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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313화 (312/405)

2부 53화

흉신(凶神)

그때까지도 페르겐과 한패인 영지병들은 흥미롭다는 듯이 구경만 하고 있었다.

결국 여인은 포기한 듯 저항을 멈췄다.

“그래. 그래야지.”

페르겐은 이를 눈치 채고 슬쩍 힘을 풀면서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처음부터 이리 나왔으면 서로 힘들 것도 없었…!”

뻐억!

그가 방심한 순간, 여인이 그의 급소를 걷어찼다.

“…!”

페르겐은 제 가랑이 사이를 붙잡고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아야만 했다.

“아, 아아아악!”

“페, 페르겐 님!”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병사들이 화들짝 놀라 달려왔다.

페르겐은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소리쳤다.

“저거! 저거부터 잡아! 얼른!”

타다닥!

그사이 여인은 다급히 왔던 길을 달리고 있었다.

병사들도 허겁지겁 그 뒤를 쫓아 달렸다.

허억, 허억!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여인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면서 더 빠르게 달렸지만, 안타깝게도 체력이 따라주지 못했다.

오래 가지 않아 숨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그러다 우물가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뛰지 못하고 멈춰야만 했다.

“이 미친년이 진짜!”

“거기 서지 못해!”

“지금이라도 순순히 돌아온다면, 페르겐 님께 따로 말씀드려 처벌을 참작할 것이다. 하지만 끝까지 도망치려 한다면 사살하겠다!”

병사들은 자신들을 고생시킨 시비에게 화를 내면서도, 더 도망칠 수 없게 사방을 점차 포위해나갔다.

여인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칼을 빼든 저들도 무서웠지만, 이대로 끌려갔다가 벌어질 일이 더 두려웠다.

이대로 치욕을 당할 바에는 저들에게 엿이라도 먹이고 싶었다.

하지만 도망칠 곳 하나 보이지 않아 어떻게 해야 하나 싶던 도중.

갑자기 여인의 눈에 우물 하나가 들어왔다. 그 옆엔 바구니가 아무렇게나 굴러다니고 있었다.

“….”

여인은 잠시 병사들과 우물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고는 우물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타다닥!

“서, 설마!”

“미친…!”

“야! 멈춰!”

여인은 망설임 없이 우물로 몸을 던졌다.

풍덩!

“아, 안 돼!”

그 모습을 본 병사들은 사색이 되어 우물에 달려왔지만, 이미 여인의 모습은 어둠에 가려져 보이질 않았다.

“….”

“…어, 어떻게 하지?”

“제기랄…!”

병사들은 서로의 얼굴을 멀거니 바라봐야만 했다.

이대로 돌아갔다가 페르겐에게 듣게 될 호통도 호통이었지만, 여인이 보인 단호함에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일단… 돌아가자.”

병사들은 다시 페르겐과 영주성이 있는 마을로 돌아갔다.

그리고.

“….”

그들과 다른 의미로 큰 충격을 받고 가만히 우물을 바라보는 자가 있었다.

‘이상… 하군.’

휼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든 광경을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서 뭔가 말 못 할 찝찝함을 느꼈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서늘해지는 느낌.

난생 느껴보지 못한 기분이었다.

왜일까?

처음으로 만난 인간이 죽었다는 사실에서 느낀 허무함?

숲에서는 받지 못했던 호의를 보여줬던 인간에 대한 연민?

사실 죽음이라면 지금껏 수도 없이 봐왔다.

그런데도 이리도 복잡한 감정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우물을 가만히 바라보던 휼은 조용히 그녀를 따라 물속으로 들어갔다.

포옹!

작은 물방울이 수면에 튀었다.

‘어둡… 군.’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물속.

무언가 자신을 따라 들어왔다는 사실을 눈치 챈 여인이 눈을 떴다. 그녀는 이제 의식이 가물가물한 상태였다.

휼과 그녀의 눈이 마주했다.

눈만 동동 떠 있는 검은 그림자. 처음 만났을 때와 다른 모습이었지만, 여인은 상대가 휼이라는 것을 눈치 채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휼은 그녀의 팔목을 붙잡았다.

그대로 밖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

여인이 팔에 힘을 줬다.

나가기를 거부한 것이다.

씁쓸함이 걸린 그녀의 미소가 마치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

휼이 물었다.

그럼 무엇을, 원하지?

육성을 낼 수는 없으니 사념을 풍겼다. 얼마 전에 깨달은 의사 표현 방식 중 하나였다.

어느덧 그녀의 눈빛은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버금버금 입술을 움직였다. 그때마다 거품이 올라왔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휼은 그녀가 뭘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복수.

공포.

아무런 설명도 없는 두 단어.

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첫 번째 대상의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알았다.

그렇게 말하면서 잡고 있던 손을 놨다. 여인이 천천히 아래로 가라앉았다.

대신에 대가로 이걸 가져가도록 하지.

휼의 손아귀엔 여전히 이름 모를 여인의 그림자가 들려 있었다.

저 멀리.

여인은 희미한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 * *

휼은 천천히 우물 밖으로 나왔다.

처음 여인에게 모습을 드러냈을 때처럼 그림자가 천천히 일어났다.

꾸물꾸물.

차이가 있다면, 지금은 짐승의 형상이 아닌 여인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

찰박!

물에 젖은 발자국 소리가 고요한 숲속에 퍼졌다.

그것이 누군지를 본능적으로 알아챈 마물들은 모두 숨을 죽였다. 오늘 밤에 무슨 사달이 일어날 것을 알 수 있었다. 벌써부터 피비린내가 그들의 코끝을 찌르는 것 같았다.

찰박!

찰박!

휼은 곧바로 영주성으로 향했다.

“저, 저 사람은…?”

“영주성의 시비 아냐?”

“그런데 이 밤중에 왜 저렇게 홀딱 젖어 있는 거지?”

주위 사람들이 휼을 이상하게 바라봤지만, 그, 혹은 그녀는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도착한 영주성.

“너, 너…!”

“돌아왔다더니 진짜였어!”

“살아있었나?”

여인이 우물에 몸을 던지는 걸 봤던 병사들은 휼을 그녀로 착각하고 안도에 찬 한숨을 내쉬었다.

“또 다시 비슷한 짓을 저지르면 경을 치게 될 것이야!”

그중에 선임 병사가 인상을 찌푸리면서 호되게 야단쳤다.

“….”

“…흠흠! 그래도 이렇게 돌아왔으니 다행이다.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긴 하지만, 우선 페르겐 님을 찾아뵙고 인사드리자. 많이 걱정하고 계시다.”

이미 페르겐에게 말 못할 치욕까지 당했던 병사들은 가만히 휼에게 따라올 것을 종용했고.

끄덕!

휼은 여전히 아무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병사들은 뭔가 분위기가 달라진 것 같은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곧 별일 아니겠거니 하고 여기면서 휼을 페르겐이 있는 방으로 데려갔다.

“뭐야! 죽은 줄 알았더니.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페르겐은 휼을 보자마자 반색하며 다가와 허리춤에 팔을 감았다.

“으흐흐. 지금이라도 고분고분하게 말을 들으면 오늘 있었던 일은 내가 없던 일로… 큽!”

꾸물.

페르겐은 말을 하다 말고 도중에 멈춰야만 했다.

휼이 그를 보다 말고 갑자기 얼굴을 기이하게 일렁였기 때문이었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황급히 팔을 거두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마치 고정된 듯, 팔이 꿈쩍도 하지 않았으니.

휘리리릭!

여인의 몸에서부터 길쭉하게 늘어난 그림자가 단번에 페르겐의 입술을 틀어막았다.

“읍읍! 으으으읍!”

페르겐이 발버둥 치면서 어떻게든 밖에 있는 병사들을 부르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그림자가 팽팽해지면서 머리부터 돌아가고 말았다.

우드드득!

복수.

쿵!

페르겐의 몸뚱이가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페르겐 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때마침 소란을 듣고 문이 벌컥 열렸다.

휼이 고개를 돌린 곳.

병사들의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다.

“페르겐 님!”

“네, 네 이놈!”

병사들은 하나 같이 창이나 검 따위를 들고 휼에게 달려들었다.

휼은 그들을 바라보며 안광을 터뜨렸다.

그리고 공포.

콰아아아아앙!

본래의 거대한 모습을 드러낸 휼은 단숨에 영지병들을 죽이곤 그들의 그림자를 흡수했다.

그럴 때마다 그의 몸집이 커졌다.

콰드드드.

영주성이 휼의 크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

.

.

그 이후.

영지는 죽음의 영지로 소문이 났다.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 중에서 어느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휼에 대한 소문이 주변 영지로, 그리고 국가로 파다하게 퍼져나갔다.

그때마다 위협을 느낀 이들은 군대를 보내 토벌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모두 그림자를 뺏겨 죽을 뿐.

이에 휼의 악명은 점점 더 높아져만 갔고.

악명에 비례해서 휼 역시 미친 듯이 강해졌다.

공포와 광기를 뜻하는 ‘휼(獝)’이라는 이름이 퍼진 것도 그때부터였다.

그리고 흉신이니 마왕이니 하는 명칭으로 악명을 떨쳤을 무렵.

어느 전사가 홀로 휼을 찾아왔다.

오랜만에 보는 인간이구나.

휼은 그림자 속에서 톱니 같은 이빨을 보이며 말했다.

그러나 이내 흥미로운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껏 봐왔던 이들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던 탓이다.

기사도, 마법사도 아닌 기운.

크크큭. 흥미롭군. 네놈은 누구냐?

그러나 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곧바로 전투 태세를 갖췄을 뿐.

내게 죽임을 당한 인간의 가족, 혹은 친구, 뭐 그런 것인가 보군. 좋다. 오너라. 놀아주마.

휼의 그림자가 해일처럼 일어나면서 사내를 덮쳤다.

* * *

‘녹야의 시조.’

엘릭은 사내가 갖춘 자세를 보고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아마 휼과 녹야의 갈등은 저때부터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휼의 기억은 거기서 시간을 몇 번씩 뛰면서 다른 것을 비추었다.

오거스틴의 얼굴이 보였다. 지금보다는 훨씬 젊어 보이는 인상.

지친 얼굴로 앉은 그의 엉덩이 아래에는 넝마가 되다시피 한 휼이 겨우 형상을 유지한 채로 있었다.

천 년이 넘도록 대에 대를 이은 싸움이 드디어 끝나는 순간이었다.

후후후. 이 못 할 짓도… 마침내 끝이 나는군.

죽음의 순간에도 휼은 오히려 후련한 모습이었다. 동시에 그의 눈빛은 누군가를 그리는 듯했다.

하지만 싸움에서 승리한 오거스틴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붕대 감긴 왼팔을 보이며 절규했다. 엘릭도 이전에 보았던 다크 엘프의 팔이었다.

“고작 이따위로 죽는다고? 그럼 대체 왜 세트를 죽인 거냐! 말해봐라!”

울부짖듯 외치는 오거스틴의 모습에 휼은 비웃음을 던졌다.

왜긴. 세상에 공포를 심어주기 위해서다.

“공포?”

그래. 공포. 그것이 내가 움직이는 유일한 이유지.

여인이 던진 소망은 언제부턴가 휼을 움직이게 한 원동력이 되었으니.

어쩌면 여인의 그림자를 가져왔을 때부터 이러한 수순은 지극히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네놈을 죽일 것이다.”

하지만 오거스틴은 그런 놈을 도저히 이대로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천 년을 넘게 이어져 온 악연의 수레바퀴는 이렇게 멈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뻐억!

오거스틴은 붕대 감긴 손으로 있는 힘껏 휼을 후려쳤다.

순간적으로 휼의 형체가 완전히 흐트러졌지만, 그의 입가에 맺혀 있는 조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네놈을 부활시켜 다시 죽일 것이다.”

뻐어억!

“몇 번이고 상관없다. 죽이고, 또 죽일 것이다!”

빠아아악!

“너희는. 네놈은 그러고도 계속 살 수 있을 테니까.”

화아아악!

모든 기억의 회상이 끝났다.

되돌아온 현실 속. 휼은 여전히 오거스틴의 마투술과 백야에 손도 쓰지 못하고 갈가리 찢기고 있었다.

콰콰콰콰-

‘눈’들이 뿜은 광선에 휼의 몸뚱이 곳곳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

그럴 때마다 그림자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그래서 나한테 그렇게까지 맡기려 했던 거구나.’

엘릭은 문득 오거스틴을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마치 광인처럼 자신에게 집착하던 네레스타의 은거 기인.

당시에 그는 휼을 맡기며 ‘제대로 된 승패를 가리기 위해’라고만 얘기했었다.

그러나 그의 기억까지 본 지금.

엘릭은 또 하나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 소중했던 사람을 죽인 휼을 몇 번이고 찢어 죽이기 위해서.

휼이 미쳤던 것처럼.

오거스틴도 언제부턴가 그처럼 미쳐 있었던 것이다.

파아아아!

흉신의 인장이 찬란하게 빛났다.

엘릭은 그것을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생각했다.

어쩌면 저 지긋지긋한 악연의 수레바퀴를 멈출 수 있는 건 자신뿐일지도 모르겠다고.

흉신의 힘이. 녹야의 감정이.

절대 섞이지 않을 것 같은 두 개의 힘이 모두 이 손에 담겨 있었다.

우우우우웅!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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