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51화
흉신(凶神)
저건 또 뭔 일이야?”
“저 눈들… 누가 봐도 원로원주인 것 같은데.”
눈앞에서 엘릭을 뺏기고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원로들과 빈객들.
갑자기 하늘에 떠오른 수백 개의 ‘눈’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따로 있었다.
오거스틴의 눈들 바로 반대편을 어둡게 채우고 있는 정체불명의 마기.
어느 순간 갑자기 하늘을 메우더니 뒤이어 오거스틴의 하얀 밤이 펼쳐진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이곳에 저만한 마기가 나타난 건 분명 심상치 않은 일인 건 맞으나,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오거스틴 네레스타였으니까.
한때 마탑주인 가이 네레스타를 ‘가르쳤던’ 존재인 만큼, 원로들은 그가 얼마나 괴물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거기다 어디 그뿐인가? 혁명군의 간부였던 길리티까지 그와 함께 있었다.
그 둘이라면 저만한 마기 정도는 충분히 막고도 남았다.
하지만 딱 한 마디.
“근데 저기 우리 엘릭도 같이 가지 않았는감?”
“…!”
“…!”
“…!”
누군가 무심코 뱉은 그 한 마디에 그곳에 있던 이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저 영감탱이 감히 우리 엘릭을 데리고 저런 일을 벌여?”
“스승으로서 제자가 위험에 빠졌는데 가만히 지켜볼 수 없군.”
그러곤 곧장 일이 벌어지고 있는 곳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콰아아아앙!
쿠르르, 쿠르르르-
우르릉, 콰콰쾅, 쿠쿠쿠쿠!
도착하니 더 가관이었다.
오거스틴의 상대는 거대한 몸집을 가진 악마, 아니, 마왕(魔王)이었으니까.
더군다나 아래에서 봤을 때부터 전투는 훨씬 격해져, 근처에만 있어도 자칫하면 휩쓸릴 것만 같았다.
“이봐 길리티!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이러다가 우리 엘릭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원로와 빈객들은 도착하자마자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는 길리티를 향해 각종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쉬잇!
길리티가 입가에 검지를 갖다 대며 그들을 조용히 시켰다.
마치 시끄러운 입 좀 닥치라는 듯이.
“…?”
“…?”
“…?”
원래대로라면 뭐 하는 짓이냐고 노발대발할 원로들이었지만.
엄숙하기 짝이 없는 길리티의 표정에 가만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오거스틴과 마왕의 전투를 가만히 지켜보는 다른 곳. 엘릭이 황홀경에 젖어 있었다.
깨달음을 얻고 있는 것이다.
* * *
엘릭은 자신도 모르게 전투에 한 발자국 다가갔다.
콰콰콰콰-
오거스틴과 휼이 충돌할 때마다 엄청난 기운이 터져 나오며 머리가 흩날렸다. 그러나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이 바라볼 뿐이었다.
‘이게 휼의 힘이란 말이지…!’
원래 흉신(凶神)이라는 진명을 가지고 있던 휼.
그것을 되찾은 만큼 보이는 위용도 아주 대단했다.
콰르르릉!
그가 움직일 때마다 검은 벼락이 연거푸 소낙비처럼 떨어졌다.
그러면서도 오거스틴이 쏟아내는 마법을 전혀 피하는 것 없이 그대로 맞으며 달려들고 있었다.
콰드드득!
몸이 부서지든 말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투.
깊은 상처가 남으면 오히려 그 부위에다 이빨을 가져다 대면서 강제로 물어뜯기까지 했다.
덕분에 상처는 그가 내뿜는 마기로 금세 회복되었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그런 휼을 보며 오거스틴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럴수록 휼을 둘러싼 광증과 흉성은 더욱더 커졌다.
파아아아-
마기가 뒤섞인 검은 그림자가 동심원을 그리며 사방으로 점차 번져 나갔다. 시야가 닿는 모든 세상이란 세상은 전부 어둠 속에 잠겼다.
하늘과 땅바닥에서 수십 개의 그림자들이 촉수처럼 솟아났다.
그러고는 먹이를 낚아채려는 상어처럼 모조리 촉수가 안쪽으로 채찍질했다.
차차차착!
착! 착!
오거스틴이 허공에서 빠르게 미끄러지며 그 가공할 만한 공세를 피해내는 동안.
엘릭은 휼의 인장이 마력을 미친 듯이 빨아들이면 빨아들일수록 피부가 쩌릿쩌릿해지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미친 수준이야, 아주.’
흉신의 인장에서부터 휼이 품고 있는 갖가지 사념이 전해지고 있었다.
적을 집어삼키고야 말겠다는, 끊임없는 집념. 아니, 악념(惡念).
그리고.
그로부터 발원되는 공포(恐怖).
마력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격렬한 파도처럼 체내를 누비고 다녔다.
하지만 엘릭은 마력을 억제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거세게 만들었다. 그러자 그 속에서 무언가 마나의 형질이 변하기 시작했다.
흉신이라는 개념에 동화된 마력.
바로, 마기(魔氣)였다!
화아아아악!
“크윽!”
머릿속이 타들어 갈 것 같았다.
원래 마기는 절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힘.
변이(變異)와 기괴(奇怪)가 일으키는 현상적인 힘이었다. 당연히 법칙을 추구하는 생명체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자연스레 터득하게 되었으니, 육체에 막대한 변화가 생길 수밖에.
콰드드득!
그럴수록 인장도 조금씩 모습을 바꿔나갔다.
2성, 3성….
점점 발전까지 하는 것이다.
무의식의 개변.
혹은 확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정신적인 깨달음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휼과 오거스틴의 격전은 더욱더 치열해지고 있었다.
콰아아아앙!
휼이 대지를 으스러져라 짓밟으면서 위로 튀어 올랐다. 드높은 상공에 떠 있는 오거스틴을 잡아먹기 위해서.
뒤따라 오거스틴을 잡지 못한 그림자 촉수들도 잇달아 위로 튀어 오르면서 사방을 옥죄었다.
도망칠 곳 하나 없는 포위된 형국.
그런데도 오거스틴은 여유를 잃지 않고 때마침 머리를 노리고 오던 그림자를 주먹으로 냅다 후려 갈겼다.
콰아아앙!
그림자가 폭발과 함께 완전히 박살났다.
그리고 그 속으로 침투된 폭발 마법이 빠르게 그림자들을 차례로 폭발시키기 시작했다.
파바바박!
화르르륵-
오거스틴은 때마침 발목을 잡았던 그림자를 움켜쥐며 그대로 위로 당겼다.
콰드드득. 우악스럽게 뜯어지는 소리와 함께 마지막 남아있던 그림자 촉수마저도 사라지고 말았고.
퍼어어엉!
오거스틴은 그것을 둥글게 뭉쳐서는 발로 뻥 하고 걷어차 휼의 턱을 맞추는 신기까지 선보였다.
쿵…!
휼은 어쩔 수 없이 바닥에 착지하고 나서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턱을 손으로 박박 문질렀다.
크르르르르!
이제는 말도 제대로 못할 정도로 이성이 마비된 두 눈은 여전히 오거스틴에 대한 분노만 활활 태우는 중이었다.
“흐, 흐하하하! 간만에 체조를 하니 아주 기분이 상쾌하구만?”
오거스틴은 말도 안 되는 유용을 보이고도 개운하다는 듯 웃음까지 터뜨렸다.
그럴수록 휼의 광기는 점점 더 끓어오를 뿐이었으니.
‘….’
엘릭은 이제 오거스틴의 모습에 완전히 몰입하여 주변 상황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있었다.
메피스토가 그의 어깨를 붙잡아 흔들어봐도 마찬가지.
그의 귓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있었다.
-.
아주 조용한 백색 소음 뿐.
지금 이 순간.
엘릭은 뇌리 속에 박힌 오거스틴의 동작 하나하나를 되짚어나가고 있었다.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던 오거스틴의 말은 전혀 틀린 것이 없었다.
공방일체.
아니, 물아일체.
세계의 섭리가 오거스틴의 손끝 하나하나, 발재간 하나하나에서 변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엘릭을 더욱더 놀라게 한 점은 따로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다른 것 같지만… 전혀 상반된 것 같지만… 똑같다.’
둘에게는 공통점이 존재했다.
영역.
바로 자신만의 ‘영역’이 따로 있었다.
휼은 흉신의 인장을 활용해, 그림자로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었다. 그 자신이 가장 크게 날뛸 수 있고 마음껏 활개를 칠 수 있는 영역을.
그 안에서 그림자는 오로지 휼의 의지만을 따르고, 휼의 생각으로만 움직였다.
오거스틴도 되도록 그림자에 가깝게 다가가지 않으려 했다.
거기에 휘말렸다간 휼의 아가리 속에 떨어지게 될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오거스틴의 경우에는 백야였다.
수십 년을 살며 얻은 수많은 마법들의 총체적 결과이며, 이 또한 하나의 ‘영역’이었다.
수많은 마법들이 별다른 방해 없이 효율적으로 맞물려 돌아가던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결국 휼과 오거스틴의 싸움은 줄다리기나 마찬가지였다.
누가 더 상대를 자신의 영역으로 깊이 끌어들이냐는 싸움.
그림자에 노출된 오거스틴은 그 속으로 잠식될 수 있다.
백야에 끌려들어 간 휼은 몸이 조각날 수 있다.
그 한가운데에 빠지게 되면 완전히 무장이 발가벗겨지는 것과 똑같은 신세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순간.
엘릭은 하나의 사실을 깨우칠 수 있었다.
‘나도 나만의 ‘영역’이 필요해.’
떠올려보면 그동안 그가 봤던 다른 마왕들이나 사계들도 비슷했다.
메피스토는 압도적인 폭력으로 시야에 닿는 모든 걸 부쉈다.
아자젤은 광기를 전염시켜 자신만의 성을 구축했다.
릴리스는 유혹과 최면으로 정신 침투를 가해 꿈속 세계에 자신의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오토 한은 겨울처럼 고고하고 차디 찬 가문을 만들어 어느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천 년의 역사를 만들어냈고.
아르세우스는 봄처럼 따스함으로 세상을 어루만져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그렇다면.
엘릭도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고, 이에 따른 자신만의 길을 걸을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엘릭이 현재 눈앞에 있는 벽을 넘어설 수 있는 길이었다.
‘사계… 마왕… 그들에게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였다.
촤르르르륵-
백야의 눈에서 튀어나온 수많은 마력 사슬이 휼을 꽁꽁 묶었다.
크아아아!
휼은 이전처럼 마법을 물어뜯으려 했지만, 이번에 시전된 마법은 그 격이 달랐다.
콰드드득!
콰드득!
발버둥치면 칠수록 더욱더 팽팽해졌다.
문제는 이성이 마비된 휼은 더욱더 광란의 몸부림을 쳐댔다는 것이지만.
그때마다 터져 나온 마기에 검은 벼락이 진동을 해댔다.
“이제 끝내자꾸나.”
오거스틴은 그런 휼을 향해 미소 지으면서 휼의 정수리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러곤.
콰아아아앙!
붕대가 감긴 손으로 휼의 머리를 강하게 내려찍었다.
…!
주위에 있던 원로들이 중심을 잃을 정도로 엄청난 충격파.
동시에 휼의 머리가 완전히 부서져 내렸다. 그림자가 마구 흩날리며 폭주를 일으켰다.
엘릭에게 박힌 인장 또한 무사하진 못했다. 휼이 받은 충격만큼 인장도 금세 부서질 것처럼 꿈틀거렸다.
“크흑!”
엘릭이 제 팔을 부여잡으며 짧게 신음을 뱉었다.
그는 폭주하는 마기를 강제로 억눌렀다. 그리고 주변을 날아다니는 그림자를 최대한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파아아아!
어둠이 소용돌이를 치면서 이쪽으로 몰려들었다.
엘릭은 당장이라도 몸이 으스러질 듯한 압박감을 이겨내면서 정신을 집중했다.
“…뭐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언가가 흐릿하게 눈앞에 나타났다.
“이건?”
환각인 걸까?
그런 생각에 미간을 찌푸리다가, 곧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부서지려는 인장 속에서부터. 휼의 기억들이 봇물처럼 새어 나오면서 엘릭에게 전해졌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