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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 삼킨 마법사-308화 (307/405)

2부 48화

실험

크롬헬은 짜증이 치밀 것만 같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생체 실험과 관련된 서류라니.

생체 실험은 도의적으로 큰 문제가 될 수 있었기에, 자칫하면 황실이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는 사안이었다.

“뺏겨도 하필….”

크롬헬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려는 그때였다.

“화를 우선 가라앉히세요, 내 사랑.”

문이 열리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롬헬을 비롯한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입구엔 화려한 갑옷을 입고 있는 한 여인이 서 있었다.

황금사자의 딸이자 크롬헬의 부인인.

금사자, 시로였다.

* * *

누군가는 물을지도 모른다.

황금사자의 여식이라고 한들, 차기 사자공가를 이끌 후계자라고 한들 아직 공식 석상에서 실력을 보이지도 않은 그녀가 얼마나 강하겠냐고.

실제로 황금사자가 자신의 딸을 끔찍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은 그의 주변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했다.

그러니 딸바보인 아버지가 모두 그러하듯, 사자공가의 영애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자랐을 거라는 편견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4황자께서 황자비가 되실 분이 자신에 견주어도 절대 뒤지지 않을 거라고 호언장담 하시더니…!’

‘실로 대단하다.’

‘호부 밑에 견자가 없다는 말이 사실이로구나.’

‘젊은 나이에 저 정도일진대 나이를 먹고 난다면 어떻게 될지….’

‘남편은 흑사자에 아비는 황금사자라.’

‘사자공가의 지배는 다음 세대에도 이어지겠어!’

새끼 황금사자이기에 금사자(金獅子).

시로는 아버지와 같은 금발이었으나 청안으로, 눈동자 색이 달랐다.

하지만 황금사자와는 다른 의미로 압박적이었다.

감찰국장들은 모두 바짝 긴장한 채 마른 침을 삼켜야만 했다.

황금사자가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 누른다면, 시로는 그 반대였다.

아주 부드러우면서도 목을 조금씩 옥죄어오는 것만 같은 압박감!

흡사 날렵한 체구를 가진 맹수를 마주하는 것만 같았다.

‘최소 5체인 이상의 실력자.’

국장들은 서로 눈빛을 빠르게 주고 받았다.

시로가 공식 석상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장소는 바로 청문회장.

그곳에서 찍힌 시로의 사진은 청순한 모습이었지만, 무장을 한 지금은 사나운 전사가 따로 없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크롬헬이 밝게 미소 지었다.

그전까지 있던 분노는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부인. 어찌 여기까지 오셨소?”

“부인이 된 자로서, 남편이 곤란에 처했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있나요.”

그렇게 말하며 시로는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 시로의 뒤를 여전사 무리가 따랐다. 그녀들 또한 시로와 사뭇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시로의 직속 부대, 금사자군의 정예들이었다.

“엘릭 메르빙거. 그자 때문에 그러시는 거죠?”

“…그렇소만.”

“당신과 아버지를 골치 아프게 한 그를 제가 제지할게요. 지금은 여러 일로 바쁘시잖아요.”

가볍게 웃으며 나긋나긋하게 말하는 시로.

그러나 ‘제지’한다는 그녀의 말과는 달리 눈에는 노골적인 살의가 담겨 있었다.

이를 읽은 크롬헬이 순간 당혹감을 드러냈다.

엘릭 때문에 상황이 복잡해지긴 했으나 그는 자신이 진심으로 생각하는 친구였으니까.

정쟁(政爭)이라 한들, 모두 다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잖은가.

때문에, 단 한 번도 그를 죽이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싱긋!

크롬헬의 생각을 읽은 시로가 미소 지었다.

그녀는 그의 손을 양손으로 포개곤 두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말했다.

“걱정하는 그런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니 믿고 맡겨 주세요.”

“그렇다면야….”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이상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크롬헬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얘기를 마친 시로는 정예들을 데리고 별궁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어느 정도 멀어졌을 때.

그녀는 곁에 있던 측근에게 말했다.

“부대에 도착하면 모두에게 전해라. 앞으로 우리들의 목표는 엘릭 메르빙거라고.”

“명 받들겠습니다. 그럼 그자의 처분은 말씀대로 생포만….”

“아니.”

시로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

“이번뿐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곧 황제가 되실 황자님의 발목을 잡을 사람이다. 그러니….”

시로의 눈이 차갑게 번뜩였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

* * *

‘아씨, 이 사람들 말고도 누가 또 내 얘길 하나.’

네레스타 가문의 원로원. 안개의 언덕.

엘릭은 미간을 찌푸리며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짚이는 데가 너무 많아서 한 곳만 찍을 수 없겠군.』

메피스토의 이죽거림이 들렸지만 그냥 무시했다.

그의 앞에서 서로를 밀쳐내며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피로할 지경이었으니까.

“이거 봐봐라! 네가 그때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거 같아 우리 학파 마법을 새로이 연구했는데 말이다!”

“그딴 거에 얘가 관심이나 갖겠냐? 자, 이걸로 말할 것 같으면…!”

“비켜봐, 이것들아. 이건 우리 학파의 비전이 담긴 마법서다. 표정을 보니 별로인 거 같군. 그럼 이건 어떠냐?”

네레스타 가문의 원로들과 빈객청의 은거기인(隱居奇人)들이었다.

오래전, 엘릭의 재능을 알아보고 너나 할 거 없이 그에게 자신의 마법을 가르쳐주려 했던 사람들.

그러나 워낙 오래간만에 돌아오게 됐고, 목 빠지게 기다리던 이들은 이때다 싶어 달려들던 것이었다.

이대로 있다간 저 영감들에게 둘러싸여 정신을 못 차리겠다 싶어 슬금슬금 거리를 벌리려 했지만.

“너희들은 이렇게 잘난 제자 없지? 나는 있지롱. 낄낄낄!”

오거스틴이 껄껄 웃으면서 기름통을 확 부어버린 통에 불이 더 활활 타오르는 중이었다.

‘아아, 스승님…. 왜 이런 지옥에다 저를 던져두시고선.’

엘릭은 그런 오거스틴이 원망스러웠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판은 벌어지고 말았는데.

“야야! 케르누, 지금은 네 녀석 차례 아니잖아! 근데 왜 쓸모도 없는 너네 비전을 들고 오는데?”

“순번? 알 게 뭐야! 지금 엘릭이 돌아온 게 얼마 만인지 알아? 이번에 나가면 또 언제 올 줄 모른다고!”

“엘릭. 지금껏 널 생각하며 완성한 내 연구다. 원하면 그냥 가져. 네 거라 해도 된다.”

“이 미친 영감탱이가! 지금 어디서 소매 넣기를 하고 지랄이야! 당장 손 안 빼!”

이대로 나왔다간 드잡이질이라도 벌어질 것 같은 상황.

오거스틴이 귀찮다는 듯 훠이훠이 손사래를 쳐댔다.

“이것들이 다들 미치기라도 했나. 시끄러우니 썩 안 꺼져! 안 그래도 힘든 애를 두고 다들 뭣들 하는 거야?”

그러나 기인들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꺼질 거면 너나 꺼져!”

“이번에도 또, 또 지 혼자 독점하려는 거 봐.”

“이래 놓고 또 매일 같이 찾아와서 제자 자랑하려고? 내 그 꼴 두 번 다시는 못 보지.”

엘릭! 엘릭! 엘릭!

사방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외치는 탓에 골이 아파 올 지경이었다.

엘릭이 한숨을 내쉬자, 바로 옆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메피스토가 부처처럼 아주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뭡니까, 그 웃음은?]

『사제 관계가 아주 보기 좋아서 말이다.』

[뭐가 보기 좋다는 겁니까? 힘들어 죽겠는데.]

『못된 제자 놈이 고통을 받는 모습이 보기 좋다는 거지.』

[…화병 나 죽겠으니까 좀 닥쳐주실래요?]

그런 와중에도 원로들은 싸움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냥… 지금이라도 도망칠까?’

오죽하면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그런다고 저들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니지. 도리어 붙잡혀 돌아와서는 아예 묶여버릴지도….’

겉으로는 저렇게 다들 꼬장이나 피워대는 뒷방 노인네들처럼 보여도.

다들 젊은 시절에는 하나 같이 대륙을 들썩이게 만들었던 자들.

하물며 연구에만 더 집중할 수 있게 된 지금은 더욱더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한둘이면 몰라도, 이 많은 인원들이 작정하고 엘릭을 잡으려 한다면?

아무리 엘릭이라 해도 쉽지 않을 거 같았다.

그렇다고 계속 여기 있자니 그것도 고문이었고.

튈까, 말까?

엘릭이 고민하는 그때였다.

펄럭!

웬만한 장정의 상체보다도 훨씬 큰 크기를 자랑하는 대머리독수리 다섯 마리가 빠르게 활강해서는 엘릭의 어깨를 덥썩 발톱으로 쥐었다.

푸드드득!

그러면서 힘차게 날아오르는 날갯짓.

“어, 어어?”

“저, 저, 저…!”

“길리티, 이 새끼가!”

“얌마! 스틸이 어딨어!”

원로와 빈객들은 곧바로 누구의 짓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곳에서 짐승을 저렇게 다룰 수 있는 이는 단 한 명밖에 없었으니까.

“잡아!”

“저것들, 격추시켜!”

눈 뜨고 코 베이게 생긴 은거기인들은 곧바로 영창과 함께 마법을 쏴대기 시작했다.

콰르르릉!

콰콰콰-

우르르르!

하지만.

“헹! 어딜!”

이들의 마법이 독수리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오거스틴이 단숨에 하늘 위로 뛰어오르면서 광역 디스펠 마법을 발동했던 것이다.

덕분에 마법들은 허공에서 하얀 연기만 남기고 힘없이 사라지고 말았고.

“아아아악!”

“오거스틴, 이 개새끼야!”

“당장 거기서 안 나와!”

“낄낄낄낄. 싫은데, 싫은데?”

오거스틴은 메롱, 혀까지 내밀면서 기인들을 한껏 약 올렸다.

“또 저것들만 재미 보려고!”

“좀 나눠 쓰자고, 이것들아!”

“오거스틴! 오거스티이이이인!”

아래에서 빽빽거리는 자들을 내려다보면서.

오거스틴은 더 이상 상대하기 귀찮다는 듯 마법을 다시 한 번 더 발동했다.

‘…신체 강화에 활력 증강용 버프 마법을 이런 데다 쓴다고?’

엘릭으로서는 8써클 마법사들도 함부로 다루기 어렵다는 고위 마법을 아무렇지 않게 발동하는 오거스틴의 실력에 헛웃음을 흘려야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독수리들의 비행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다음 기회를 노려보라고.”

“가, 가지마!”

“돌아와!”

원로들이 애처롭게 울부짖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저만치 멀어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누가 애고 누가 어른인지 도저히 모르겠단 말이지….’

괜히 저쪽에 휩쓸리기 싫다. 엘릭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면서 슬그머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마치 자신과는 전혀 무관한 일인 것처럼.

* * *

독수리들이 엘릭을 내려준 곳은 어느 절벽 위였다.

그곳엔 길리티가 기다리고 있었다.

“으하하! 어서 오거라, 제자야!”

집채보다 큰 백호 위에 올라타 있던 그는 단숨에 폴짝 내려와서는 엘릭을 와락 끌어안았다.

‘끄어어… 힘들어.’

대체 그동안 뭘 하고 다닌 건지, 길리티의 악력이 거세서 몸이 짜부라질 것 같았다.

다행히 뒤늦게 도착한 오거스틴 덕분에 암살 위협(?)에서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오, 형님 오시었소?”

“최고였다.”

오거스틴은 의형제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흐흐흐! 어땠수? 이 의제의 실력이 대단하지 않았습니까?”

“최고였다.”

“으하하하하!”

“이히히히히!”

엘릭은 서로 마주 보면서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는 두 스승들을 보면서 처음으로 이 자리에서 탈출하고픈 욕망이 강하게 들었다.

재능 삼킨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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