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62화
시로
엘릭으로서는 당연히 표정이 저절로 일그러질 수밖에 없는 일.
“당신이요?”
“약속하지. 적어도 발목을 붙잡을 일은 없을 걸세. 그때 일 때문이라면 다시 한번 사과하겠네.”
레펜트는 고개를 살짝 아래로 숙였다.
엘릭이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다른 육망성들에 비해 마땅한 명성은 없으나, 그래도 육망성은 육망성.
협조만 잘해준다면 그의 말대로 도움이 되면 됐지, 짐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건 역시나 평의회 때의 그 태도.
처음 봤을 때부터 자신을 아래로 보고 무시하는 모습이 영 탐탁지 않은 것이었다.
마지막에 사과를 할 때에도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은 아니었으니.
만약 만에 하나라도 흑심을 품는다면 그 어떤 적보다 위험할 수 있었다.
엘릭이 영 미심쩍은 듯이 바라보자, 레펜트가 헛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그래. 솔직히 이해는 하네. 하지만 전부 다 지나간 일 아닌가. 그 자리에서 서로 뒤끝 없이 끝내기도 했고. 그러니 같이 가게 해주게. 적어도 가이 님을 돕고 싶은 마음만큼은 진심이니까.”
눈빛만큼은 진지했다.
“저희가 어디로 가려는지는 아십니까?”
“비행선 내로 들어가려는 거 아닌가? 어떻게 가려는 건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엘릭은 짧게 고민하더니 무심하게 툭 뱉었다.
“좋습니다. 따라와요.”
다른 건 몰라도 가이를 돕겠다는 말에서 진심을 느낀 것이었다.
메피스토가 혀를 차며 말했다.
『쯧쯧. 언제 터질지도 모르는 폭탄을 들고 가려고?』
[설마 제가 그렇게 안일하겠어요?]
『그럼?』
[당연히 방패막이죠.]
『그래. 그럼 그렇지.』
일단 황자비인 시로가 있으니, 그녀를 비롯한 금사자군이 있을 확률은 백 퍼센트.
하지만 가장 신경 쓰이는 건 황금사자의 유무였다.
딸의 일이라면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에도 망설임이 없는 그였으니, 이곳에 따라와도 전혀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크롬헬까지 있으면 더 최악이고.
어차피 저곳에 있는 전부를 상대할 필요까진 없다.
비행선의 핵심인 엔진이나 동력원만 찾아 부순다면, 단번에 전세를 바꿀 수 있었다.
그러니 설사 레펜트가 흑심을 품는다 해도, 중요한 순간에 시간만 끌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렇게.
세 사람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죠? 쉽게 들어갈 순 없을 거 같은데.”
엘릭과 일행은 어느덧 함선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이 이상으로는 포격과 촉수의 다툼에 더 가까이 접근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비행선의 주변으로 이전보다 훨씬 두꺼워진 보호막과 방어 결계까지 생성되어 맨몸으로 승선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타샤는 포격의 열기에 눈살을 찌푸리며 방법을 물었고.
엘릭은 차갑게 웃으면서 심안을 활짝 열었다.
“다 방법이 있죠.”
엘릭의 눈에 노출된 세상이 완전히 역전되었다.
비행선의 마법 술식이 결의 형태로 이리저리 뒤섞여 있는 것이 보였다.
눈앞에 있는 저것은 온갖 고위 마법의 집합체의 결과물. 결계와 보호막의 표면을 따라 술식들이 끊임없이 복잡한 회로마냥 엉켜 있었다.
거기다 거기서 흘러나오는 정보량도 막대했으니.
“으음…!”
그것에 더욱 집중하려니 끔찍한 두통이 일어났다.
엘릭은 이를 악물었다.
‘여름의 별장이라고 했으니, 기본 구동 장치는 분명히 우리 가문의 술식과 상당히 비슷할 거야.’
아무리 꼬아봤자, 그 뿌리는 결국 메르빙거.
‘그러니 이를 역산한다면…!’
다행히 엘릭은 겨울을 완성하면서 얻은 가문의 옛 지식이 상당했다. 이를 이용하려는 것이다.
엘릭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거대한 톱니바퀴처럼 하나로 맞물리는 술식 중에서도 그가 집중하는 것은 비행선을 보호하는 결계 술식.
당연한 말이지만, 여름이 만든 마법인 만큼 해(解)를 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워낙 복잡하게 꼬이고 꼬인 탓이었다.
‘누가 메르빙거 아니랄까 봐.’
그러나 메르빙거는 메르빙거가 가장 잘 아는 법.
“…찾았다.”
엘릭은 끝끝내 방어 결계를 구성하는 술식의 해를 찾을 수 있었다.
결계와 결계 사이에 나 있는 허점.
그곳으로 손을 뻗었다.
꽈악!
엘릭은 허공을 거세게 움켜쥔 채로 마력을 일으켰다.
우우우웅-
마정석이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하고.
“【열려라】.”
이어서 천천히 손을 뒤집으며 언령을 발동시켰다.
철커덩!
푸스스스-
그러자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앞으로 포탈이 나타났다.
“서, 설마 술식을 푸신 거예요?”
“허어…!”
타샤의 눈이 저절로 커졌다. 옆에 있던 레펜트도 놀라기는 마찬가지.
마법사인 만큼 저 포탈이 어느 좌표로 연결되는지 바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행선 내부.
그것도 우회로가 아닌 직행로였다.
“이 정도야 뭐, 껌이죠?”
타샤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거들먹거리는 엘릭의 모습에 속으로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비행선은 가이는 물론, 육망성마저 놀랄 정도로 고도의 마법이 결합된 복합 아티팩트였다.
그런 것을 단순히 술식 풀이만으로, 아니, 오히려 그것마저 비틀어 이동 좌표를 만들어냈다?
그것도 이리도 짧은 시간에?
이건 그냥 대단한 정도가 아니었다.
‘천재…!’
아니, 정말 천재라는 단어로도 충분할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정말이지 지금까지 보인 모습들만 해도 놀라운 것들 투성인데.
아직도 더 놀랄 것이 남아있을 줄이야.
‘아니.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인가?’
하지만 생각해보면 마도사 자격시험을 최단 시간에 끝낸 것도 엘릭이지 않은가.
그러니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뭐해요? 어서 가야죠.”
엘릭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타샤와 레펜트도 뒤따라 포탈 안쪽으로 몸을 던졌다.
우우웅!
포탈이 연결된 곳은 비행선 내부에 마련된 어느 한 함실이었다.
“…!”
엘릭은 포탈을 통과하자마자 인상을 굳히고 말았다.
바로 앞에 감찰국 소속으로 보이는 마법사들이 여럿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이라면 엘릭이 나타난 곳이 함실 내에서도 벽이 굽이치는 안쪽 구석이라는 것.
입장하기 전에 미리 은신 마법을 발동시켜둔 덕분에 놈들도 아직 외부 침투를 눈치채지는 못한 것 같았다.
“엘…!”
쉬잇!
엘릭은 뒤늦게 들어온 타샤와 레펜트에게 조용히 하라며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댔다. 그들 너머의 포탈은 이미 모두 사라진 뒤였다.
두 사람은 곧바로 상황 파악을 마치곤 조용히 입을 꾹 다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어떻게 한다?’
엘릭은 여전히 심안을 열어둔 채로 마법사들을 훔쳐보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내부에 잠입한 이상 저들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최대한 조심해서 동력실을 찾아 움직여야 해.’
엘릭은 손을 쥐었다 피면서 고민을 이어나갔다.
‘문제는 저놈들을 완전히 따돌릴 수 있냐는 건데.’
짧은 고민 뒤, 엘릭은 결정을 내렸다.
‘안 되면 짱돌이라도 굴려야지.’
엘릭은 마력을 입가로 모아 전음을 발동했다.
[이제부터 빠르게 이동할 겁니다. 타샤 님은 저랑 같이 이동하고, 레펜트 님은 반대 방향으로 움직여 주세요.]
메시지 마법과는 전혀 다른 마법에 두 사람은 놀라면서도, 곧 고개를 끄덕였다.
양동 작전을 펼치자는 거로군?
레펜트가 입술을 달싹이며 던진 질문에 엘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을 회유할 미끼가 있으면 좀 더 움직이기가 쉬워질 테니까.’
레펜트를 완전히 신뢰할 수 없으니 겸사겸사 적당한 거리를 둘 수도 있을 테고.
그 또한 어느 정도 눈치챈 것 같았지만, 굳이 뒷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어쨌거나 자신도 도울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한 것은 그였으니.
[그럼 시작합니다?]
두 사람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고.
[셋을 외치면 모두 뛰세요. 하나.]
엘릭은 천천히 손가락을 꼽았다.
[둘.]
[셋.]
그 순간, 엘릭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갑작스런 소란에 마법사들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 것도 바로 그때였다.
“저기 뭐야?”
“복장이 못 보던 놈들…!”
“엘릭 메르빙거다!”
“침입자가 나타났다!”
그들이 놀란 나머지 마법을 발동하려 했지만, 그보다 엘릭이 한 발 더 빨랐다.
“【휘몰아쳐라】.”
콰아아아-
강한 눈보라가 순식간에 함실을 가득 채웠다. 마법사들은 어떻게 저항할 새도 없이 꽁꽁 얼어붙고 말았다.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린 고드름과 희뿌연 성에가 급격한 추위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엘릭은 적들이 숨을 거뒀다는 걸 확인하곤 바깥 복도로 향하는 문에다 귀를 가까이 댔다.
다행히 밖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가죠.”
엘릭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한창 전투 중이어서 그런지 복도는 예상보다 더 한적했다.
쿠우웅!
때마침 비행선 밖에서 폭발하는 소리가 벽을 뚫고 들려왔다. 그리고 느껴지는 미약한 떨림.
‘서둘러야겠는데.’
엘릭은 한쪽을 가리키며 레펜트에게 말했다.
“저흰 이쪽으로 가겠습니다.”
“알겠네. 그럼 무운을 빌지.”
레펜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력을 끌어올리며 빠르게 이동했다.
콰아아앙!
곧이어 폭발 소리가 들리며 함선 내부에 경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위잉! 위잉!
복도에 붉은빛이 깜빡거렸다.
“위다!”
“침입자가 나타났다!”
“D-31구획이다! 그쪽으로 서둘러!”
뒤이어 군인들의 정신없는 군화 소리와 외침이 들렸다.
다행히 미끼를 제대로 문 모양이었다.
“저희도 움직이죠.”
“네.”
발소리가 적당히 줄어들었을 때, 엘릭과 타샤는 최대한 기척을 죽인 채로 헤이스트 마법을 발동했다.
그런 와중에 적 몇몇과 조우하기도 했지만.
“여기도 적이 있…!”
“【솟아나라】.”
“컥!”
콰콰콰콱!
무수히 많은 얼음송곳이 날아들며 그들을 빠르게 제거했다.
그리고 복잡하게 길이 난 곳에 다다랐을 때는.
“【나타나라】. 최대한 멀리 흩어져.”
용아병들을 소환해서 제각각 다른 방향으로 뛰게끔 만들었다.
레펜트처럼 미끼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동체 구조도 더 확실하고 빠르게 파악할 수 있을 테고.’
엘릭은 절대 그냥 무작정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이것저것 참 귀찮게 집요하게도 묻더니 아주 잘 활용하는군.』
[그래도 이 정도면 잘하는 거잖아요?]
메피스토는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확실히 그도 맞는 말이긴 했으니까.
그렇게 용아병들이 각지로 흩어지고.
콰앙!
콰콰쾅!
“여기다!”
“아냐, 여기…!”
“제기랄! 대체 어디서 쏟아지는 거야!”
이젠 레펜트가 향한 곳뿐만 아니라 사방에서 폭발과 비명이 들려왔다.
엘릭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하면 적들이 제대로 된 파악을 하지 못할 것이다.
어디로 몇 명이 침입했는지, 목적지는 어디인지.
“불이여!”
화르르르륵!
동시에 타샤가 일으킨 불사조의 불길은 이제 복도를 가득 채우면서 그들이 남긴 흔적마저 지우고 있었다.
쿠쿠쿠쿠…!
깽판의 시작이었다.
“즐겁죠?”
“…예?”
“이제야 웃는 것 같아서요.”
“….”
그러다 타샤는 엘릭의 지적을 받고 난 뒤에야 뒤늦게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엘릭의 뒤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묘하게 변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