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56화
시로
유령성 진입을 위해 사전에 가이가 따로 분류해둔 이들이 있었다.
<경량화>
<헤이스트>
그들은 빠른 주파를 위해 제 몸에 마법을 잇달아 걸면서 구름다리 위를 내달렸다.
그러다 끝이 얼마 남지 않을 때쯤.
툭!
투투투툭!
구름다리를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고 있던 줄이 모두 끊어졌다.
“…!”
“역시 무슨 수를 써뒀나…!”
“모두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움직여라!”
아래로 떨어지는 이들 중에는 엘릭도 있었다.
그는 당황하지 않고 몸을 비틀어 중심을 잡았다.
“【떠올라라】.”
그러곤 곧바로 마법을 사용해 몸을 띄웠다.
다른 워메이지들도 차례로 비행 마법을 사용했다. 다들 침착한 얼굴이었다. 전투 중에 비행 마법은 아주 기본 중의 기본이었으니까.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끊을 줄이야.’
엘릭은 언짢은 표정으로 위를 올려다봤다.
이미 염두에 둔 바라 그리 크게 놀라진 않았지만, 구름다리가 끊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속으로 ‘설마?’하고 생각했었다.
다리를 끊는 건 누가 봐도 너무 뻔한 계획이었으니까.
‘뭐, 그런다고 문제 될 건 없지만.’
이미 결계는 거의 다 부서진 상태.
결계가 제대로 된 성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지금이라면 마음 놓고 비행 마법을 쓸 수 있었다.
갑자기 격추 마법이 날아올 수도 있을 테지만, 그건 휼이나 용아병들을 방패로 세우면 해결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위로 올라가려는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터지더니, 반투명한 구(球)가 만들어졌다.
솨아아아-
구체가 부서지면서 하늘을 따라 퍼져나갔다.
정체불명의 기운은 얼마 가지 않아 사라졌다.
그리고.
툭!
투투툭!
엘릭의 마법이 강제 취소됐다. 그의 몸을 감싸던 푸른 마력이 사라졌다.
다시 시작된 추락.
“이건 또 뭐야, 디스펠?”
엘릭은 살짝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디스펠은 사용하기가 상당히 까다로운 축에 속한다.
그런데 그것을 광역 범위로 깔았다고?
두터운 결계뿐만 아니라, 구름다리를 끊은 것부터 여기까지, 이미 아주 오래 전부터 외부의 침입에 대비해 많은 준비를 해뒀단 뜻이었다.
힘없이 추락하게 생긴 워메이지들도 적잖게 놀란 상태.
하지만 놈들의 반격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저 높은 절벽 끝. 유령성에서부터 무수히 많은 그림자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름 그대로 ‘유령’처럼 미끄럽게 하늘을 유영하는 그림자들.
그 속에서 무언가 마구 날아오기 시작했다.
촤촤촤촤-!
척 보기에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워메이지들은 어떻게든 방어를 하고자 했지만.
피피픽!
이번에도 디스펠 때문에 마법은 무효화되고 말았으니.
힘을 잃은 이펙트만이 허공에다 수를 놓을 뿐이었다.
“아…!”
몇몇 워메이지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퍼져나가고.
파바바박!
어둠을 틈탄 정체불명의 공격이 그대로 그들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단검이었다.
그것도 극독이 발려진.
컥, 컥….
워메이지들은 어떻게 해독을 시도해보기도 전에 줄줄이 거품을 물거나 안색이 창백해진 채로 급사하고 말았다.
그나마 운 좋게 생존한 워메이지들은 저 그림자들의 정체를 알아보고 입술을 질끈 깨물어야만 했다.
암살 집단 중에서도 최정예들만 모아뒀다는 유령성의 일급 자객들이 직접 움직인 것이다.
그리고.
스스스-
자객들이 일제히 이쪽으로 쇄도하기 시작했다.
쐐애애액-
“젠장! 당장 막아!”
호기롭게 외친 것과 달리, 그들이 마땅히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마법을 쓰려고 해도 곧바로 취소되거나, 생각했던 방향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꺾여 날아간 탓이었다.
모두 광역 디스펠 마법이 만들어낸 현상들.
타닥!
한 자객이 어느새 워메이지의 바로 뒤에 나타나 숨통을 끊고 유유히 하늘로 사라졌다.
그들의 옷은 마치 날다람쥐의 피막처럼 상의와 하의가 연결된 기괴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커헉!”
“젠장! 어디야!”
당황한 워메이지들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자객들을 찾았다.
그러나 정신없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이들을 쉽게 찾기란 불가능했다.
설령 찾는다고 해도 마법도 쓰지 못하는 이들이 그들을 잡을 수 있을 리는 만무한 일.
정말이지 진짜 유령을 상대하는 것처럼 막막하기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지금은 추락까지 하고 있는 상태.
협곡의 깊이가 깊어서 망정이지, 이대로 있다간 그들 모두 떼죽음을 당할 게 분명했다.
유령성도 그것을 노리는 것 같았고.
‘어떻게든!’
‘어떻게든 수를 내야…!’
워메이지들의 얼굴에 다급함이 어리는 동안.
한편, 엘릭은 어떻게든 냉정함을 유지하면서 유령성 자객들의 비밀을 찾아내고자 했다.
‘대체 어떻게 하늘을 마음대로 뛰어다닐 수 있는 거지?’
가장 큰 방법은 마법이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광역 디스펠 마법이 가진 가장 큰 단점은 특정 대상을 지정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일정 범위의 공간 내에 있는 마나 스트림을 모두 뒤트는 까닭에 피아의 구분이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아티팩트를 사용하는 것은 절대 아닐 터였다.
그래서 보통 사자공가와 같이 검과 무술을 주로 사용하는 자들이 마법사들을 상대할 때 쓰는 방식이었는데….
“뭐지? 대체…?”
심안을 사용하려 해도 마력이 봉인 되었으니 당장 발동하기도 힘든 상태.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반격할 방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그보다… 대체 언제 풀리는 거지?’
심상(心想) 속. 엘릭은 간질간질하던 무언가를 한참 동안 매만졌고.
‘됐다!’
곧 풀리는 듯한 느낌과 함께 마력이 아닌 새로운 기운을 뽑아내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늦는군.
휼의 핀잔과 함께 엘릭의 손끝에서 피어난 것은 그림자처럼 새카만 아지랑이, 바로 마기였다.
마력과 마기는 엄연히 다른 성질의 기운.
다행히 저 디스펠 마법은 마력을 잠그는데 특화가 되어 있었으니, 마기를 이렇게 뽑아낼 수 있었다.
물론, 엘릭이 부리는 마기는 마력에 융화되어 있는 탓에 따로 분리해서 쓸 수 있는 양은 극히 저조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 일차적인 위기를 타개하기에는.
“저 술식이 얼마나 복잡한데. 그걸 역산해서 마기만 풀어낸 것만 해도 대단한 거거든?”
엘릭은 짜증 섞인 투로 투덜거리면서 눈을 크게 떴다.
“그래도 저놈들은 이런 건 전혀 생각도 못 했겠지, 안 그래?”
마기를 눈동자 속으로 유도했다. 그러자 검은 잉크를 쏟은 것처럼 녹안이 검게 물들었다.
심안이 열린 것이다.
덕분에 볼 수 있었다.
절벽과 절벽 사이. 협곡 틈새 사이로 아주 가느다란 실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을.
자객들은 마치 거미줄 위를 돌아다니는 거미처럼 그 위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 * *
유령성에서부터 시작된 실은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주변 곳곳에 퍼져 있었다.
절벽은 물론이고 워메이지들이 서 있는 바닥까지.
자객들은 그 위를 아무렇지 않게 뛰어다니면서 마치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야말로 기예라고까지 부를 수 있을 기술.
“제일 표적 대상, 엘릭 메르빙거로 추정되는 자를 발견하였다.”
“그가 어떤 반격기를 마련할지 모른다는 상부의 지침이 있었다.”
“그러니 지금부터 빠른 제거를 시도한다.”
그러다 한 무리의 자객들이 엘릭을 발견하고 이쪽으로 활강해오기 시작했다.
쐐애애액-
‘일단 저 실부터 끊어야겠는데…!’
엘릭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마기를 손끝으로 끌어모았다.
하지만 마력 없이 웬만한 장정들을 아무렇지 않게 버텨내는 강도를 지닌 저 실들을 쉽게 끊을 수 있을까?
더군다나 어째서인지 실 주변에는 마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특이한 내력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건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구나.』
메피스토가 입을 연 건 그때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는 흥미롭다는 듯이 실 위를 뛰어다니는 자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요? 저게 뭔지 아세요?”
엘릭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메피스토가 실의 정체를 안다면, 끊을 수 있는 방법 또한 알고 있을 테니까.
『알다마다. 본왕이 활동하던 시절에 마족들이 저런 방식으로 암살을 많이 시도했었다. 모르는 게 이상하지!』
“마족들의 기술…?”
『그런데 딱 보아하니 저것들은 흉내에 지나지 않을 뿐이지, 제대로 쓰지는 못…!』
“저기요, 메피.”
엘릭이 인상을 와락 쓴 채 메피스토의 도중에 끊었다.
“지금 그게 중요해요? 그래서 저게 뭐냐고요. 뭔 이상한 소릴 하고 있어.”
『너, 너…!』
“지금 저랑 마법사들 떨어지는 거 안 보여요? 빨리 말해요, 어서!”
당황한 메피스토는 당장이라도 속에 있는 말을 끄집어내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엘릭의 말대로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이를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괜히 엘릭의 심기를 건드렸다간 손해 보는 건 자신이었으니.
그는 실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건 천잠사(天蠶絲)라는 것이다. 물론 평범한 것과는 달리 아주 희귀한 마물 누에에서 뽑아내는 실이지.』
“마물… 이라.”
어쩐지 실에서 마기가 일렁이고 있더라니.
“그럼 끊는 방법은요?”
『천잠사는 내구도도 내구도지만 아주 예리하기도 해서 웬만한 마법 따윈 그냥 잘라버릴 것이니라. 화력 마법으로 태워버리거나, 실을 끊을 수 있는 특수 가공된 칼을 써야만 하지.』
그의 말을 들은 엘릭이 아주 잠깐 동안 고민에 빠졌다.
일단 마법은 패스.
간단한 마법 정도는 어떻게든 사용하겠지만, 그 정도로는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위력도 떨어질 테고.
그렇다고 해서 그런 칼이 있는 것도 아니니.
이걸 어쩌지?
‘방법이 있다면 휼을 강제로 이쪽으로 끄집어내려야 하는데…!’
그래서는 자칫 워메이지들도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땅바닥이 거의 보이는 지금, 더 이상 결정을 미루기만 할 수는 없었다.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어쩔 수 없지!’
엘릭이 무리해서라도 흉신의 인장을 최대로 발동시키려던 그때였다.
『아, 그러고 보니 다른 방법도 있었군.』
메피스토는 무언가 떠오른 듯 말했다.
엘릭의 시선이 빠르게 그쪽으로 돌아갔고.
『아니면 너도 똑같이 실을 이용하면 된다.』
메피스토가 히죽 웃으면서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 * *
육망성 등이 있는 절벽 위.
가이와 간부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합니다. 아무리 감찰국의 보호 기지라도 그렇지, 이런 대규모의 디스펠 결계가 있다니요!”
가이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것이다.
이만한 마법 결계라면 자신들의 마법 탐지에 걸리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아무래도 조심해야겠네. 유령성 말고도 또 뭔가가 숨겨져 있는 게 분명하니.”
그리고 무엇보다 가이는 ‘자기영역(自己領域)’마저 펼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9서클 대현자 이상만이 부릴 수 있다는 기예.
자신의 심상에 그리는 비원을 현실에 구현하는 대마법(大魔法).
모든 마력을 끌어내 사용하는 기술인만큼 광역 디스펠 마법 아래에서는 전개하기가 많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화르륵!
“커헉!”
때마침 이쪽을 노리고 달려들던 자객들이 일제히 파이어볼을 얻어맞고 추락했다.
파이어볼이나 매직 미사일 같은 기본적인 1서클 마법까지 막힌 건 아니라는 것.
아니, 정확하게는 가이가 억지로 마력을 쥐어짜 전개하는 것에 불과했지만.
이것만 해도 모든 마법사들의 손발이 묶인 것이나 다름 없는 지금에서는 아주 중요했다.
위력 또한 1써클 마법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아주 강렬해서 자객들은 섣불리 덤비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가이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대체 누가 이런 결계를...’
아무리 디스펠이라고 해도 무조건 절대적인 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상대의 마력을 상회하지 않는 이상 발현하기 힘든 기술인바.
그런데도 마탑주인 가이의 마법을 이만큼 억제할 수 있다는 건, 디스펠 마법 시전자, 혹은 시스템이 그보다 우위에 있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갑갑할 수밖에.
무엇보다 그들의 발이 이렇게 묶여서야 이미 저 협곡 아래로 추락한 워메이지들을 구할 방법도 없지 않은가.
대체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으니 갑갑할 노릇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저 아래에 엘릭이 있다는 정도?
‘엘릭, 서두르게.’
그렇기에 가이는 초조한 마음을 가까스로 참으면서 엘릭이 빨리 무슨 수를 내어주기를 바랐다.
지금 디스펠 마법을 없앨 수 있는 사람은 그밖에 없었으니까.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