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47화
실험
이튿날 아침.
엘릭은 시종의 안내를 받아 어딘가로 향했다.
집안 깊은 곳에 위치한 방이었다.
엘릭이 들어서자, 시종은 짧은 인사와 함께 문을 닫고 조용히 사라졌다.
내부에는 대륙의 지도가 벽면 곳곳에 그려져 있었다.
가이는 바로 그 중심 놓인 둥근 탁상 앞에 앉아 있었다.
“왔나.”
“여긴….”
“봐서 알겠지만, 밀담을 나누기 아주 좋은 곳이지. 중요한 일이나 비밀리에 할 얘기가 있다면 이곳에 와서 나누곤 하지.”
확실히 지금껏 본 네레스타 가문의 집 어느 곳보다 엄중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이쪽에 앉지.”
탁상 앞에 앉자, 그곳에 올려져 있던 신문들이 눈에 들어왔다.
엘릭은 헛웃음을 흘렸다.
신문의 헤드라인이 하나 같이 밤새 있었던 후궁 별궁에서 있었던 전투를 다루고 있던 탓이었다.
‘역시 감찰본국 쪽에 있었던 일은 전혀 모르고 있나 보네.’
그 어떤 신문에서도 자신과 마탑이 벌인 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던 것이다.
엘릭은 아무 생각 없이 신문 하나를 집었다.
<황궁에서 본체를 드러난 대악마 ‘릴리스’! 이대로 괜찮은가?>
전일, 후궁 별궁에서 대마왕 릴리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릴리스는 천 년 전에 대륙을 지배했다 알려진 역사 속의 대악마로…(중략)….
…끈질긴 근위대의 추적 끝에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이 전투로 인해 장미궁이 무너지고, 추가 지원을 왔던 사자공가의 사자와 감찰국장 몇몇이 크게 다쳐 후방 병원으로 급히 이송되었다.
비록 ‘릴리스’는 그 자리에서 놓치고 말았으나, 릴림은 대부분 토벌됐으며, 황실은 ‘국민들의 안전을 위해 반드시 도망친 릴리스를 잡을 것’이라며 입장을 밝혔다.
『개판이로군.』
메피스토는 엘릭과 같이 신문을 읽다 말고 팔짱을 낀 채로 콧방귀를 세게 꼈다.
[아무래도 아직 메피한테 입은 상처가 덜 회복 됐나 본데요?]
『흥! 당연한 소리를.』
[당분간 고생 좀 하겠죠?]
『하다마다.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 셈이니, 도망쳐도 도망친 게 아닌 기분일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더 확실하게 쫓아서 잡아야 하는데….]
『릴리스는 원래 옛날부터 맘만 먹으면 몸을 숨기는 데는 아무도 따라갈 길이 없었다. 아마 당분간은 포기하고 있는 게 좋을 거야.』
그렇게 말하는 메피스토도 적잖게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릴리스만 제대로 소화할 수 있어도 전성기 시절의 힘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이 지긋지긋한 부유령 상태에서 탈출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엘릭은 아쉬우면서도, 이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릴림이 더 깊은 곳으로 숨을수록 제국에 끼치는 영향력도 줄어드는 데다가, 흉의 일족을 여태 괴롭히고 있던 기묘도 그만큼 쉽게 없앨 수 있었으니까.
“먼저 들게. 얘기는 그다음에 하도록 하지.”
가이가 차를 내어주며 말을 걸어온 건 그때였다.
“감사합니다.”
엘릭은 찻잔을 집어 가볍게 향을 맡았다.
향긋한 페퍼민트 향.
조금 전까지 몸에 남아있던 전투의 여운이 확 풀리는 기분이었다.
한 모금 마시자, 차의 따뜻한 온기가 정신이 맑아졌다.
아무래도 마법적 효과가 가미된 페퍼민트인 모양이었다.
엘릭의 만족스러운 표정에 가이도 따라서 차를 마시며 미소를 머금었다.
탁!
찻잔을 내려놓은 가이의 입이 열렸다.
“자네도 봐서 알겠지만, 밤새 아주 재미난 것들을 많이 찾을 수 있었다네.”
가이는 탁상 아래에 있던 서류를 위로 올렸다.
감찰국 요원들로부터 가져온 것들이었다.
“그중 하나가 이거지.”
그는 서류 하나를 꺼내 엘릭의 앞에 내밀었다.
표지에 적힌 문구가 엘릭의 눈에 밟혔다.
<마족 연구 계획: 수인족의 옛 호왕에 대한 마법적 단서에 의거한 강체술 연구>
이를 본 엘릭의 미간이 좁혀졌다.
『왜 그러느냐?』
[이거… 제 논문이에요.]
호왕의 단서를 활용한 강체술 연구.
한때, 제국에서는 금서로 분류될 만큼 위험천만한 연구 주제이기도 했다.
그만큼 당시 엘릭이 한창 절맥증으로 고생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메르빙거 어쩌고 하더니 일개 학부생의 논문까지 끌어다 쓴 거로군?』
엘릭은 빠르게 서류를 넘기면서 내용을 살폈다.
아무래도 감찰국에서는 엘릭의 논문을 중심으로, 마족의 힘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해 여러 연구를한 것 같았다.
“보다시피 놈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물을 얻기 위해서 음지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닥치는 대로 했나 보더군.”
가이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하나 같이 미친 짓거리들 투성이었지.”
실험은 대부분 감옥에서 데려온 범죄자들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것들이었다.
“기묘를 활용한 인장 이식, 풍문으로만 떠돌던 반인반마(半人半魔)를 만들기 위한 인체 접목 실험, 마족 동화, 혹은 마족의 인간화… 심지어 마족 남성의 씨앗을 수정시켜 여성 실험체 자궁에다 착상시킨 적도 있더군?”
연구 보고서와 함께 사진도 있었다.
하나 같이 적나라했고, 성공 요인과 실패 분석 등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었다.
인상이 찌푸려지다 못해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였다.
『본왕이 말했었지. 우리 마족들보다도 한없이 악독한 것이야말로 바로 너희 인간들이라고. 이 정도는 릴리스도 하지 않는데 말이야.』
오죽하면 메피스토도 이런 말을 할까.
“이래저래 미친 짓거리들 투성이. 하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최고는 따로 있지.”
팔락, 팔락-
엘릭은 계속해서 서류를 넘겼다.
그럴수록 그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그러다 한 부분에서 그의 손이 멈췄다.
딸칵!
이를 눈치 챈 가이가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나와 똑같은 데서 멈췄군?”
“이건 미친 짓입니다!”
손을 부들부들 떨던 엘릭이 서류를 탁상에 던지다시피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펼쳐진 부분은 이렇게 적혀 있었다.
<강체술로 단련된 수인족의 육체와 전투에 특화된 마족의 인장을 이식한 실험체가 만들어질 경우….>
<통제를 위해 기묘를 활용하여….>
<실험체의 안전 유무를 위해 특정 지역에서만 사용할….>
호문클루스.
연금술 지식을 극도로 활용해야만 탄생시킬 수 있다는 인조 생명체.
한 마디로, 감찰국은 생체 병기를 만들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누구의 대가리에서 나온 것인지는 몰라도, 참으로 기발한 착상이로군. 수인족과 마족을 하나로 융합한다? 하!』
푸하하하!
메피스토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진심에서 나온 웃음이 아니었다.
그 속에 깔린 짙은 경멸은 절대 모를 수가 없었다.
『너희 인간들은 참으로 같은 생명을 절대 생명으로 보지 않는구나! 조물주에게서 물려받은 최소한의 명예나 긍지도 없는 것이냐!』
하지만 이보다 충격적인 내용은 정작 따로 있었다.
“…이 실험, 이미 어느 정도 진행된 것으로 보입니다만.”
가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으로 보이네.”
“어디까지 진행되었을까요?”
비록 서류는 실험이 어느 정도 진행되었다는 내용만 적혀 있을 뿐, 최근의 진행 사항에 대해서는 따로 수록되어 있지 않았다.
아무래도 실험이 어느 정도 무르익게 되자, 보다 전문적인 곳으로 이관된 것 같았다.
어쩌면 황실로. 0국으로 흘러들어 갔을지도 몰랐다.
“확실치는 않지만, 나나 참모진들의 추측으로는 실험은 거의 끝이나 증명 단계만 남은 것으로 보이네.”
“…그 말씀은.”
가이의 얼굴에 살짝 그늘이 졌다.
“양산화만 남아있다는 뜻이지. 어쩌면 이미 진행 중일 수도 있고.”
“…!”
엘릭의 얼굴도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해졌다.
가이의 말은 곧, 감찰국이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호문클루스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다는 얘기였으니까.
“그리고 그랬다간 여태 팽팽한 대치를 이루고 있던 세력의 균형이 완전히 감찰국으로, 그리고 황실로 넘어가게 되겠지.”
“….”
지금도 선이란 선을 모두 넘는 감찰국과 황실이건만.
여기에 절대황권까지 쥐게 된다면 대체 어떻게 될까?
가이는 생각하기도 싫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엘릭은 그와는 다른 방향으로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이대로는 수인족들이 위험해진다.’
호문클루스를 만들기 위해 놈들이 얼마나 많은 수인족들을 희생시킬지 감도 잡히지 않던 것이다.
‘그렇게 둘 순 없어.’
어리지만 좋은 왕이 되기 위해 노력하던 호왕, 벨레체.
그리고 그런 벨레체를 보좌하는 충신 노루스와 그의 딸 이리나까지.
이 외에도 그곳에 있던 다른 이들이 엘릭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무 대가 없이 ‘친구’라며 수인족을 지켜줬던 자신의 조부 우스던 메르빙거와 같이.
엘릭 또한 그들을 도와 전쟁을 끝내고 안트로모프에 웃음을 가져다줬었다.
그런데 감찰국의 행보는 이를 완전히 앗아가겠다는 거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그들을 자아가 제대로 있을지도 모를 생체 병기가 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아직 본격적으로 수인족 사냥에 나선 것으로 보이지는 않아.’
물론, 그렇다고 해서 쉽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수인족의 나라가 안트로모프만 있는 건 아닐 테니.
“이것들 어디서 실험을 진행 중인지 알 것 같습니까?”
“미안하지만 아직 확실치는 않아.”
가이는 안타까운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게.”
“…?”
“마탑의 전력을 총동원해서 놈들을 찾고 있으니, 곧 머지않은 시일 내에 찾을 수 있을 테니.”
“…알겠습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으나, 재촉한다고 될 일도 아니다. 아직 만 하루도 채 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이도 아니고, 가이가 직접 지시해 찾고 있으니, 그의 말대로 시간이 해결해 줄 터였다.
엘릭의 시선이 다시 서류로 향했다.
그의 눈이 겨울보다 더 차갑게 가라앉았다.
* * *
크롬헬의 별궁, 흑사궁(黑獅宮).
“…이, 이상입니다.”
“….”
크롬헬은 아무 감정 없는 눈으로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요원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스걱!
보고가 끝나자마자 거침없이 검으로 요원의 목을 베었다.
데구르르-
자신이 왜 죽었는지도 모르는 얼굴.
크롬헬은 불결하기 짝이 없는 시체에서 시선을 거두며 머리를 위로 쓸어올렸다.
“다들 다시 말해보도록.”
방 전체를 아우르는 살기. 목소리만 두고 보면 크게 티가 나지 않았지만, 그 아래에 깔린 짜증을 모를 수가 없었다.
“뭣들 하나? 다들 제대로 말하지 않고.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아서 말이야. 어서들. 자세히 설명하라.”
크롬헬이 다시금 재촉했다.
그러나 그의 앞에 모여있는 감찰국장들은,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면, 내가 들은 것들이 사실이라는 건가?”
날카로운 시선을 느낀 그들은 몸을 흠칫하고 떨었다.
“릴리스를 놓친 것도 모자라, 감찰국의 비밀 사안을 빼돌리다가 전부 뺏기기까지 했다고? 그것도 다름 아닌 마탑과 메르빙거에게?”
촤악!
말을 마치기 무섭게 크롬헬이 다시 검을 휘둘렀다. 이번엔 가장 가까이 있던 13국장이었다.
컥, 컥…!
시체가 쓰러지며 다른 국장들의 얼굴에 피가 튀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인상을 쓰거나 얼굴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랬다간 다음은 자신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물론, 그들의 실력이라면 칼 하나쯤은 쉽게 피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랬다간 삼족이 무사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만큼 크롬헬의 분노는 어마무시했다.
‘차라리…!’
‘멍청한 폐태자가 나았을지도…!’
그 때문에 국장들은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들이 꼭두각시로 앉히려 했던 4황자는 사실 그들이 어떻게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난폭한 그릇을 지녔을지도 모른다고.
“다들 벙어리밖에 없나 보군.”
챙그랑!
크롬헬은 욕지기를 내뱉으면서 피 묻은 검을 바닥에 던지곤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미간에 자리 잡은 주름이 좀처럼 펴질 줄 몰랐다.
‘이대로 있다간 황태자가 되기도 전에 약점만 잡히게 생겼어.’
그는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생각했다.
휴일란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유력한 황태자 후보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날 이후로 상황은 날이 갈수록 좋아지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하루가 멀다 하고 일이 터지는지.
자칫하다간 황제위는 커녕 황태자 자리도 실각하게 생겼다.
하지만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
일단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처리해야 할 것 같았다.
먼저 마탑이 가져간 기밀 자료부터.
놈들이 무엇을 가져갔는지 알아야 그에 맞춰 대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무엇을 들켰지?”
크롬헬의 질문에 모두가 어물쩍거리며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내 6국장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일단 파악된 건 생체 실험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생체 실험?”
크롬헬이 눈이 가늘게 좁아졌다.
자세히 설명해보라는 투였다.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