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60화
시로
탁!
무전기를 내려놓은 여인이 조종실에서 나왔다. 금사자 시로였다.
그녀는 각 잡힌 걸음걸이로 복도를 가로지르며 갑판 끝, 선두(船頭)로 향했다.
떨어질 듯 말듯, 아슬아슬한 위치에 서곤 뒷짐을 쥐고서 지상을 내려다 봤다.
마탑의 마법사들이 일제히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중에도 유독 그녀의 눈에 띄는 존재가 있었다.
엘릭 메르빙거.
그도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피식!
이렇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그가 참으로 보잘 것 없이 아주 작게 느껴졌다.
그리고 실제로 그녀에게는 그만한 힘이 있었다.
감찰국과 사자공가.
두 곳이 힘을 합쳐서 발굴해내고 복원해낸 이 고대의 신비 병기라면, 그 무엇도 해내지 못할 것이 없을 테니까.
[결국 마지막까지 여기를 떠나지 않겠다는 건가? 다들 멍청하기 짝이 없는 선택을 내리는군.]
시로는 엘릭과 육망성들을 훑어보면서 차가운 어투로 외쳤다.
어기전성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좋다. 이곳을 모두 너희들의 무덤으로 만들어주마.]
지금이라도 투항을 하면 용서해주겠다는 식으로 말했다지만, 사실 그녀는 애당초 저들을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비행선은 아직 외부에 공개되어서는 안 되는 극비.
거기다 엘릭 메르빙거는 이번 기회에 반드시 제거해야 할 암 덩어리였다.
녀석을 죽이는 것에 다소 회의적인 남편이었지만, 전투 중의 ’사고‘라면 충분히 이해해줄 테지.
“남편의 문제를 알아서 해결해주는 것. 이런 게 내조지. 그렇지 않나?”
“그렇습니다.”
그녀의 혼잣말에 바로 뒤에 있던 비서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답했다.
시로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뒷짐 지던 팔 하나를 가볍게 들어 올렸다.
키이이잉-
그러자 함선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열을 내기 시작했다.
측면에 매달린 함포의 포신을 따라 크고 작은 마법진 십여 개가 나타나면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포구에 빠른 속도로 모이기 시작하는 빛의 입자들.
거기서 풍기는 열기가 시로에게도 느껴질 정도였다.
시로가 손가락을 까딱거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보지도 못할 만큼의 미세한 움직임.
그러나 결과는 절대 그렇지 못했다.
지이이이이-
콰르르릉!
엄청난 열기가 압축된 첫 번째 광선이 그대로 대기를 뚫었다.
“피해!”
그 순간 지상에 있던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 소리는 얼마 가지 않아 묻히고 말았다. 함선에서 온갖 종류의 마법포격과 광선들이 협곡 사이로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으니까.
* * *
콰콰콰콰!
쿠구구궁!
십여 개의 광선이 협곡 위를 빗자루처럼 쓸어내고, 갖가지 마법 포격이 절벽을 세게 두들겨댔다.
그럴 때마다 폭음과 함께 곳곳에 깊은 구멍이 생기고, 모래기둥이 치솟으며, 절벽이 마구 무너져 낙석이 협곡 아래로 우수수 쏟아졌다.
하나하나가 전부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것들.
“저딴 말도 안 되는 무기를 대체 어디서 갖고 온 거지?”
“당장 방어 마법이라도…!”
“방어는 무슨 얼어 죽을 방어! 어서 피해!”
콰아아아앙!
마법사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그곳으로 거대한 화염구가 우박처럼 떨어졌다.
불이 꺼졌을 때, 그들의 흔적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근처에 있던 동료들은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디스펠이라도 어떻게 할 수 있으면…!”
콰릉, 콰릉, 콰르르릉!
우르르르!
콰콰콰콰쾅-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마법들에 반해, 마법사들이 당장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도망 뿐.
문제는 무차별적인 난사가 어디로 떨어질지 도저히 예측조차 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아아악! 우리들까지 왜…!”
“저희는 아군입니다! 왜 저희를 공격하시는 것입니까!”
한편, 유령성의 자객들은 적잖게 당황해하고 있었다. 포격이 자신들에게도 쏟아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행선이 등장할 때까지만 해도, 드디어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한창 기세가 등등해져 있던 상태였건만.
저들의 서슬 퍼런 칼날이 적아를 가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절망감에 빠지고 말았다.
엘릭을 상대로 해괴한 미소를 흘려대던 선대 성주도 마찬가지.
-설마… 여기를 전부 파묻으려고…?
그는 시로의 노림수를 깨닫고 이를 악물고 말았다.
감찰국과 손을 잡았던 것은 어디까지나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건만.
이러나저러나 자신의 후예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걸까?
위이이이잉!
선대 성주의 고민과 상관없이, 비행선의 포격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절벽을 깎고, 부수고, 뚫는 등, 대기가 어느새 후끈하게 달아오를 정도였다.
문제는 포격이 점점 더 정밀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치 빗자루로 먼지들을 한데 쓸어 모아 치우는 것처럼.
마법사들도 요격하기 좋은 장소로 토끼몰이를 하면서 점차 범위를 좁혀갔던 것이다.
이대로 가다간 전멸은 시간 문제였다.
“제길!”
“비켜라!”
육망성들이 어떻게든 다급하게 보호막을 펼쳐 버티려 했지만, 디스펠 마법 때문에 계속해서 취소되고 있었다.
마력 순환도 쉽지 않아, 마법을 발동하려 할 때마다 적잖은 내상이 그들의 마력 기관을 계속 괴롭혀댔다.
“크윽!”
필사적인 모습이었으나, 버티는 건 쉽지 않아 보였다.
[끝까지 발악하는 모습이 꼴사납군.]
함선 위에서 시로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검을 뽑아 하늘 높이 들었다.
파직! 파지직!
그러자 먹구름이 드리우더니 검을 향해 낙뢰를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시로의 검이 황금빛으로 물들 때였다.
그녀는 힘껏 검을 아래로 휘둘렀다.
콰릉, 콰르르릉, 쿠르르-
수십 다발의 검기가 뇌전이 되어 지상에 잇달아 내리꽂혔다.
쿵! 쿵! 쿵! 쿵!
그럴 때마다 육망성의 보호막이 부서질 것처럼 휘청거렸고.
콰콰콰콰-
시로는 더 많은 검기 다발을 쏟아내면서 그들을 흔들어놓았다.
육망성과 워메이지들의 눈가에 핏대가 잔뜩 설 무렵이었다.
“모두 물러서라!”
가이가 갑자기 인상을 굳힌 채 소매를 크게 걷어 올렸다.
“탑주님?”
“무엇을 하시려고…?”
워메이지들의 시선이 돌아간 사이, 가이는 무언가를 다짐한 듯 눈을 차갑게 빛내고 있었다.
“엔진의 출력 한계 문제 때문인지, 포격이 거세지면 거세질수록 협곡을 뒤덮고 있는 디스펠도 조금씩이지만 약해지고 있다. 다들 느끼고 있겠지?”
때 아닌 강연.
하지만 다른 육망성과 마법사들은 가이가 어떤 해결책을 찾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제는 워메이지들도 작은 마법들을 발동할 수 있을 정도로 마력 강제가 많이 약해지긴 했으니까.
가이의 말마따나 디스펠과 포격을 같이 병행하기가 어려운 게 분명했다.
“지금부터 ‘문’을 열 것이다.”
“탑주님!”
“하지만 그것은…!”
“위험하지. 아직 제어되지 않은 것들도 많으니까. 하지만 그것 말고 방법이 있나?”
“….”
“…그, 그건.”
가이가 엷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들이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잘 안다네. 하지만 지금은 그것 외에 방법은 보이질 않는군. 그러니 ‘문’을 열고 난 이후에 내가 마력에 취하거든, 평상시 하던 대로. 알지?”
“그…!”
“그럼 시작하지.”
가이는 마법사들의 대답을 듣지 않고 숨을 크게 골랐다.
후웁!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들숨을 크게 쉬면서 두 눈을 부릅 뜬 순간.
쿠쿠쿠쿠…!
그의 등 뒤로 공간이 아지랑이처럼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마법사들은 순간 숨이 턱 하고 막히는 느낌에 재빨리 가이와 간격을 벌렸다. 그들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가이가 저것을 여는 동안에는 절대 옆에 다가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리고.
쿠구궁!
갑자기 공간이 확 찢어지면서 지면을 뚫고 수십 미터는 가뿐히 넘는 거대한 철문이 나타났다.
굳게 닫혀 있는 철문에는 수많은 괴물들이 서로를 물어뜯고 있는 괴악한 형태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보고만 있어도 가슴을 억누르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는 문.
가이 네레스타 – 오리지널
자기영역(自己領域)
괴물의 문
철커덩!
뒤이어 무언가 풀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활짝 열렸다.
그 너머에는 거대한 어둠이 소용돌이를 치면서 당장이라도 바깥으로 나올 것처럼 꿈틀대고 있었다.
콰아아아아-
어둠 속에서부터 크고 작은 수많은 촉수가 튀어나오면서 기괴하게 꿈틀거렸다.
족히 수백은 되어 보이는 촉수들은, 하나하나 엄청난 마력을 품고 있었다.
가이는 함선을 바라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두 번 다시 이걸 꺼내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지.”
* * *
거인(巨人).
그 옛날 용과 함께 살았다던 신화 속의 거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시대를 선도하는. 세계를 이끄는 이들을 말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개개인이 하나의 역사 그 자체였다.
업(業).
그들이 쌓은 이야기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세계의 흐름에 변화를 가할지니.
그렇기에 그들이 내면에 품고 있는 비원(悲願) 또한 거대한 의미를 가진다.
그것을 세계에 구현해 물리법칙으로 바꾸는, 즉 자신만의 소우주를 창안하는 대마법.
그것이 바로 9서클이나, 5체인 이상의 절대자들만이 펼칠 수 있다는 자기영역이었다.
‘저게… 괴물의 문.’
엘릭은 철문을 뚫고 튀어나와 비행선으로 달려드는 촉수들을 보면서 두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이전에 이미 본 적 있는 오거스틴의 자기영역 ‘백야’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던 탓이다.
괜히 현재 황금사자의 자리를 넘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수식어가 붙은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하하하! 비원이 괴물이라? 그럴싸하군. 아주 그럴싸해!』
메피스토는 파안대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압도적인 괴물이 되기를 바라는 것인가? 그래서 저런 말도 안 되는 소환이, 외우주의 존재를 일부나마 끌어올 수 있는 것인가? 뭐가 되었든 간에 아주 재미나구나!』
엘릭은 마른 침을 삼켰다.
존재감만 두고 본다면, 저 괴물의 문은 절대 비행선의 화력에 뒤지지 않을 것 같았다.
[메피, 궁금한 게 있어요.]
『뭐냐?』
[시조가 가진 비원은 무엇이었나요?]
엘릭은 비원에 대해, 그리고 자신만의 영역에 대해 조금씩 되짚어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궁금했다.
저 영역을 완전히 넘어서서 아예 세계를 바꿨다는 시조가 닿은 곳이 어디였는지를.
‘쉽게 말해주지는 않겠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아무리 메피스토와 친해졌다고 해도, 과거사에 대해서는 잘 알려주지 않으려 했으니.
그런데.
『대자연(大自然).』
메피스토는 웬일인지 흥에 잔뜩 취한 채 그렇게 말했다.
『자연, 그 자체였다.』
[자연….]
그 의미를 곱씹던 중.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지. 감히 네레스타의 가주이며, 마탑의 주인인 나를 상대로 이딴 말도 안 되는 수작을 부리려 할 때부터.]
가이의 목소리가 협곡과 절벽 사이사이로 파고들었다.
낮게 읊조리는 듯한 작은 목소리였으나, 모두의 귀에 너무나 선명하게 들렸다.
[적어도 내가 살아있는 한.]
그의 뒤에 있던 촉수가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듯이 꿈틀거렸다. 마치 거대한 괴물이 으르렁거리는 것 같았다.
키이잉-
함선도 이에 대응하듯, 수많은 마법진을 하늘에 그리기 시작했다. 준비된 함포들이 일제히 가이를 조준했다.
[마법으로 내 위에 설 수 있는 자는 그 누구도 없음이니!]
“…!”
엘릭이 그 말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지금 이 순간. 가이의 비원이 너무나 선명하게 와 닿았기 때문이었다.
메피스토의 말대로 그의 말에서 누구보다 높이 서려 하는 야망이 엿보인 것이었다.
절대로 손해 보지 않으며 가문에 이익이 된다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움직이던 모습.
황금사자의 자리를 준다고 했을 때 빛내던 눈.
단순히 뛰어난 가주였기에 네레스타 가문이 마탑의 가장 위에 설 수 있던 게 아니었다.
가주인 가이 본인이 그 누구보다 간절하게 이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이다.
엘릭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무거운 비원의 무게에 몸이 떨렸다.
그리고 그 순간.
가이의 영역과 함선이 충돌했다.
이 시대의 거인과 과거의 거인이 남긴 유산이 부딪치는 순간이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