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64화
여름의 유산
“뭔가?”
“아무리 그래도 우리 가문의 유산일지도 모르는 걸 그냥 내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라서. 일단 같이 이곳을 정리하고, 가이 님이 보는 앞에서 다시 거래를 트는 건 어때?”
“…뭐?”
레펜트는 설마 이 상황에서 엘릭이 역으로 제안할 줄은 몰랐는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맞잖아? 여기서 결정하기엔 쉬운 문제는 아니니 급한 불부터 끄자고.”
엘릭은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 같은 태도였다.
이에 레펜트는 헛웃음을 짓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정말이지. 여전히 마음에 안 드는 꼬맹이야. 상황이 상황인지라 좋게 말로 하려 했더니.”
말을 마친 그는 곧바로 엘릭을 향해 달려들었다.
“동감이야.”
엘릭은 언령을 발동해서 빙판에서 다시 얼음벽을 세웠다.
“【세워져라】.”
쿠쿠쿵!
그러나 얼음벽은 레펜트의 공격에 쉽게 부서졌다.
흩어지는 얼음조각 사이에서, 레펜트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면서 나타났다.
“학습성이 없군! 이따위 벽은 애당초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때도 됐…!”
하지만 레펜트의 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내가 귀찮게 뭐 하러 댁을 상대해?”
엘릭의 사악한 웃음과 함께.
쩌저저적-
허공에 흩날리고 있던 얼음 파편과 가루들이 갑자기 공기 중의 수분과 함께 잔뜩 응결되었다.
동계의 권능
절대영도
확 하고 가라앉은 온도에 엘릭과 레펜트 사이로 무수히 많은 얼음벽들이 나타나면서 빠르게 자리를 잡아갔다.
그것은 마치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어 앞뒤를 도저히 분간하기가 어려웠고, 거울처럼 말끔한 표면을 갖고 있어 수십 개에 달하는 레펜트의 상(像)을 만들어냈다.
동시에 허공에 그려지면서 빠르게 발동되는 수십 개의 마법들.
체페슈 오리지널
피의 군상(群像)
다미르 오리지널
성역 복술(聖域卜術)
쿠쿠쿠쿠-
그 상들은 하나 같이 진짜 살아있는 레펜트처럼 행동하면서 실제로 그와 똑같은 마법들을 구현해내면서 레펜트의 감각을 교란시켰다.
“이게 무슨…!”
레펜트는 난생처음 보는 마법에 인상을 딱딱하게 굳히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를 둘러싼 마법들은 모두 겨울6장들의 오리지널 스킬이었으니까.
겨울이 빚어내는 얼음 미로 속에서 복합적으로 이뤄지는 마법들은 아주 낯설 수밖에 없다.
특히 체페슈와 다미르는 서로 상반된 기질을 갖고 있으면서도, 살아생전 ‘흑백(黑白)’이라 불리며 같이 활동하던 이들.
연계도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어 레펜트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고.
퍼퍼퍼펑-
수십 개의 상이 쏟아내는 반사 마법 때문에 뒤로 거칠게 튕겨나고 말았다.
‘제기랄!’
그가 이를 악물면서 품에 넣어두었던 마법보석을 꺼내려 했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파지지직, 콰르릉!
그 순간, 뇌기를 품은 검기가 그가 있던 자리로 떨어진 것이다.
촤촤촤촤-
얼음벽들이 부서지면서 생성된 파편들이 더 많은 레펜트의 상들을 비추는 가운데.
거기에 한 명이 더 추가되었다.
시로가 비틀린 입술을 하고서 레펜트에게 빠르게 달려들었다.
“이딴 헛수작을 부린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 줄 알았나?”
“제기랄!”
졸지에 엘릭이 남긴 마법뿐 아니라, 시로까지 홀로 대적하게 생긴 셈이었다.
으드득!
레펜트는 으스러져라 이를 갈 수밖에 없었다.
“엘릭, 메르빙거! 이 개새끼야아아아!”
그의 짜증 섞인 노호성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 * *
『메르빙거의 인성질에 피해자가 한 명 더 생겼군.』
메피스토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이.
“이 미로, 얼마 버티지 못할 겁니다. 그 안에 여기를 파괴시켜야 해요.”
엘릭이 타샤를 돌아보았다.
타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무거운 표정으로 마력융합엔진을 바라봤다.
“쉽지는… 않을 것 같네요.”
마력융합엔진에는 갖가지 방어 술식이 구성되어 있어, 웬만한 외부 충격에는 꿈쩍도 않을 것 같았다.
설사 어떻게 술식을 해제시킨다고 해도, 저만한 물건을 잘못 폭파시켰다간 그들까지도 위험해질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바깥에 있는 마탑의 사람들까지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다.
“그렇겠죠. 하지만 타샤라면 할 수 있습니다.”
“…제가요?”
엘릭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타샤가 부리는 불사조와 이 녀석만 있으면 돼요.”
끼유?
엘릭은 로브 자락에 숨어 있던 골드를 꺼내 타샤에게 안겼다.
골드가 왜 이러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쪽을 보는데, 엘릭은 씩 웃으면서 그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고는 타샤에게 엔진을 파괴시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일러주었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여기 이 엔진은 저희 선조님의 유산 중 일부입니다. 계산은 물론, 검토도 모두 끝났습니다. 골드만 있으면 충분히 가능해요. 불에 대한 감응력은 저보다 타샤가 훨씬 뛰어나기도 하구요. 저보다 이 일에 적임자란 뜻이죠.”
타샤는 대체 그 바쁜 와중에 엔진을 파괴시키기 위한 계산을 언제 마쳤는가 싶었지만.
여태 엘릭이 보인 말 같지 않은 일들을 보니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시로는 타샤까지 잠입했는지 모릅니다. 레펜트가 있긴 하지만, 그도 저를 신경 쓰느라 정신이 없을 테니, 타샤만이 비교적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요.”
결국 그녀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어깨가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할게요. 그럼.”
“좋습니다.”
“엘릭은 그러면 그동안…?”
“전 두 사람 속도 박박 긁어놔야 하고, 또 다른 일도 해야죠.”
“…?”
타샤가 무슨 말인가 싶어 엘릭을 빤히 바라봤다.
툭툭.
엘릭은 대답 대신에 갑자기 자세를 낮추더니 바닥을 가볍게 노크했다.
타샤의 얼굴이 더 궁금증이 어리다가 두 눈이 크게 떠지고 말았다.
레펜트와 부딪치면서 부서진 바닥의 흠집 사이로… 아주 어렴풋하게나마 마기가 풍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거, 설마?”
“네, 맞아요. 바로 여깁니다. 우리가 원래 유령성을 털어먹으려 했던 이유.”
“…!”
아무래도 동력원실 아래에 생체 실험장이 있는 모양이었다.
“자, 그럼 먼저 가겠습니다.”
“네, 그럼!”
타샤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불사조를 소환하는 동안, 엘릭은 강하게 발을 굴렀다.
콰아앙!
그러자 빙판이 깔린 바닥이 잘게 부서지면서 아래쪽 실험장이 훤히 드러났다.
엘릭은 그 아래로 몸을 던지고, 타샤는 마력융합엔진 쪽으로 달려가 곧 들이닥칠지 모를 시로와 레펜트로부터 몸을 숨겼다.
두근두근두근!
‘어떻게든 해내고 말겠어!’
타샤는 증기와 열기를 마구잡이로 뿜어내고 있는 거대 엔진을 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불에 대한 감응력.
한빙 계열의 마법을 주로 사용하는 엘릭으로서는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를, 자신은 반대로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자신이 왜 삼신성이었는지. 왜 그토록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는지를 증명할 때였다.
허공에 마법진이 나타나면서 그녀의 손끝에 닿았다.
타샤의 눈이 다른 어느 때보다 환하게 빛났다.
끼유유!
골드가 그런 타샤를 응원하듯이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냈다.
* * *
탁!
엘릭은 통로에 착지하자마자 인상을 와락 구겼다.
위에서 느꼈던 것보다 훨씬 기분 나쁘고 진득한 마기가 통로에 흐르고 있던 탓이었다.
그리고 이는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여기서 인장은 인장 취급도 받지 못하는군. 대체 릴리스와 이놈들은 그동안 무슨 짓거리를 벌이고 있었던 거지?』
메피스토는 경멸을 숨기지도 않았다. 이제는 이들에게 마족에 대한 지식을 내어준 릴리스를 진심으로 배신자 취급하고 있었다.
“가죠.”
그렇게 통로를 지나기를 한참.
마기향이 점점 더 짙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쪽에 있는 자료 챙겼어?”
“아직입니다.”
“서둘러! 침입자들이 여기까지 발견하면 정말 복잡해진다고!”
“놈들이 동력원실을 노리는 동안, 우리는 어떻게든 이곳을 탈출한다!”
“감찰국만 있으면 어떻게든 재기할 수 있다고!”
거대 실험실로 보이는 곳에는 수도 없이 많은 유리관이 나열해 있었고, 백의를 입은 연구원들은 그사이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빠드득-
그들을 보면서. 엘릭은 자기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말았다.
수십 개의 유리관 안쪽.
수인족으로 보이는 이들이 호흡기를 단 채 둥둥 떠 있었다.
감찰국으로부터 빼앗은 자료에 적힌 그대로였다.
“뭐야?”
“어, 저거…!”
“침입자가 여기까지 나타났…!”
연구원들이 뒤늦게 엘릭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눈보라가 마구 회오리치면서 단숨에 실험장을 가득 뒤덮고 말았으니까.
콰콰콰콰-
엘릭은 가장 먼저 외부로 향할 수 있는 비상 탈출구란 탈출구는 모두 막아버렸다.
그리고.
퍼퍼퍼퍽!
독 안에 든 쥐가 된 마법사들에게 얼음송곳을 잇달아 꽂아 넣었다.
비명이나 애원 따윈 듣지도 않았다.
그냥 철저한 학살 뿐.
순식간에 전투가 끝났고, 바닥은 놈들이 흘린 핏물로 새빨갛게 적셔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릭은 여전히 가슴에서 끓어오른 화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일단 이들부터 모두 구하자.’
유리관에 든 수인족들의 상황은 밖에서 멀리 보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멀쩡한 몸을 가진 이들은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어찌나 잔인하게 실험했는지, 팔다리가 성하게 남아있는 개체가 없었다. 오죽하면 팔다리 정도만 없어도 양호하다는 생각이 들까.
몇몇은 아예 키메라 실험에 동원되었던지, 서로 다른 개체들이 강제로 접합된 흔적도 있었다.
“…미친 새끼들.”
『속이 메스꺼워질 지경이군.』
메피스토도 충격을 받았던지 헛웃음을 흘리면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딱!
엘릭은 인상을 찌푸린 채로 한참 동안 유리관들을 바라보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유리관들 앞으로 얼음 송곳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그리고.
슈슈슛-
챙그랑, 챙그랑!
푸푸푹!
얼음 송곳은 일제히 유리관을 뚫고 수인족들의 미간에 틀어박혔다.
유리관이 깨지면서 숨이 끊어진 수인족들이 저절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래. 고통이 심할 테니, 이런 식으로라도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게 이들에게는 좋을 테지.』
메피스토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푹, 푹, 푹!
엘릭은 그 뒤로도 계속 수인족들의 머리에 화살을 쏘았다.
한참 동안이나.
아무 말 없이.
* * *
그렇게 대부분의 실험체들의 고통을 덜어줄 무렵.
엘릭의 발걸음이 처음으로 한 유리관 앞에서 멈췄다.
『이 녀석, 호왕과 인상이 아주 비슷한데?』
“….”
엘릭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남은 유리관.
그곳엔 호랑이 수인족이 누워있었다.
단순히 호랑이라서 닮은 게 아니라, 정말 생김새나 인상까지 너무 똑닮았다.
심지어 율호왕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안트로모프의 왕족까지 건드린 모양이네요.”
이건 절대 쉽게 넘길 사안은 아니었다.
만약 감찰국이 강체술을 복원하려 노력했던 것처럼, 율호왕도 같이 복원하려 했던 것이라면.
그리고 거기다 마족까지 덧씌우려 했던 것이라면, 정말이지 최악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걸리는 점이 있다면.
‘벨로체는 분명히 호왕 일족이 이제 자신 말고는 한 명도 남아있지 않다고 하지 않았었나…?’
그러다 일순 불안한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안트로모프의 선대 왕이, 벨로체의 아버지가 사실 알 수 없는 이유로 실종되었었다던. 노루스 재상이 했던 말이.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