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52화
흉신(凶神)
그림자가 모일수록 휼의 기억이 좀 더 선명해졌다.
인장 속에 담긴 사념은 진명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지표가 된다.
더군다나 휼은 아직도 그 성격을 읽기가 힘들다.
엘릭은 그 기억을 가만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 * *
대륙의 정중앙을 가로지르는 산맥, 그 너머에 존재한다는 머나먼 동대륙의 어느 곳.
겉보기에도 왜소하기 짝이 없는 작은 아귀(餓鬼)가 기겁하면서 무언가에 쫓기고 있었다.
머나먼 과거.
어쩌면 천 년도 전에 있었을지 모를 아주 작은 크기의 휼이었다.
“주, 죽고 싶지 않아!”
휼은 서둘러 나무 아래에 드리운 그림자 속에 몸을 감췄다.
그리고 잠시 뒤.
크르르!
검치호처럼 기다란 송곳니를 지닌 마물이 나타나 주변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아귀 같은 하급 마물은 한입에 찢어발기고도 남을 상급 마물이었다.
덜덜덜….
휼은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비명소리가 튀어나올 뻔한 것을 억지로 입을 틀어막아 참았다.
제발. 제발 저리 좀 꺼져줘.
그렇게 애타는 시선으로 바라보길 얼마나 지났을까.
끝끝내 사냥감을 찾지 못한 마물은, 아쉽다는 듯이 혀를 차곤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렇게 한숨 돌리나 싶었지만.
푸드득!
위험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흐억!”
나무 위에 앉아 있던 또 다른 비행형 마물이 달려든 것이었다.
수직으로 활강하면서 날카로운 발톱으로 휼을 단박에 낚아채려 했다.
휼은 화들짝 놀란 채로 황급히 몸을 뒤로 뺐다.
촤악!
운 좋게 발톱은 몸의 일부만 찢고 지나가 무사히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다.
휼은 자신이 왔던 방향으로 다시 허겁지겁 뛰기 시작했다.
그 뒤로도.
휼은 몇 번씩이나 죽을 뻔한 위기를 겪어야만 했다.
땅바닥에서 튀어나오고, 하늘에서 내려오고, 물가에서 덮치려는 등.
어디를 가나 목숨이 위태로웠다.
다른 마물과 달리 휼은 커다란 덩치나 날카로운 발톱이 없어 맞서 싸울 수단도 없었다.
그저 커다란 엄폐물에 숨어서 몸을 피하는 게 전부일 뿐.
그것이 바로 여기서 하급 마물 따위가 처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배… 고파….”
그러다 보니 항상 굶주림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고.
“머, 먹을 거다! 먹을 거!”
그러다 누군가 먹다 남긴 마물의 사체가 나타나기라도 하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비록 절반 이상이 뜯긴 데다 그마저도 살코기는 거의 남아있지 않았지만, 휼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미식이었다.
이런 것도 먹지 못하고 흙만 파먹어야 하는 날도 수두룩했으니까.
이런 식으로나마 삶을 연명하는 것이다.
우드득. 우드득.
그렇게 먹었다.
어둠 속을, 그림자 속을 오고 가면서 다른 이들의 눈을 피했다.
그리고 남들이 먹다 버린 사체를 먹고, 먹고, 또 먹었다.
그럴 때마다 휼의 몸집은 아주 조금씩이긴 해도 커지긴 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비켜라!”
엄폐물에 숨어 몸을 덜덜 떨던 휼은 어디에도 없었다.
바닥에 굴러다니던 시체나 주워 먹던 휼은 이제 당당하게 마물들을 차례로 사냥해 먹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작은 녀석에서부터.
나중에는 큰 덩치를 지닌 녀석들까지.
그러다 어느 날, 과거에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던 검치호 마물을 만날 수 있었다.
“으흐흐. 으하하하. 그래. 너 그때 날 먹으려 했었지? 이번에는 내가 먹어 치워주마.”
휼은 녀석에게서 도망쳤었지만, 녀석은 그러지 못했다.
그림자에서부터 생성된 아가리가 단숨에 놈을 먹어치웠으니까.
으적으적!
“크크크… 더… 더…!”
콰드드득, 콰드득!
먹이를 으물으물 씹을수록. 휼의 형체도 조금씩 변화를 일으켰다.
이제 숲의 제왕은 자신이었다.
그렇다면 거기에 걸맞은 모습을 갖춰야 하지 않겠는가.
다행히 검치호 마물의 육체적 능력이 아주 비상하니, 그것을 모방하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휼은 검치호와 비슷하되, 그보다 훨씬 근력이나 도약력이 뛰어난 짐승의 형체를 갖게 되었다.
“더 맛있는 거 없나?”
모든 변화를 마친 휼이 입맛을 다시면서 안광을 터뜨렸다.
번쩍!
근처에 있던 마물들이 위협을 느끼고 도망쳤다.
그를 둘러싼 공기는 그만큼 살의와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 * *
“인간이 있다고?”
한낱 하급 마물에서부터 숲의 지배자까지, 온갖 우여곡절을 겪었던 휼은 이제 따분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숲 밖에. 지금껏 본 적 없는 인간이라는 종족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거짓말은 아니겠지?”
“저, 저희가 감히 어, 어떻게 휴, 휼 님께 거, 거짓을 고, 고해 바칠 수 이, 있겠습니까, 요!”
“흐음.”
“그러니 부디 저희들에게는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쥐처럼 생긴 하급 마물들은 바닥에 넙죽 엎드린 채 휼의 용서와 구원을 갈망했다.
휼은 이제 단순한 짐승의 형체 수준을 넘어서서 숲의 그림자에도 동화되어 있는 상태.
마물의 탈을 벗어던지고 기현상(奇現象)이 되어버린 것이다.
당연히 이제는 그 지배력이 이전의 지배자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날 수밖에 없었고.
숲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은 모두 휼의 기척이 느껴진다 싶으면 머리를 조아려야만 했다.
그리고 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는 딱 한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바로 그의 무료함을 달래주는 것.
보통은 그저 그런 감상밖에 남지 않았는데, 아주 오랜만에 흥미가 돋는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휼은 슬쩍 고개를 돌려 숲 너머를 바라봤다.
최근 들어 숲 너머에 낯선 무언가가 어슬렁거린다는 것쯤은 조금씩 느끼고 있었다.
인간이란 족속들이 숲을 벌목하고 개간하는 습성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으니, 그 연장선이 아닐까 하고 짐작했었다.
하지만 아직 이렇다 할 큰 사건은 없어서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었는데.
아무래도 인간들에 대한 목격담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사실 휼에게 있어 숲 바깥은 세상 밖이나 마찬가지였다.
지배자가 되고 나서도 그 밖으로 나갈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으니까.
딱 이 정도의 크기가 그에게는 가장 알맞은 보금자리였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지금.
미지의 세계가 주는 두려움보다 이를 알고 싶다는 호기심이 부쩍 강해졌다.
“궁금하군.”
휼은 하급 마물들에게 이만 가보라는 시늉을 보이고 손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길 얼마나 있었을까.
사아악!
휼이 아주 작게 줄어들었다.
이제는 잘 기억나지도 않는 아귀 시절의 작은 몸집.
휼은 나무의 그림자에서 다음 그림자로 뛰어다니면서 숲 외곽 지역으로 이동했다.
“….”
그러다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
숲의 끝자락. 우물가에서 물을 긷던 한 여인을.
‘특이하게 생겼군.’
너무나 작고 가녀리다.
과연 저런 체구로 하급 마물 한 마리 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최약체였던 휼의 아귀 시절도 저것보단 훨씬 나았으리라.
이 숲에서 태어났으면 하루도 가지 못해 죽었을 것 같은데….
‘분명히 숲 바깥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저 인간들이라 하지 않았나? 대체 어떻게?’
휼은 그동안 막연하게나마 홀로 상상해왔던 추측들이 모조리 산산조각 나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숲 바깥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으니, 당연히 인간이란 족속들도 자신만큼이나 아주 강할 거란 굳은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저래서야 대체 어떻게 ‘최고’가 될 수 있었던 거지?
‘아니면 나와 비슷한 경우인가?’
혹시 한때 아귀였던 자신과 마찬가지로 저 여인도 그냥 인간들 사이에서는 하급에 불과한 것일까.
좀 더 살펴봐야겠다.
휼은 그런 생각에 그림자에서 모습의 일부를 꺼냈다.
스르륵!
“어머. 못 보던 애네?”
여인도 그제야 휼의 기척을 느꼈던 것인지 조금 놀란 눈으로 이쪽을 보았다.
그런데 오직 눈만 둥둥 떠 있는 해괴한 모습을 보고도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쪽 머리를 넘기면서 조심스레 이쪽으로 다가왔다.
“목마르니?”
그러면서 물이 담긴 바구니를 건넸다.
“….”
휼은 바구니를 보면서 아주 잠깐 동안 고민했다.
이 물을 마셔야 할까, 말까.
혹시 이 안에 독 같은 게 들어 있어서 자신을 죽이려는 것은 아닐까.
“더 주고 싶지만 가봐야 해서. 그 바구니는 쓰고 우물 옆에 놔두면 돼. 그럼 다음에 기회 되면 또 보자.”
말을 마친 그녀는 등을 돌리고 훌쩍 어딘가로 떠났다.
“….”
휼은 멀뚱히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그녀가 준 바구니로 시선을 내렸다.
자신의 얼굴이 찰랑대는 물에 비쳤다.
할짝!
휼은 바구니 속의 물을 모두 비우곤 다시 그림자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의 그림자는 숲으로 향하지 않았다.
여인이 떠난 방향이었다.
* * *
여인이 향한 곳은 숲 너머에 위치한 어느 마을이었다.
휼은 다른 이들에게 들키지 않게 거리를 두고 그녀를 따르는 중이었다.
‘여기가 인간들이 사는 곳인가 보군.’
혹시 인간들이 가진 강함의 비밀을 엿볼 수 있을까 싶어서 따라온 것인데, 여전히 이렇다 할 특이한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아니, 한적하고 평화롭다고 해야 할까?
이래서야 여기 있는 인간들을 모두 숲에다 가져다 놓는다고 한들, 어떻게 크게 손을 쓸 것도 없을 것 같았다.
‘이상해. 너무 이상해.’
휼은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어떻게든 잠재우고자 노력했다.
며칠만.
딱 며칠만 더 살펴보자. 그렇게 다짐을 하면서.
그러던 중. 마을로 향하는 길목에 한 사내가 병사 몇몇과 함께 여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누구지?’
휼은 여인이 사내의 얼굴을 확인하고 흠칫하고 떠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아무래도 계급이 높은 상대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림자 속에서 좀 더 감각에 집중을 기울였다.
“도, 도련님을 뵙습니다.”
여인은 황급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녀는 한낱 시비에 불과하지만, 상대는 무려 이 마을을 다스리는 영주의 아들이었으니까.
영주 아들, 페르겐이 미소를 지으면서 다가왔다.
“어디 다녀오는 길인가 봐?”
“예. 식수를 다 사용해서 물을 긷느라 잠시….”
“그런 건 다른 놈들한테 떠넘기고, 나랑 방에서 밥이나 먹자니까? 다들 뭐 하느냐. 어서 도와주지 않고.”
“괘, 괜찮습니다.”
영지병들이 장독을 들어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여인은 그들의 손길을 뿌리쳤다.
예상했다는 듯 페르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명령이다. 지금 하는 일을 모두 멈추고 내 방으로 오거라.”
“싫습니다.”
“….”
단호한 거절에 그는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정색하며 말했다.
“지금 내 명을 거절하는 것이냐? 시킬 일이 있으니 부르는 거 아니냐?”
“그럼 그 ‘일’이 무엇인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무, 뭐?”
오로지 여인과 하룻밤 보내려는 생각밖에 없던 페르겐은, 역으로 들어온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여인이 고개를 숙이면서 황급히 그의 곁을 지나쳤다.
“멈춰라!”
하지만 그녀는 듣는 체도 하지 않고 발길을 재촉했다.
“이익!”
페르겐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등을 보이고 있던 여인의 팔을 낚아챘다.
“시비면 시비답게 행동할 것이지! 네깟년이 감히!”
“꺄아악! 그만하십시오!”
여인이 어떻게든 빠져나오려고 저항했지만, 자신보다 몸집이 큰 페르겐을 떨쳐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병사들은 다른 사람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주변을 감시하기만 할 뿐, 말릴 생각은 추호도 없어 보였다.
쿵!
중심을 잃은 두 사람이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여인은 위에서 누르는 힘을 도저히 거부하기가 힘들었다.
그녀의 상의 중 일부가 찢겼다.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지만, 주위에 그녀를 도울 만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누가… 제발 도움을…!”
여인의 애타는 소리가 가느다랗게 흘러나오고.
“….”
휼은 그림자 속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