험했다.

‘막아야 해.’

만약 눈앞에 있는 호인과 같은 생체 병기가 대량생산 되기라도 한다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발생할 것 같았다.

그렇기에.

‘여기서 잡는다!’

벨로체의 아버지라는 사실은 머리 한편에다 던져버렸다.

파아앗-

엘릭은 네 개나 되는 내벽을 부수고 겨우 일어나고 있는 호인에게 먼저 달려들었다.

강체술

마호천계

마호(魔虎)라는 단어답게, 엘릭의 움직임은 아주 매서웠다.

“…!”

호인이 뒤늦게 엘릭이 달려오는 것을 보고 자세를 바꾸려 했지만.

“늦었어.”

퍼어어엉-

이미 엘릭의 손바닥이 호인의 복부에 제대로 틀어박힌 뒤였다.

콰드드득!

호인이 다시 한 번 더 뒤로 쭉쭉 밀려났다. 녀석이 지난 자리로 짙은 고랑이 남고, 복부에는 칼날이 소용돌이를 친 것 같은 상처가 깊게 남았다.

언뜻 근육과 내장까지 비칠 정도.

크허허헝!

호인은 잔뜩 성이 난 듯, 윗도리를 모두 찢어버리면서 거친 포효를 터뜨렸다.

투기가 물씬 풍기고, 돌진하려던 그때였다.

콰아아앙!

갑자기 둘 사이에 있는 천장이 무너지면서 먼지를 옴팡 뒤집어쓴 괴인들이 나타났다.

“엘릭…!”

“메르빙거어어어어!”

레펜트와 시로였다.

둘이서 한창 피 튀기게 싸우다 말고, 호인의 포효를 듣고 뒤늦게 찾아온 것이다.

레펜트는 자신을 시로에게 던져두고 갔다는 사실에.

시로는 여태 이상한데 발이 묶여 있었다는 것에 짜증이 단단히 섞인 얼굴이었다.

“아, 안녕?”

엘릭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흔들고 말았다.

“….”

“….”

레펜트와 시로는 그런 엘릭을 어이없다는 투로 바라봤다.

저게 지금 이 상황에서 할 말인가?

『겨울이 나타났을 때보다 추위가 더 하구나? 음홧홧홧!』

[…저도 제가 엿된 거 아니까, 좀 조용해 해주실래요?]

셋이서 합공을 한다면 정말 머리가 아파진다.

엘릭은 최악의 수까지 상정하면서 크런치 모드까지 준비했다.

“…결국 여기를 찾아낸 건가?”

그러거나 말거나.

시로는 가장 먼저 엘릭과 반대편에 있는 호인을 번갈아 보다가 모든 상황을 깨닫고 인상을 찡그렸다.

“메르빙거, 네 놈이 무슨 짓을 벌인 건지는 스스로 잘 알고 있겠지?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너희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알고나 있고?”

엘릭은 평정심을 되찾으면서 눈을 싸늘하게 가라앉혔다.

꼭 자신이 잘못한 것처럼 책망하는 투가 꼴사나웠던 것이다.

하지만 시로는 그게 뭔 대수냐는 투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마족은 죽지 않는 존재. 놈들을 상대하기 위해선 우리도 그만한 방책이 필요하지.”

“권력을 위해서겠지.”

“대의를 위한 소의 희생이 언제는 없었던가?”

“그래서 정당화를 하시겠다?”

“현실을 말해주는 것일 뿐이다. 이상에 사로잡혀 현실조차 보지 못하는 맹인이여.”

“역시 말이 안 통하는구만.”

엘릭이 짜증스럽게 시로를 노려보면서 얼음창을 꺼내 오른손에 쥐었다.

“그래서. 덤빌 거야, 말거야?”

그때였다.

[들리나.]

레펜트에게 메시지 마법이 들려온 것은.

엘릭은 얼음창을 까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상황을 보니 자네 상황도 그리 좋지 않아 보이네만. 잠시 손을 잡는 게 어떻겠나?]

다행히 레펜트도 시로와 다투면서 꽤 고생을 한 모양이었다.

[좋습니다. 그럼 서로 상대를 바꾸도록 하죠.]

[기습인가? 좋다.]

레펜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엘릭은 시로를, 레펜트는 호인을.

[셋 하면 가는 겁니다.]

[그러지.]

아주 짧은 순간 동안, 두 사람은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하나.]

시로는 그 사실을 모른 채 검을 고쳐 쥐고 있었다.

[둘.]

당장이라도 충돌할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

“셋!”

“셋!”

엘릭과 레펜트는 동시에 외치면서 등을 돌린 채 도주하기 시작했다.

서로 같은 방향으로.

콰콰콰콰-

“…?”

싸우려다 말고 덩그러니 놓이게 된 시로만이 황망한 표정이 될 뿐.

그러다 그녀는 뒤늦게 깨닫고 말았다.

저들 둘이 작전을 짰다가 이상하게 되어버렸다는 것을.

“이것들이, 감히 나를 앞에 두고 등을 보여…!”

그녀가 분개했고.

크허허헝!

호인이 포효를 터뜨렸다.

복도가 울렸다.

* * *

“….”

“….”

둘은 나란히 복도를 달리면서 한참동안 서로를 쳐다봤다.

말문이 막혔던 것이다.

같은 생각을 했던 것에.

“…자네가 왜 여기 있나.”

“그러는 그쪽은 왜 수인족을 공격 안하고 도망치는 겁니까? 먼저 손잡자고 할 땐 언제고 지금 도망치는 거예요?”

“그러는 자네는?”

“제가 먼저 물었는데요.”

“…나는 자네가 위층에서 한 걸 그대로 따라 하는 것뿐이네만.”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메피스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비슷한 것들끼리 뭉쳤군.』

[닥쳐요.]

엘릭은 깐족대는 메피스토에게 경고를 날리고 인상을 찡그렸다.

“애당초 먼저 우리를 속인 쪽은 그쪽입니다만?”

레펜트는 순간 엘릭의 멱살을 잡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파지지직!

뇌전의 힘을 머금은 시로의 검기가 뒤에서부터 마구 날아오고 있었으니까.

이대로 도망쳐서는 제자리 걸음뿐이다.

두 사람은 동시에 그런 판단을 내렸고.

동시에 몸을 반전시키면서 보호 마법을 펼쳤다.

얼음벽과 불기둥이 솟아올라 검기를 막았다.

콰콰쾅!

쐐애애액-

검은 연기를 뚫고 나타나는 시로와 호인.

“하아! 정말이지. 짜증나 죽겠군.”

레펜트가 갑자기 품에서 여러 개의 보석을 꺼냈다. 손가락 사이에 하나씩, 총 8개였다.

척 보기에도 값어치가 상당한 것처럼 보이는 고급 보석들.

쯧!

레펜트는 귀찮다는 듯이 혀를 차면서 이쪽으로 달려들던 호인에게 보석 두 개를 세차게 던졌다.

은은하게 노란빛이 도는 주황색 보석, 토파즈였다.

번- 쩍!

허공에서 토파즈에서 엄청난 빛이 폭발하듯 터져 나오더니, 이어서 터진 루비에서부터 엄청난 열기를 지닌 불길이 회오리쳤다.

‘보석 마법?’

엘릭은 그걸 보고 조금 놀란 얼굴이 되고 말았다.

보석은 순도가 맑을수록 더 수준 높은 마법들을 각인시킬 수 있다. 또한, 속성과 관계없이 다양한 마법들을 부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에 많은 마법사들이 바라 마지않는 마법이기도 했다.

문제는 그만큼 천문학적인 액수가 소모될 수밖에 없다는 것.

그 때문에 웬만한 재산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서야, 보석 마법은 함부로 손을 대지도 못하는 것인데.

‘수준이 높아.’

레펜트는 그걸 너무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었다.

아주 익숙하다는 듯.

그의 장기가 원래 파펜 일문의 마법이 아닌, 보석 마법에 있다는 증거였다.

“어떻게든 이거까지는 안 보이려고 했는데… 제기랄!”

레펜트는 이를 까득 물면서 더 많은 보석들을 던졌다.

펑, 퍼어엉!

이번에 발동된 것은 에메랄드 두 개.

휘휘휘휘!

좁은 복도를 따라 강풍이 회오리치면서 호인을 중심으로 구(球)의 형태가 되어 호인을 감쌌다.

그 탓에 불길도 안쪽으로 집중되면서 불의 감옥을 만들어 호인을 불살랐다.

크아아앙!

호인은 제 몸을 마구 할퀴며 고통을 호소했다.

“뒈져라, 제발!”

그리고 남아 있던 사파이어 세 개가 바닥에 떨어졌다.

사아아아-

주변의 온도가 순식간에 떨어지며, 바람이 부는 길을 따라 허공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뿌연 연기가 시야를 가렸다.

그리고 연기가 완전히 가라앉았을 때, 엘릭은 볼 수 있었다.

호인이 구슬 속에 갇힌 것처럼 꽁꽁 얼어버린 모습을.

레펜트가 우쭐대며 이쪽을 돌아봤다.

마치 봤냐는 듯이.

네가 못해낸 것을 나는 해냈다는 듯한 투.

그 유치한 모습에 엘릭은 픽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또각, 또각!

그때, 시로가 조용한 발걸음으로 호인 뒤에 나타났다.

아무 감정도 없는 눈빛을 하고서.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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