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43화
감찰국
엘릭의 말대로 장미궁 쪽은 미끼였다.
마족을 소탕하겠다는 적당한 명분만 던져 놓은 미끼.
세간의 모든 시선이 그쪽으로 향한 사이, 황실 직속 기관인 감찰국을 살리려 이런 일을 벌인 것이다.
‘그나저나… 확실히 대단하군.’
가이는 앞으로 벌일 일에 대해 엘릭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수정구에 비치는 광경을 보면서 속으로 적잖게 감탄을 하고 있었다.
‘길리티의 마법을 이리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인데… 정치적 감각마저 뛰어나. 세상사를 보는 안목도 뛰어나고. 이런 건 단순히 재능만 갖고 있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영역이 절대 아니다.’
가이는 엘릭과 함께 하면 할수록 그를 점점 인정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아들의 친한 친구로만 여겼던 것을. 이제는 신뢰할 수 있는 정치적 파트너로 인정하는 것이다.
재능이면 재능. 머리면 머리. 가문이면 가문. 안목이면 안목.
심지어 저 정도면 얼굴도 깨나 잘생긴 편이다.
나이까지 젊으니 앞으로 미래는 더욱 창창하겠지.
어딜 내놓아도 일등 신랑감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타샤와 엮어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러니 가이는 네레스타의 미래를 위해서 엘릭과 더 직접적으로 인연을 맺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것까지 바라는 건 무리겠지.’
엘릭에게 이미 짝이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거기에다 새치기를 하려 들었다간 괜히 청사자의 눈 밖에 나기 십상이었다.
물론, 가문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딸아이가 싫다는 결혼을 무작정 맺어줄 생각도 없긴 했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것이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션이 평소 엘릭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 귀담아둘 것을. 아쉽군, 아쉬워.’
가이는 그런 속내를 삼키면서 덤덤한 표정으로 물었다.
“결국 이 현장을 털자는 것이로군.”
“그것도 나쁘지 않죠.”
아직 본부에 남아있는 자료는 수두룩했다.
“하지만….”
말끝을 흐린 엘릭이 수정구 한편을 가리켰다.
몇몇 요원들이 감찰국장들에게 서류를 확인받곤, 어딘가로 몰래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굳이 떠들썩하게 움직이는 것보다 중요한 것만 손쉽게 쏙 빼가는 게 저쪽도 더 얄밉지 않을까요?”
피식!
가이도 엘릭을 따라 웃고 말았다.
“야밤에 도망치는 쥐새끼를 잡으려면 꽤 고생하겠군.”
“그렇죠?”
수정구 너머. 2국장과 5국장 마저 움직이는 것이 보일 때쯤. 엘릭과 가이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발하지.”
“예!”
가이의 말에 율법사들이 일제히 은신 마법을 발동하며 모습을 감췄다.
츠츠츠-
거기다 움직임을 가볍게 만들어주는 경화 마법까지.
준비를 마친 이들은 곧장 몰래 움직인 감찰국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우리도 가자.”
그리고 그 바로 뒤를 엘릭과 일행이 뒤따랐다.
* * *
가이를 따라 이동하는 도중이었다.
안드레 윈즈가 엘릭을 보며 입을 뗐다.
“오랜만에 검을 잡을 기회가 많아지니 좋군요.”
격전이 벌어질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에는 화색이 많이 돌고 있었다.
마치 원래 있어야 할 곳에 돌아온 사람처럼.
‘하긴. 싸우고 난 뒤에는 줄곧 동부에서만 지냈으니까.’
안드레는 원래 전쟁터를 누비던 장수였다. 그랬던 그가 하루아침에 새장 속 새 신세가 되었으니 오죽 답답했을까.
그래서인지 그는 블랙과의 전투에서 느낀 흥분이 여전히 가시지 않은 것 같았다.
가는 내내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는 걸 보면.
‘내가 마법을 처음 쓸 수 있게 될 때도 그랬지.’
그리고 엘릭은 그런 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도 절맥증으로 인해 그런 때가 있던 탓이었다.
물론 누구 덕분에 마법을 쓸 수 있게 됐지만.
『이번엔 또 무슨 괴상한 생각을 하는 것이냐.』
엘릭의 표정을 본 메피스토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가만히 보고 있자니 괜히 기분이 나쁜 것이었다.
[귀신같네요, 정말. 아 이미 귀신인가?]
『뭐? 지금 멀쩡히 살아있는 본왕에게 감히…!』
“음?”
그 순간, 엘릭의 눈에 타샤가 들어왔다.
어째서인지 그녀의 표정이 썩 좋지 못했다.
엘릭은 어쩐지 타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땅굴을 파고 있을 것 같은데.’
엘릭은 조심스레 그녀의 옆으로 따라붙기 시작했다.
‘내가 따라가도… 괜찮은 걸까.’
타샤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 또한 율법사 중 한 명이었기에 참여하긴 했다지만.
이번에도 발목을 잡지 않을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탓이다.
‘지금이라도 못하겠다고 말해야 하나….’
이번 작전에 참여하기 전부터 지금까지. 타샤의 머릿속엔 이전의 전투들이 쉴 새 없이 떠올랐다.
휴일란에서 있었던 제프와의 전투.
그리고 가문으로 돌아오며 마주친 마족, 카니예와의 전투.
연속된 패배에, 타샤의 자신감은 극도로 떨어진 상태였다.
‘아냐. 말하기엔 너무 늦었어. 말한다고 하더라도 부대 사기만 떨어뜨릴 테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어떻게든! 하, 하지만 이번에도 민폐만 끼친다면 어떡하지…?’
더 이상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상태. 그녀는 계속해서 자괴감에 빠지고 있었다.
그 탓에 그녀의 표정은 좀처럼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
갑자기 뒤에서 들린 목소리.
타샤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황급히 돌렸다.
엘릭이 피식 웃으면서 말하고 있었다.
“타샤 님은 율법사들 중에서도 어린 편에 속하잖아요?”
엘릭의 말대로였다.
율법사들은 전부 5, 6서클이 넘어가는 만큼, 나이가 제법 차 있었다.
특히 5서클은 자신만의 마법의 길, 마도(魔道)에 들었다고도 하는 위치.
그녀가 마도에 들어선 것은 역대 마탑의 역사를 통틀어봐도 최연소였다.
그만큼 성취하기 어려운 경지인 것이다.
엘릭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성취를 이뤄낸 타샤니, 충분히 자신감을 가지라고.
“물론, 이중에선 제가 가장 어리긴 합니다만.”
“풉!”
그의 농담에 타샤도 결국 웃고 말았다.
엘릭이 슬쩍 타샤의 옆모습을 보았다.
다행히 표정이 이전보다 다소 나아지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타샤의 얼굴에 살짝 그늘이 내려앉았다.
가벼운 분위기가 흐려지니 다시 이전 전투가 스멀스멀 떠오른 탓이었다.
“위로라도… 고마워요.”
“음? 전 진심입니다만.”
그 순간, 엘릭의 후드 속에 숨어있던 새끼 용들이 튀어나와 타샤에게 와락 안겼다.
끼유유!
타샤의 품에 안겨 부비적 대는 모습이 귀엽기만 했다.
그러면서 전해지는 따스한 온기에… 괜히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울적한 마음이 풀리는 것 같았다.
“….”
그녀는 새끼 용들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엘릭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엘릭의 옆모습이 보였다.
엘릭은 다시 앞을 보고 있었지만.
어쩐지 타샤는 새끼 용들이 이렇게 자신에게 안긴 것이 엘릭이 미리 신호를 준 덕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워요.”
“예? 뭐라고요? 잘 못 들었습니다만.”
작은 혼잣말.
엘릭이 못 들은 척 연기를 했지만, 그만한 고수가 그런 실수를 저지를 리 없잖은가.
괜히 타샤가 부끄러워할까 봐 배려해주는 것이다.
타샤로서는 엘릭의 그런 마음씨가 더욱더 고마울 뿐이었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그렇기에 타샤는 더 화사하게 싱긋 웃을 수 있었다.
앞을 보고 있던 엘릭의 입가에도 슬쩍 미소가 걸렸다.
* * *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모두 준비하도록.]
엘릭과 가이의 일행들은 언제부턴가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저기군.]
언덕 아래. 모두의 시선이 닿은 곳.
잠잠한 달빛 아래, 숲길을 달리는 복면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감찰본부에서 몰래 빠져나간 2국과 5국이었다.
가이가 슬쩍 고개를 돌려 엘릭을 쳐다봤다.
끄덕!
엘릭이 고개를 가볍게 흔들었다. 시작해도 좋다는 신호였다.
그 즉시, 가이가 율법사들에게 손짓했다.
[대기.]
미리 설정해둔 메시지 마법에 따라 가이의 지시가 율법사들에게 곧바로 전달되었다.
파아아-
율법사들이 일제히 은신을 풀었다.
잔잔한 이펙트가 그들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준비.]
율법사들이 앞으로 쭉 내뻗은 손. 그 위로 화염이 치솟았다.
화르르륵!
점점 커지는 불덩이들.
감찰요원들이 앞으로 내달리다 말고 뭔가를 느꼈는지 무언가를 찾아 고개를 위로 들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투하.]
불덩이가 웬만한 장정의 크기를 훨씬 능가했을 무렵.
율법사들이 일제히 아래쪽으로 불덩이를 있는 힘껏 날렸다.
콰콰콰콰쾅!
퍼퍼퍼펑-
콰릉, 콰릉, 콰르르릉!
수십 개나 되는 커다란 불덩이들이 한 뭉치로 떨어지는 모습은 일견 두렵기까지 했다.
운석이 다발로 쏟아지는 것처럼 보였으니.
“끄아아악!”
“기습이다! 기습!”
“어, 어디야!”
화아아아-
어두웠던 숲이 대낮처럼 환하게 빛났다.
덕분에 요원들이 적잖게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하게 드러나고 말았다.
거기다 대지에 처박힌 불덩이에서부터 불길이 치솟으면서 삽시간에 주변이 불바다가 되고 말았다.
“젠장! 함정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움직이고 있는 걸 어떻게 알아낸 거지?”
“입을 함부로 놀린 놈들은 나중이라도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선은 지금 위기를 바로 잡고, 적이 누군지부터 파악해야 할 것 같습니다.”
두 국장은 침착하게 불길을 물리치며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 그리 멀지 않은 언덕 위에서 마법사 무리가 모여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유독 한 명이 눈에 뜨였다.
금발녹안의 사내.
“메르빙거…! 역시 또 저 자란 말인가!”
까득!
베텍이 이를 악물며 중얼거리다가, 다급히 요원들에게 외쳤다.
“둘로 나눈다! 한쪽은 마법사들을 막고, 나머지는 계속해서 길을 뚫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붙잡혀서는 안 돼!”
“복명!”
“복명!”
그의 말에 허둥거리던 요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중요한 자료들을 가진 이들은 다시 앞으로 내달렸고, 남은 이들은 곧바로 역혈대법을 사용했다.
여기서 다치거나 죽는 건 아무도 생각지 않았다.
상대는 메르빙거와 마탑이었다.
어차피 붙잡힌다면 끝장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끄드드드득-
콰드득!
몸집이 커지고 피부색이 바뀐 요원들. 그들은 검을 뽑은 뒤, 율법사들을 향해 돌진했다.
“놈들의 수는 많지 않다! 포위해서 말려 죽여!”
화르르르!
율법사들 또한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빠르게 마법을 캐스팅하곤, 감찰요원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마법을 퍼부었다.
하늘을 따라 수십 개의 마법진이 그려지고, 화려한 이펙트가 명멸하면서 폭격이 개시되었다.
콰콰콰콰!
허공 곳곳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검격이 허공을 가르는 아비규환의 전투가 시작됐다.
주위의 나무가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픽픽 쓸려나갔다.
엘릭이 움직인 것도 그쯤이었다.
“【휘몰아쳐라】.”
휘휘휘휘-
그는 다가오는 요원들을 강제로 밀어내고, 벌써 저만치 앞서서 멀어지는 놈들의 뒤를 쫓았다.
“도망치게 둘 순 없지.”
여기까지 왜 왔는데.
이쪽은 가이에게 맡긴다. 그사이에 자신은 도주자들을 붙잡을 생각이었다.
저곳에 릴림의 ‘진짜’ 숨통을 옥죌 수 있는 비밀이 많을 테니.
재능 삼킨 마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