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42화
감찰국
“네까짓 놈들이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오는 것이냐!”
별궁 앞에서 근위병들과 릴림들이 충돌하는 소리가 3층까지 들렸다.
“마왕이시여!”
특등 집사의 간곡한 외침이 있은 후에야.
“하!”
다이애나는 겨우 이성을 되찾은 듯 다시 고고한 얼굴로 돌아왔다.
“도망?”
다이애나는 코웃음을 치며 부서진 부채를 집사에게 던졌다.
“어디 그게 쉽게 되겠느냐?”
다른 곳도 아니고 이곳은 황궁의 중심이었다. 아무리 대악마인 그녀라 할지라도 이곳에서 도망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세력을 심어둔 감찰국은 이미 꼬리 자르기에 들어간 상황.
모든 죄를 자신에게 뒤집어씌우고 있는 것이었다.
한순간에 자신의 배경마저 잃은 상태에서 도망쳐 봤자 시간을 끌어 줄 이들도 없었다.
한 마디로 덤터기를 써야 하는 것이다.
그런 만큼 감찰국에서도 어떻게든 자신들을 옥죄려 하겠지.
“그, 그럼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하시면 설마…!”
“그래.”
다이애나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붉은 입술은 흡사 피에 물든 것처럼 보였다.
“모든 게 망가진다 하여도, 설사 저들의 손에 망가지게 내어둘 순 없지. 화려한 꽃을 틔우는 것도, 그 꽃을 꺾는 것도 내가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녀는 대마왕.
지금이야 마신이 자취를 감춘 이래, 그녀의 명성도 바닥을 기고 있는 중이라지만.
그래도 한때 세계를 발아래에 두던 신적인 존재였다.
한낱 인간 따위에게 자신의 운명을 내어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며 릴리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봤다.
저 너머. 황제가 머무는 본궁이 보였다.
자신을 총애하며 매일 같이 함께 밤을 보냈던 황제.
근위병들이 이곳을 공격해온 지 한참이 됐는데도 그는 나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쯧! 하긴 저 박쥐 같은 작자에게 뭔가 결단을 바란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음험하고 간교하기가 참으로 나보다도 더 뱀 같지 않은가 말이야.”
혀를 찬 다이애나는 어느덧 대부분의 릴림을 죽인 근위병들을 내려다 봤다.
그 순간, 한 근위병이 그녀를 발견하고 외쳤다.
“저기 있다! 별궁 위에 다이애나 비가 있다! 죽여라!”
“건방진 것들.”
미간을 살짝 찌푸린 다이애나의 몸에서 마기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고오오오!
“잘 봐라. 너희들이 잡으려는 나. 릴리스가 누군지 똑똑히 보여주마!”
츠츠츠츠-
마기는 어느덧 안개처럼 자욱하게 퍼져 주변을 감쌌다.
삽시간에 바뀌어버린 분위기.
꿀꺽.
갑자기 온몸을 옥죄어오는 공포에 근위병들이 침을 삼켰다.
그러기를 잠시. 이내 그 속에서,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뱀이 안개에서부터 튀어나와 근위병들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크와와아-
학살이 시작됐다.
* * *
아무런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은 야심한 밤.
조용한 공터에 어느 한 무리가 모여 있었다.
가이와 그가 데려온 마탑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릭이 도착했다. 적사자, 그리고 네임리스와 함께.
“먼저 도착해 계셨네요?”
그렇게 말하는 엘릭의 눈에 가이의 뒤에 있는 마법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잘 훈련된 듯 각이 딱 잡혀 있는 모습이었다.
사전에 가이에게 부탁한 만큼, 확실히 실력 있는 마법사들을 데리고 온 것 같았다.
그런 엘릭의 시선을 느낀 가이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마법사들을 소개했다.
“어떤가? 최소 5, 6서클은 되는 워메이지, 율법사들이다.”
그의 말에 엘릭이 감탄했다.
율법사(律法師).
그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사자공가에 ‘늑대’와 ‘독수리’ 같은 맹수들이 있어 맹수의 왕이라는 사자의 위신을 지켜준다면.
마탑에는 율법사가 있어 마법사의 체계와 규칙을 수호하노라고.
그들이야말로 마탑이 이 세계에 제대로 된 영향력을 투사할 수 있도록 돕는 진실한 힘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그들 중 몇몇은 오고 가며 엘릭도 본 적이 있는 얼굴들이었다.
‘역시 가주는 가주인가.’
몇 번이나 느끼는 거지만, 가이는 참 대단했다.
저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마법사들을 이렇게 하루아침에 모을 수 있다는 것이.
“다들 대단하네요.”
“그럴 수밖에. 내가 직접 가르친 이들이니까.”
“직접… 가르치셨다고요?”
“그래. 실력만 있으면 소속 학파가 어디든 간에 데리고 와 제자처럼 가르침을 주었었지.”
그의 말에 엘릭의 눈이 커졌다.
그도 그럴 게, 일반적으로 마탑은 황금사자라는 걸출한 인물을 중심으로 중앙집권이 잘 되어있는 사자공가와는 다르게, 파벌주의가 아주 강한 편이었다.
마법을 추종하는 수많은 학파와 가문들이 뭉친 연합 세력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마법사들은 각자 배우는 마법에 따라 소속이 갈리게 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러한 대부분의 학파는 자신들의 마법이나 기술이 외부로 알려지는 것을 극심히 꺼려하는 편이었다.
비인부전(非人不傳, 사람이 아니면 전수하지 않는다)이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었다.
때때로 학파가 다를 경우, 부자지간에도 마법을 서로 전수하는 것이 불가능하기도 했으니.
아니, 학파 내 규율이 여유롭다고 하더라도, 익힌 마법의 상성이 달라 방향을 잡아주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그런 걸 신경 쓰지 않고 가르쳤다?
그것도 네레스타의 가주인 본인이 직접?
이례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탑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
‘거기다 각자가 익힌 마법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방향성을 잡아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이 네레스타가 얼마나 걸출한 인물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지. 배포면 배포, 실력이면 실력, 정치면 정치. 네레스타가 정말 제대로 된 인물을 수장으로 세운 셈이로고.』
메피스토도 엘릭과 같은 생각이었는지 깊게 탄복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엘릭은 율법사들을 슬쩍 훑었다.
확실히 그래서 그런지 가이에 대한 그들의 충성도가 무척이나 높아 보였다.
군율도 잘 잡혀 있는 것이, 그동안 가이와 함께 여러 실전을 겪으며 규율도 잘 갖춰진 거 같았다.
“…?”
그러다 자신을 보는 율법사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가이가 있어 참고 있지만, 어째서인지 탐탁지 않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몇몇의 눈엔 살기까지 있었다.
『대체 사고를 얼마나 치고 다니던 것이냐? 어째 너를 만나는 사람들마다 눈깔이 죄다 뒤집혀 있군.』
[…조용히 있어 봐요. 안 그래도 생각 중이니까.]
괜히 뭘 잘못했나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엘릭의 표정을 본 가이가 피식하고 웃으며 사과했다.
“미안하네. 율법사들이 전부 귀족 출신이다 보니 그런 것 같군.”
“그게 왜…?”
엘릭이 의문을 표하는데 가이가 그의 뒤를 가리켰다.
시선이 자연스레 뒤로 향했다.
그곳엔 안드레와 네임리스가 가만히 서 있었다.
“아.”
그제야 엘릭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아무래도 네임리스에게 당한 희생자들의 가족이라도 섞여 있나 보네.’
이래서 사람을 거둔다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진 인연과 악연도 같이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걱정 말게. 이 아이들 모두 공과 사를 구분 못할 정도는 아니니. 자네들도 그만하고.”
율법사들이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는 가운데.
짝!
가이가 가볍게 박수를 치면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나저나, 일단 모아 달라고 해서 모으긴 했는데. 이제 어떻게 할 거지?”
“지금 장미궁 쪽이 어떤 상황인지는 대충 아시죠?”
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황실에 숨어든 마족의 근원을 없애겠다면서 근위병들이 난리를 피우고 있었으니까.
그 선두에는 크롬헬이 있는 만큼 여러 귀족과 언론들의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고.
씨익!
엘릭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남들이 열심히 미끼를 물어주고 있을 때, 저희는 빈집털이를 해야 하지 않겠어요?”
“빈집털이? 하하하.”
단숨에 엘릭의 작전을 이해한 가이의 입에 엘릭과 똑같은 미소가 걸렸다.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이군!”
* * *
“그건 빨리 가지고 나가고, 여기에 있던 것들은 전부 소각해! 얼른!”
어둑한 밤.
감찰본부는 어느 때보다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거기! 대체 뭐하는 거야! 빨리빨리 안 움직여!”
“죄, 죄송합니다!”
온갖 서류가 가득 담긴 박스를 든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불필요한 서류를 불태우고 있었다.
“아씨. 이게 뭔 개고생이야.”
감찰국 2국장 베텍.
그는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잔뜩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난데없이 1국장 블랙이 싸지른 똥을 치워야 하는 지금 상황에 잔뜩 짜증이 난 것이다.
그때 그의 눈에 뻐근한 허리를 붙잡고 스트레칭을 하던 감찰요원 둘이 눈에 들어왔다.
베텍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잡동사니를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파악!
“이 새끼들이 빠져가지고! 다들 지금 정신없이 뛰어다니는데 쉬어? 쉬는 거야?”
“아,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냐? 허리 세우지 말라고 이것들아. 서두르라는 말 못 들었어? 근위대가 들이닥치기 전에 끝내야 한다니까!”
“죄송합니다!”
잠시 한숨 돌렸다가 호통을 들은 자들은 괜히 또 혼날라, 황급히 다른 서류를 옮기기 시작했다.
쯧!
그 모습을 보며 베텍은 불만족스럽다는 듯이 혀를 찼다.
지금 상황이 어떤지 모르는 건가. 한심하긴.
어쩌면 오늘날 감찰국이 맞게 된 위기 상황은 저런 말단들이 모이고 모여 만들어진 것일지도 몰랐다.
‘내가 1국장이 되고 나면 싹 다 정리해야겠어. 어떻게든.’
베텍은 우선 이번 일만 어떻게든 해결하고 나면 자신이 감찰국을 움켜쥐는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누군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을 건 것은 바로 그때였다.
“2국장님, 힘드시겠지만 조금만 참읍시다.”
“5국장.”
고개를 돌려보니 감찰 5국장 코노텐이 있었다.
뱀처럼 간교한 인상을 지닌 작자.
“어차피 지나갈 소나깁니다. 잠깐만 참고 피하면 금방 해가 뜰 겁니다.”
“후우… 그래야 할 텐데.”
배텍 또한 알고 있었다. 황실에서도 완전히 감찰국을 쳐낼 생각이 없다는 것을.
그들은 그동안 황실의 유용한 검이자 방패가 되어줬으니까.
황실의 그림자.
황실이 항상 고고한 성채가 되기 위해서는 그만큼 음지에서 그들의 뒤를 받쳐줄 사람들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히 불안한 감정이 드는 건 왜일까.
베텐은 괜한 기우일 거라 생각하고, 고개를 저으면서 잡생각을 떨쳤다.
그러고는 코노텐의 등을 두드려주며 의미심장한 눈짓을 주고받았다.
“준비는?”
“거의 다 됐습니다.”
“고맙군. 그럼 마저 수고하게.”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까악까악!
이들은 머리 위에서 웬 까마귀 한 마리가 몰래 내려다보고 있는 걸 눈치 채지 못했다.
* * *
감찰본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풀숲.
“보셨죠?”
엘릭이 수정구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그곳엔 감찰본부의 정경이 훤히 보이고 있었다.
야수왕 길리티로부터 배운 능력을 사용한 것이었다.
패밀리어로 지정한 동물과 시야를 공유하는 것.
이를 본 가이 또한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황실과 아주 죽이 잘 맞는군.”
근위대가 들이닥치기 전에 전부 처리해야 한다는 베텍의 말과는 달리.
이미 감찰본부 주변에는 근위대가 도착해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멀뚱히 대기하고만 있다는 것뿐.
곧 전투가 벌어질 수 있다는 긴장감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몇몇은 아예 지루하다는 듯이 늘어져라 하품을 해대기도 했다.
기다려주는 것이다.
필요한 자료들을 모두 정리할 수 있도록.
누가 봐도 들이닥쳐서 압수수색을 진행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리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
“장미궁이 착실하게 미끼가 되어주는 동안 감찰국을 어떻게든 살려놓고 말겠다는 의지로군.”
“그런 거죠.”
“우리의 목적은 바로 그 현장을 터는 거고?”
“바로 그겁니다.”
엘릭이 짓궂은 미소를 흘렸다.
“저놈들 밑천이 싹 다 털리고 나면 얼마나 안달이 날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재능 삼킨 마법사