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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318화 (317/405)

2부 58화

시로

선대 성주?

엘릭은 살짝 미간을 좁히다가 슬쩍 옆을 돌아봤다.

『뭘 그렇게 보느냐?』

[아녜요, 아무것도.]

『…뭐지? 분명히 기분 나쁜 눈빛이었는데. 설마 저딴 시시껄렁한 잡귀 따위와 본왕을 비교했던 것을 아닐 테지?』

[에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요. 전하.]

『뭔가가 있는 게 분명해. 아아악! 하여간 메르빙거 놈들은!』

잡귀 취급한 메피스토의 말과 다르게, 자신을 선대 성주라고 밝힌 유령은 고작 그렇게 취급하기는 어려울 듯했다.

‘존재감만 따진다면 오히려 지금의 메피보다 위야.’

저 정도면 몬스터쯤 된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만큼 선대 성주가 풍기는 음기가 대단했던 것이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거래를 제안하는 건 그쪽만의 생각인가? 아니면 뒤에 있는 놈들도?”

-흐흐! 역시 알아차렸나 보군.

스스스-

선대 성주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간부를 호위하고 있던 다른 자객들의 몸에서도 다른 유령이나 죽은 마족의 영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영체의 전신이 갖가지 인장으로 뒤덮여 있다는 것.

“난 거래 초반부터 밑장 빼기를 하는 놈들과 거래를 하지 않는 주의인데?”

-그러지 말고 ‘우리’ 말을 한 번 들어보지 않겠나?

마기가 뭉게뭉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엘릭은 그걸 보면서 깨달았다.

이들이야말로 ‘진짜’ 유령성의 전력이라는 것을.

-이놈들은 우리의 그릇이라서 말이야. 이들이 죽어버리면 우리도 같이 죽어버린단 말이지. 그래서야 억울하게 죽어서 후예의 몸에 기생하게 된 우리의 한도, 우리를 억지로 업고 다녀야만 하는 후예들의 억울함도 전혀 해결하지 못한 채 끝나지 않겠나?

“그래서?”

선대 성주는 엉망이 되다시피 한 협곡을 쓱 훑어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은 어떻게든 내가 책임지고 수습하겠네. 자네가 필요한 것도 모두 내어주지. 그러니 부디.

그러다 선대 성주의 눈동자가 엘릭에게 고정되었다.

-그냥 떠나주시게.

“너희들을 자유롭게 풀어달라, 뭐 그런 것도 아니고?”

선대 성주의 입가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우리에게 가해진 실험은 이제 어떻게 고칠 방법 따윈 없어. 그냥 이대로 운명이겠거니 하고 받아들여야지. 방법을 찾더라도 우리가 찾아야 하고.

엘릭은 별다른 대답 없이 가만히 듣기만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를 이 꼴로 만든 감찰국의 개로만 계속 살 수도 없는 노릇.

선대 성주의 눈가에 살의가 번들거렸다.

-하지만 지금 그대와 부딪치게 된 순간, 깨닫게 되었다네. 어쩌면 이 지긋지긋한 감찰국과의 악연도 끊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붉게 달아오른 볼은 흥분으로 가득했다.

-그대가 가진 힘이라면. 그리고 그대와 함께 하는 마탑의 힘이라면 능히 감찰국 놈들에게 엿을 먹일 수 있을 터.

“그러니 거기에 손을 보태주겠다?”

선대 성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대가 원하는 것은 감찰국의 기밀 자료가 아닌가? 그걸 모두 넘겨주지.

“그 대가로 너희들을 살려달라는 거고?”

-물론, 그냥 우리를 순순히 보내줄 수는 없겠지. 그대들이 입은 피해도 있고, 제국에서 봤을 때 우리 유령성은 반드시 처치해야만 하는 곳일 테니. 그러니 우리를 놓아준다면, 숨겠네. 아주 깊숙한 곳으로.

선대 성주는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세게 두들기며 말을 이었다.

-원한다면 남쪽의 왕국 연합으로 넘어가도록 하지. 거기서 혼란을 일으키며 살고, 자숙하며 산다면 그대에게도 나쁠 것은 없지 않나?

“흠.”

-그대에게도, 마탑에게도 절대 나쁜 거래는 아닐 텐데?

“확실히 그건 그렇지.”

엘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선대 성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럼 거래를…!

“그런데 그건 너희들이 약속을 제대로 이행했을 때에나 가능한 이야기 아냐?”

-믿기 어렵다면 약속이 모두 지켜질 때까지 나와 이 후예를 같이 인질로 삼…!

“지랄하네.”

엘릭은 냉소를 지으면서 선대 성주의 말꼬리를 잘랐다.

“너, 마음만 먹으면 다른 숙주로 갈아탈 수 있잖아. 그렇지?”

-…!

“게다가 시간을 벌려고 별 개수작을 다 부리고. 참나. 진짠 줄 알았잖아.”

-….

“거짓말을 할 거면 입술에 침이나 바르지 그래?”

한참의 침묵 끝에.

흐, 흐흐흐흐. 선대 성주가 손으로 머리를 짚으면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대체.

얼굴을 덮은 손가락 사이로, 광기에 찬 녀석의 눈동자가 보였다.

-어떻게 알아챈 거지? 분명히 내 말에 빈틈은 없었을 텐데?

여태껏 후덕해 보이던 인상과는 전혀 다른 눈빛이 엘릭을 날카롭게 노려봤다.

* * *

『인장이란 자고로 마족의 상징, 그리고 마족의 근원과도 같은 것. 그런데 근원을 저딴 식으로 억지로 뒤섞어 놓았다? 차라리 없느니만도 못하지.』

메피스토는 상당히 짜증이 많이 난 얼굴이었다.

대마왕일 때에도 언제나 홀로 다니던 그였기에 다른 마족들의 목숨 따윈 안중에도 두지 않았던 그였지만.

그래도 자신의 종족을 존중하지는 못해도 저렇게 ‘도구’ 취급하는 것에는 크게 화가 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엘릭은 알 수 있었다.

저들은 마치 자신들이 어쩔 수 없이 감찰국의 실험을 받은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실은 그들이야말로 저것을 원하였기에 얻은 결과물이라는 것을.

그런데 거래를 하자?

‘개소리지.’

엘릭은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감찰국이나 사자공가가 올 때까지 시간을 끌려는 개소리.’

선대 성주가 숨을 고르더니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군.

휘휘휘휘!

영체를 둘러싸고 있던 인장이 기괴하게 빛나더니, 곧 아지랑이가 되어 간부의 몸으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퍼어엉!

파아아앗-

성주와 합일을 이룬 간부가 이쪽으로 달려들었다. 여태껏 간부를 얼리고 있던 얼음이 폭죽처럼 터져나갔다.

어느덧 그의 손에는 메이스까지 들려 있었다.

‘빠르다!’

엘릭은 눈 깜짝할 새에 얼굴로 날아드는 메이스를 보면서 재빨리 허리를 젖혀 피했다.

하지만 천잠사 위에 있던 탓에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고 말았고.

“이런.”

쩌저적!

다음 천잠사로 넘어가면서 얼음 조각을 만들어내 거기에 달라붙었지만, 숨을 돌릴 새는 없었다.

쐐애애액!

녀석이 기이한 몸놀림을 선보이며 바로 뒤까지 바짝 쫓아왔다.

후웅, 후웅, 후웅-

머리, 무릎, 허리. 불규칙적으로 날아오는 공격.

녀석은 엘릭이 중심을 잡기 어려울 만한 곳만 집중적으로 노렸다.

자세를 낮추면 곧장 발목을 향해 메이스가 휘둘러졌고, 가볍게 뛰어 이를 피하면 뒤이어 찌르기가 들어왔으니 말이다.

천잠사 위에 있는 상대를 어떻게 하면 잘 상대할 수 있는지 확실하게 아는 모습이었다.

계속된 엘릭의 움직임에 천잠사가 마구 흔들렸다.

엘릭은 힘겹게 그 위에서 중심을 잡았다.

그러나 그 전에 메이스가 먼저 움직였다. 정확히 엘릭의 머리를 노리고 들어오는 살초.

그는 재빨리 허리를 숙여 이를 피하려 했다.

“…!”

그 순간, 볼 수 있었다.

미끄러지듯 메이스의 경로가 허공에서 꺾이는 것을.

횡대가 아닌 종대.

메이스가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제길. 제대로 된 무기만 있었어도!’

마기를 이용한 마투술은 완벽하지 못하니 이만한 고수를 상대하는 데에는 많은 힘이 들 수밖에 없었다.

천잠사 위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만 해도 상당한 정신력을 소모로 했으니.

그렇기에 엘릭은 처음으로 무기를 필요로 했다.

동계의 인장으로 만들어낸 얼음창이 아닌 실제 무기.

그것만 있어도 메이스를 막기엔 충분할 것 같았다.

‘한 번만 막을 수 있다면…!’

딱 한 번만 녀석의 공격을 봉쇄한다면 선대 성주를 날려버릴 방법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그때.

저 아래에서 워메이지들과 함께 자객들을 상대하고 있는 사내, 적사자 안드레 윈즈가 보였고.

“안드레!”

엘릭의 외침에 안드레는 자객의 목을 베다 말고 이쪽을 올려봤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마주쳤다.

그리고.

쐐애애액!

안드레는 엘릭의 생각을 읽은 듯, 손에 들고 있던 검을 힘차게 던졌다.

성주는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챘는지 엘릭의 머리를 찍어가던 메이스에 바짝 힘을 실었다.

엘릭이 안드레의 검을 받아 메이스를 올려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카앙!

메이스와 검이 거칠게 충돌하면서 불똥이 튀어 올랐다.

성주가 반동력을 이기지 못해 잠시 휘청거리는 사이, 엘릭은 얼음으로 천잠사와 발을 단단히 붙들어 맨 채로 녀석과 간격을 확 좁혔다.

그리고 이어지는 빙열.

쩌저저적!

퍼어어엉-

천잠사에서부터 올라온 그림자가 성주의 몸뚱이를 순간적으로 얼어붙게 만들었다가 터졌다.

“크윽…!”

성주가 각혈하면서 뒤로 튕겨났지만, 멀리 가지 못하고 다시 천잠사에 붙들린 채 돌아와야만 했다.

천잠사와 발이 연결된 얼음만은 깨지지 않고 남아 움직임을 봉쇄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성주의 패착이 되고 말았다.

“그대로 돌려주지.”

쩌어어엉!

엘릭은 손에 든 검을 그대로 성주의 가슴팍에 깊숙하게 꽂아 넣었다. 마기가 한가득 스며든 덕분에 일어난 검명(劍鳴)이 마치 엘릭의 승리를 말하는 듯했다.

“크르르륵!”

선대 성주는 두 눈을 헤까닥 뒤집은 채로 게거품을 물며 무릎을 꿇고 말았다.

쿵! 쿵! 쿵! 쿵!

몸이 발작이라도 일으키는 것처럼 몇 번씩 크게 들썩였다.

동시에 몸을 뒤덮고 있던 인장들이 잇달아 폭발했다.

펑! 펑! 펑! 펑!

검을 통해 녀석의 체내로 스며든 마기가 인장을 자극해 폭주를 일으킨 것이다.

『육체의 마력 기관과 영체, 그리고 인장 간에 강제로 연결된 복잡한 사슬을 강제로 끊어버릴 생각을 하다니. 정말이지 미친 생각이란 말이지. 파하하하!』

엘릭이 생각한 필승의 전략이 바로 이것이었다.

숙주와 영혼, 그리고 인장 간의 연결은 여러모로 복잡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다 강제로 마기를 때려 박는다면? 당연히 과열로 모든 마력 기관이 망가질 수밖에 없었다.

마기를 상대의 체내에 불어넣는 행위가 위험천만한 작업이기에 웬만한 술사들은 생각도 못하는 무식한 방식이었지만.

엘릭은 그런 계산쯤은 아무렇지 않게 해낼 수 있는 명석한 지능을 지닌 데다가, 마기에 대해서도 조예가 아주 깊었다.

한마디로.

『천적이란 말이렷다, 이 애송이가?』

파하하하! 메피스토의 광소가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동안.

꼬르르륵….

육체에 인식된 마지막 남은 인장까지 박살나면서 숨소리마저 끊어졌다.

스스스-

그리고 육체 위로 떠오르는 영혼.

엘릭은 손을 뻗어 그 영혼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커… 헉!

“자, 이제 묻는 말에 대답해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내가 쉽게 말할 것 같… 크아아아악!

선대 성주는 끝까지 버틸 것처럼 굴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 비명을 질러야만 했다.

엘릭이 영체에 불어넣은 마기가 다시 그를 고통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이었다.

콰드득, 콰득-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하지만 꽤 고생을 많이 해야 할걸? 이 마기라는 게 말이야, 일반인들에게는 아주 괴로운 독 같은 거거든?”

-빌어먹… 아아악!

“에헤이. 욕은 하면 안 되지. 나는 승자, 너는 패자. 언더스탠?”

-제기라아아아알! 아아아악!

“바른 말 고운 말 쓰자니까?”

선대 성주는 저항하는 족족 스며드는 마기 때문에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영혼이 지옥불 안쪽을 데굴데굴 구르는 기분.

그렇다고 손길을 뿌리칠 기운도 없으니 더욱더 미칠 노릇이었다.

-그만, 그만! 대답할 테니까, 제발 그마아아안! 아파! 아파 죽겠다고오오오! 아아악!

“이제야 겨우 말할 자세가 되셨구만?”

-그, 그래, 그러니까 이제 그만! 크아아악! 왜 또! 대, 대답하겠다고 말했는데에에에에!

“왜냐니.”

엘릭이 히죽 웃으면서 대답했다.

“재미있잖아.”

-…!

선대 성주는 그제야 깨닫고 말았다.

자신이 들쑤신 벌집이 아주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메피스토만이 옆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을 뿐이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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